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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할아버지: [[서박]](徐樸 봉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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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고려5)|서진]](徐進 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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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30일 (화) 19:52 판

성씨 = 연산 서씨 (連山 徐氏)

관향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시조 = 서준영(徐俊英)

중시조 = 서의민(徐義敏)

집성촌 = 충청남도 홍성군
충청남도 서산시

년도 = 2015

인물 = 서해조, 서병덕, 서기철, 서철모

인구 = 7,510명

순위 =

비고 =

연산 서씨(連山 徐氏)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이천서씨(利川徐氏)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 11세손인 시조 서준영(徐俊英)의 아들 서보(徐寶)가 있었으나 이후 문헌이 없어서 조선조에서 참군(參軍)을 지낸 서의민(徐義敏)을 1세조로 한다. 2세손 서종수(徐宗秀)가 현감(縣監)을 지냈고, 서종수의 아들 서련(徐憐)이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서련의 아들 서천령(徐千齡)은 1546년(명종 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서련(徐憐)은 현감 서종수(徐宗秀)의 아들로 19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제주 판관(濟州判官)로 나가 10대 명관(名官)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제주도에는 한라산(漢拏山) 석굴에 큰 뱀이 있어 풍우조화(風雨造化)를 부린다고 하여 사신(蛇神)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다. 심지어는 사신을 모시지 않으면 불행이 닥친다고 하여 시집까지 꼭 신주(神主)를 옮겨다가 모시곤 하여 폐해가 극심하였다.

그는 제주 판관으로 나가 이 사신당(蛇神堂)을 두들겨 부수고 민심(民心)을 안정(安定) 시켜 도민(島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고, 지금까지도 제주 남부(濟州南部)에 사는 사람들은 사신당을 숭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후 서련(徐憐)의 아들 서천령(徐千齡)과 증손 서후적(徐後積 : 감찰 주의 아들)도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고, 부사(府使)로 나갔던 서택선(徐宅善),서윤박(徐潤璞) 과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서간세(徐幹世), 판관(判官) 서병덕(徐秉德)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서승태(徐承台)가 철종(哲宗) 때 의병(義兵)들의 군량(軍糧)을 조달했고, 광천(廣川)에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하여 육영사업(育英事業)에 헌신했으며, 서기환(徐基煥)은 의병(義兵)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주성(洪州城) 전투에 참가했다가 접전중 순절하여 연산 서씨를 대표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서씨일가연합회 [[1]] [[2]]

본관

연산(連山)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옛 지명이다. 백제의 황등야군(黃等也郡)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연산군(連山郡)으로 고쳤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연산현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충청도 연산현의 토성(土姓)으로 (宋)·서(徐)·손(孫)·고(高) 4성이 기록되어 있다.[1] 1914년 연산면 등 5개 면으로 나누어 논산군에 통합되었고, 1996년 논산시로 승격되었다.

인물

서련(徐憐) 판관은 김녕사굴(金寧蛇窟)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제주도와 연관된 서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입도조 서희례(徐希禮)보다 4대를 앞서는 인물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9세 손이며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으로부터는 5세손이 된다.

  • 서해조(徐海朝, 1689년 ~ 1770년) : 9세손. 증조부는 서효적(徐孝積), 조부는 서필행(徐必行), 아버지는 서욱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구구재(九九齋). 1714년(숙종 40) 생원이 되고, 1735년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7년 자여찰방(自如察訪), 목릉별검(穆陵別檢)을 거쳐 174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다. 1745년 예조·병조좌랑과 병조정랑을 거쳐, 연풍현감으로 나가 빈번한 사행(使行)으로 인한 민폐를 덜어주었다. 1751년에 사헌부지평에 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763년 병조참의, 1770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 서병덕(徐秉德, 1712년 ~ ) : 10세손. 자는 유호(攸好), 호는 주은(酒隱). 충청도 예산군 광시면 출신.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51년(영조 27)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헌납(獻納)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1811년(순조 11) 궤장(免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 서기환(徐基煥, 1849년 ~ 1906년)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1906년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절했다.
  • 서승태(徐承台) : 한말 독립운동가
  • 서덕모(徐德模, 1954년 ~ ) : 제10대 충청북도 정무부지사
  • 서용칠(徐容七, 1954년 ~ ) : 연세대학교 환경공학부 교수
  • 서기철(徐基哲, 1962년 ~ ) : KBS 아나운서
  • 서철모(徐喆模, 1968년 ~ ) : 경기도 화성시장

