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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구소 기감 서동운(徐同運)
 
원자력연구소 기감 서동운(徐同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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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전라남도 광주시 湖南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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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중학교光州西中學校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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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第三高等學校 理科 甲類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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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국립서울大學校 工科大學 通信學科 졸업(電子工學·高周波工學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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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서울大學校 大學院 通信工學科 졸업(工學碩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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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미국 일리노이大學 電子管理硏究所에서 1년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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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체신부 中央電氣試驗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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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中央電氣試驗所 제2부 技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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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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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電子工學科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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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원자력원原子力 기감技監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해 6월 초대 김법린(金法麟) 원장에 이어 김양수(金良洙) 원장이 취임했고, 7월 말썽 많았던 김대만(金大萬) 사무총국장, 기감 [[서동운]](徐同運)이 함께 사임하고 새로 [[서광순]](徐廣淳)이 사무총국장으로 왔다. 연구행정 인사들을 새로이 충원하자 연구관들의 연구의욕도 살아났다. 이번에는 연구 기자재 도입이 발목을 잡았다. 연구행정이 느리고 일방적이어서 또다시 원자력원과의 감정이 나빠졌다. 게다가 원자력위원회 위원들이 원자력도 모르면서 직책상 연구성과 부진과 부실을 꼬집고 질책하는 바람에 관계 악화는 더욱 심해졌다.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해 6월 초대 김법린(金法麟) 원장에 이어 김양수(金良洙) 원장이 취임했고, 7월 말썽 많았던 김대만(金大萬) 사무총국장, 기감 [[서동운]](徐同運)이 함께 사임하고 새로 [[서광순]](徐廣淳)이 사무총국장으로 왔다. 연구행정 인사들을 새로이 충원하자 연구관들의 연구의욕도 살아났다. 이번에는 연구 기자재 도입이 발목을 잡았다. 연구행정이 느리고 일방적이어서 또다시 원자력원과의 감정이 나빠졌다. 게다가 원자력위원회 위원들이 원자력도 모르면서 직책상 연구성과 부진과 부실을 꼬집고 질책하는 바람에 관계 악화는 더욱 심해졌다.

2022년 10월 26일 (수) 10:31 판

원자력연구소 기감 서동운(徐同運)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시 湖南洞

학력 광주서중학교光州西中學校 졸업

日本 第三高等學校 理科 甲類 졸업

京城帝國大學 豫科 理科 甲類 졸업

1949년 국립서울大學校 工科大學 通信學科 졸업(電子工學·高周波工學 전공)

1952년 서울大學校 大學院 通信工學科 졸업(工學碩士)

1955년 미국 일리노이大學 電子管理硏究所에서 1년간 연구


경력및활동

1949년 체신부 中央電氣試驗所 근무

1951년 中央電氣試驗所 제2부 技佐

1952년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강사

1957년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電子工學科 주임

1959 원자력원原子力 기감技監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해 6월 초대 김법린(金法麟) 원장에 이어 김양수(金良洙) 원장이 취임했고, 7월 말썽 많았던 김대만(金大萬) 사무총국장, 기감 서동운(徐同運)이 함께 사임하고 새로 서광순(徐廣淳)이 사무총국장으로 왔다. 연구행정 인사들을 새로이 충원하자 연구관들의 연구의욕도 살아났다. 이번에는 연구 기자재 도입이 발목을 잡았다. 연구행정이 느리고 일방적이어서 또다시 원자력원과의 감정이 나빠졌다. 게다가 원자력위원회 위원들이 원자력도 모르면서 직책상 연구성과 부진과 부실을 꼬집고 질책하는 바람에 관계 악화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원자력연구소는 직원 전원이 사직서를 쓰고, 결의문·건의문·연판장 등을 각계에 돌리며 원자력원, 원자력위원회에 대한 그동안의 울분을 드러냈다. 연구관들은 연판장에 사직서를 첨부해 행정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국무총리실에 전달하려다 접수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원자력원장을 비롯해 상임 원자력위원, 사무총국장, 그리고 원 및 소의 총무과장 총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미 완성해야 할 원자로 건설은 아직 요원했고, 이미 도입했어야 할 시설 및 기자재들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구조건과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아 ‘페이퍼 워크’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극상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건국 이래 행정기관에서 발생한 최초의 하극상 사건으로 기록됐다.

4·19혁명으로 자유의 바람을 타고 젊은 연구관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가끔 연구관답지 않은 돌출행동도 나타났다. 이때 모든 일이 합의에 의해 원만하게 처리되리라 기대했던 신임 소장에 대한 신뢰에 이미 틈이 생기고 있었다. ‘최형섭 인사’는 새로운 내분의 도화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