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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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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 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徐有防)이 두문동 72인 중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孟)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세 명을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그대로 배향이 시행되었다. 이후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게 되었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게 되었다.

2022년 9월 24일 (토) 12:34 판

杜門洞七十二賢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서중보(徐仲輔-직제학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서보(徐輔-공조전서 본관;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광준(徐光俊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장령 서견(徐甄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성사제(成思齊) 이경(李瓊)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곳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종 때 설과(設科)를 했는데, 이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하였으므로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정조 대 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徐有防)이 두문동 72인 중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孟)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세 명을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그대로 배향이 시행되었다. 이후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게 되었다.

조선의 새 임금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선비의 학업은 닦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1)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택리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더욱 괘씸한 것은 정도전이 목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고려 말기에 재상 반열에 있으면서 왕검과 저연이 하던 짓을 따른 일이다. 나라를 팔아서 제 자신의 사리를 채우고 스승을 해하며 벗을 죽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려가 망하자 또 왕씨의 종친을 없애기 위한 꾀를 내었다. 즉 자연도(紫燕島)에 귀양 보낸다는 말로 속인 후 큰 배에다 왕씨들을 가득 태워 바다에 띄운 다음, 비밀리에 배 밑에 구멍을 파서 가라앉게 한 것이다. 당시 왕씨와 친하게 지내던 스님 하나가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는데 왕씨 중의 한 사람이 이런 시를 읊었다.

천천히 젓는 노 소리 푸른 물결 위인데, 비록 산승이 있다 하나 네 어이하리.

조선을 창업하는 데는 일등공신이었으면서도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처세에 능한 모사가’, ‘아예 없었어야 할 사람’으로 평가된 채 역사의 물밑 속으로 잠긴 삼봉(三峰) 정도전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영광은 이씨 왕조에게, 오욕은 삼봉 정도전에게 씌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