항렬자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基(기) 錫(석) 承(승) 模(모) 容(용) 喆(철) 鐘(종) 源(원)
洙(수)
寅(인)
相(상)
燮(섭)
烈(열)
廷(정)
圭(규)
鎭(진)
鎬(호)
泳(영)
泰(태)
穆(목)
根(근)
然(연)
熙(희)
坤(곤)
均(균)
鉉(현)
鏞(용)

집성촌

문화재


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

제주목판관(濟州牧判官) 서련(徐憐)은 중종 8년(1513) 약관(弱冠)의 나이로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한 후 김녕사굴(金寧蛇窟)의 뱀에게 해마다 어린 처녀를 제물로 바쳐 오던 미신과 폐습을 퇴치한 선정관(善政官)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서(徐)판관의 행적은 서씨의 자랑일 뿐아니라 제주의 역사적 문헌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녕사굴에 얽힌 이야기를 남겨 놓은지 460년이 흐른 후 김녕사굴 앞에는 50여년 전 세워진 비(碑)가 초라하게 그 유래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비석은 1942년 구좌면 하도리(下道里) 출신의 유지(有志) 강공칠(康公七)이 서련 판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였다. 그러나 비문(碑文)은 오랜 세월동안 풍수에 씻겨 읽기조차 어렵게 되었으며 외관 또한 초라하게 변해 버렸다. 때문에 이곳을 찾는 뜻 있는 인사나 관광객까지도 새로운 사적비(事跡碑)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71년 연산인(連山人)이며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서용길(徐容吉)이 사적비 건립을 발의하고 제주문중에 협조를 구해 왔다. 재경 연산서씨종친회(在京連山徐氏宗親會)에서 본 사업을 추진하려는데 제주라는 지역적 문제로 당국의 지원을 받고 절충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제주파연친문중회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에 제주연친회는 이 사업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제주도 관계당국에 사적비건립사업 지원비 요청을 하는 등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서(徐)판관이 이천서씨의 후손으로만 알고 있었고, 연산인(連山人)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더구나 한때는 서련 판관을 입도조의 부친인 서홍철(徐弘喆) 판관과 동일 인물로 인식하였던 때마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김녕사굴의 일화(逸話)에 등장하는 서련 판관이 연산徐氏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서련은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의 5세 손이다. 그러나 연산인도 비조(鼻祖)는 역시 이천서씨의 시조인 아간공(阿干公) 서신일으로 19세가 된다. 오늘날 연산 서씨로 분파(分派)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연성군(連城君)에 봉(封)해진 가문을 빛내기 위한 것으로 서련이 제주에 부임할 당시에는 이천(利川)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보아진다. 제주문중에서는 본관을 초월하여 서련과 같은 선정관(善政官)의 사적비 건립은 제주에 있는 서씨문중이 주관하여 추진함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또한 서울에서 제작하여 내려보낸 사적비는 크기가 너무 작아, 관광지에 새로이 세우는 사적비로서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관계기관과 현지 주민의 여론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10월 16일에 열린 문중회에서는 본 사업을 제주연친회에서 주관하여 추진키로 결의하여 활발하게 사업추진이 진행되었다. 제주문중에서 사업을 주관하되, 본 사업을 도민적 행사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건립추진위원회의 구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추진위원장에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박경훈(朴景勳)을 추대하고 제주도내 주요 기관장과 유지, 북제주군 지방문화재위원, 도내 서씨 문중인사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서련판관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제주도의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도 사적비 건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제주도에서 문화재 보수비로 30만원, 북제주군에서 10만원을 보조해 주었다.

서울에서 보내온 비석과는 별도로 새롭게 비문을 제작한 제주문중에서는 1972년 1월 10일에 착공하여 2월 28일 사적비는 건립을 완료하였다. 4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전면에는 「제주판관서련공덕비(濟州判官徐憐功德碑)」라고 새겨 있고, 후면에는 1백 단어에 이르는 서판관의 약력과 행적이 적혀있다. 총 공사비는 83만5천원이 소요되었는데, 제주문중에서 부담한 것은 43만5천원이었다.

1972년 4월 10일에는 서(徐)판관의 살신구민(殺身求民)의 덕(德)을 기리기 위한 사적비 제막식이 김녕사굴 앞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승택(李昇澤) 제주도지사 등 도내 각급 기관장과 서씨 문중인, 주민 등 3백여명이 참석하였다. 제막식 행사는 개식사 · 제막 · 행제(行祭) · 분향 · 서련판관 약력보고 · 경과보고 · 비문낭독 · 치사 · 송덕사 · 감사패 증정 · 기념식수 · 제막기념 무용공연 순으로 거행되었다. 감사패는 김녕사굴 관리인으로서 유적지 관리와 본 사업을 추진하는데 적극 협조해 준 김군천(金君天)에게 증정되었다.

이 사업이 종료된 후 재경연산서씨종친회에서는 서판관의 본관이 연산(連山)임을 들어 건립비용의 내용에 이천서씨의 후손인 양 기재됐음에 유감의 뜻을 서신으로 보내왔다. 이에 제주문중회에서는 서씨의 뿌리는 이천이므로 분파적(分派的)이고 협의적(狹義的)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나, 넓은 의미로 보면 이천(利川)의 후손임이 분명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처음부터 편협한 생각으로 이 사업에 임했다면 다른 본관(本貫)을 가진 종친회에서 발의한 사업을 제주문중에서 시종일관 성의를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이며, 비문에는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비를 세운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지, 이천서씨 문중에서 세운다고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로지 서(徐)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제주문중회에서 정성을 바친 사업을 협의(狹義)로 평가함은 오히려 유감임을 회신하였다.

어떤 일이든 마치고 보면 다소의 부작용이든 아쉬움이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서련판관 사적비 건립사업은 그 발의가 연산 서씨종친회(連山徐氏宗親會)에서 되었으나, 제주의 이천서씨문중회에서 주관하여 사업을 추진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관(本貫)을 초월하여 자랑스런 선현(先賢)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문화재적인 가치를 높이고자 하여 스스로 짊어진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당시 회장이었던 서상진(徐相眞) · 부회장 서상경(徐相京) · 총무 서용주(徐鎔洲) · 재무 서상흠(徐相欽) 등 임원들이 1년에 걸쳐 애쓴 노력의 공로는 이러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서승태(徐承台)

박원식 등 주도 광천시장서 독립만세운동 서승태 1908년 덕명학교 설립 후진 양성

광천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7일 홍성읍 장터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한 것으로 시작, 3월 6일 광천리 박원식의 집에서 이명종이 박세화로부터 경성의 독립에 대한 상황과 조선독립을 주창하는 뜻을 기재한 선언서를 보고 박원식과 함께 행동할 것을 협의했다.

3월 8일에 박원식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취지의 선언서를 종이에 써서 광천시장과 옹암리 두 곳에 게시해 지역 주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다수의 독립선언서를 각 가정에 배부할 것과 광천시장 장날을 이용해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선동해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후 잡화상을 경영하던 최응모, 제화점을 운영하던 오인섭, 농사일에 종사하던 성배호 등에게 이 계획을 상세히 전해 찬동을 얻었다. 이후 3월 16일에 서승태를 찾아가 선언서의 내용을 요약해줄 것을 부탁했다.

3월 18일 오인섭의 집에서 박세화, 이명종, 최응모, 오인섭 등이 선언서 510매를 복사해 이면종과 성배호 등은 이날 밤 독립선언서를 광천리와 옹암리 각 가정에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이명종, 최응모, 오인섭, 성배호, 서승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명종은 징역 1년6월, 최응모와 성배호는 징역 1년, 오인섭은 징역 10월, 서승태는 징역 8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어 3월 21일에는 광천시장과 은하면 대천리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서승태의 자는 성삼(聖三), 호는 일농(逸農)이다. 연산 서씨 출신으로 연산 5세조인 서련 제주판관의 13세손으로 1854년 광천읍 상정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 방면에서 홍주성을 향해 행군하는 것을 보고 당시 지방의 부호였던 박모의 창고를 허락도 없이 열어 창고 안 곡식을 군량미로 제공했다. 1908년부터 공립 홍주보통학교의 학무위원을 역임하면서 교육활동에 투신했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만회하는 길은 신문화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해 1908년 상정리에 덕명학교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서승태의 교육열이 알려지면서 당시 기호홍학회 홍성지부에 의해 본 학회로 보고되면서 황성신문 1909년 3월 9일자에 소개되기도 했다. 1910년 7월에 있었던 제1회 졸업식에는 서홍모를 비롯해 8명이 졸업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놓이자 박창병, 서태석, 방철용, 이희홍과 졸업생 8명은 학부형회를 조직해 운영이 연장되고 6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다. 유능한 인재양성을 추구했던 덕명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후 광천읍 신진리에 광천보통학교가 일본인에 의해 세워지면서 덕명학교는 폐교됐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광천보통학교는 덕명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일농 선생의 뜻을 후세에 알리고자 홍학기념비를 세웠다. 1992년 국가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형목 연구원은 ‘한말 홍성지역 근대교육운동의 성격’에서 “을사늑약 이후 자강단체 지회도 조직됐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번천면국채보상기성회와 기호홍학회 홍성지회로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이 단체에 의해 주도됐다”며 “기호홍학회 지회원들의 3면1교제에 입각한 의무교육 시행을 계획한 이들의 노력으로 홍성지역 근대교육운동이 사실상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1914년 덕명학교 나무명패로 1914년 홍주에서 홍성으로 개명될 당시 만든 것으로 1915년 덕명공립보통학교로 통합 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왼쪽) 황성신문 1909년 3월 9일자 신문에 기록된 덕명보명. 충남 홍주군 궁경면(현 광천) 덕명학교는 서승태 씨가 독립설립해서 열심히 유치하는 중 박창병, 이충호, 서태석, 김병욱 등 여러 명이 찬성해 뜻을 함께했고 의연금을 내는 자가 많아 나날이 학생들이 증가하니 호서의 모범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을사늑약 직후까지 사립학교 설립은 전무했는데 1907년을 정점으로 변화됐다. 1908~1909년은 교육운동의 전성기로 대표적 교육기관이 홍명학교, 호명학교, 덕명학교, 광명학교 등이다. 이 학교들은 단순한 사립학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지역단위 근대교육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였다.

기호홍학회는 기호지역 출신 인사들이 모여 1908년 1월에 창립됐다. 본부는 서울에 중앙회를 둔 반면 지방에는 지회를 설치해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1909년 1월 16일 인가된 홍성지회 지회장은 서병태, 부회장은 김시원, 총무는 서승태, 평의원은 김교홍 외 10명이다.

박 연구원은 “일농 서승태는 내포지역을 대표하는 인물군에 속하며 3·1운동에는 직접 참여·지도하는 등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며 “그러나 기초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일농의 삶과 민족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향후 일농과 함께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홍성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필수적 요인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군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1919 그날의 함성’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홍성지역 3·1운동유족회와 보훈단체를 비롯해 각 기관과 사회봉사단체, 문화예술단체 등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또한 만해생가 및 문학체험관에 만해와 3·1운동 100주년을 주제로 교육프로그램, 전시 계획, 기미독립선언 시비제작 등이 예정돼 있다. 이밖에도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 ‘금마·홍동·장곡·광천의 31운동’, ‘호서유림의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등 다양한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연산 서씨,김익겸정려 (連山徐氏,金益兼旌閭)

열녀 연산 서씨(烈女 連山 徐氏)는 참판(參判) 김반(金槃)의 처로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은 김익겸(金益兼)의 어머니이다. 병자호란 때 피난지 강화도에서 적과 싸우다 순국한 아들 김익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1639년(인조 17) 열녀 정려가 내려졌다.

김반과 연산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익겸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손자로 자는 여남(汝南)이다. 21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머니 서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청병(淸兵)이 성을 공격해 오자 남쪽 성루에서 폭약을 터트려 분신 순국하였다. 1816년(순조 16) 유생들의 상소로 정려가 내려졌다.

연산 서씨·김익겸 정려는 충효열 삼강을 윤리적 기준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 시기 역사 문화의 이해에 의미 있는 자료이다.

연산현(連山縣)

본래 백제의 황등야군(黃等也郡)인데, 신라에서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연산군(連山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산(珍山)에 이르기 21리, 서쪽으로 은진(恩津)에 이르기 18리, 남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진잠(鎭岑)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3백 78호요, 인구가 1천 4백 87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9명이요, 진군(鎭軍)이 2명이요, 선군(船軍)이 1백 62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송(宋)·서(徐)·손(孫)·고(高)요, 망성(亡姓)이 2이니, 임(任)·황(黃)이다. 없어진 광소 부곡(廣炤部曲)의 성이 1이니, 임(任)이요, 평천역(平川驛)의 성이 1이니, 황(黃)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고(高)이다. 【아전에 입역(入役)한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3천 8백 36결이요, 【논이 7분의 3이다. 】 토의(土宜)는 오곡·닥나무·왕골이다. 토공은 밀[黃蠟]·칠·호도·지초·대추·모과·잣[松子]·잉어·족제비털[黃毛]·종이·닥[楮]·잡깃[雜羽]이요, 약재(藥材)는 측백나무열매[栢子仁]·산골[自然銅]·인삼이요, 토산은 신감초(辛甘草)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같이 보기

  •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공주목 연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