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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돌아간 후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는 “몸을 다스림이 청렴(淸廉)하고, 행실이 구차스럽지 아니하며, 조심하고 삼갔고, 지론(持論)이 평정(平正)하며, 평생토록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또한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평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곧 일세(一世)의 공변된 말이다.”라고 하였음.
 
공이 돌아간 후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는 “몸을 다스림이 청렴(淸廉)하고, 행실이 구차스럽지 아니하며, 조심하고 삼갔고, 지론(持論)이 평정(平正)하며, 평생토록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또한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평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곧 일세(一世)의 공변된 말이다.”라고 하였음.
  
문집이 간행됨. 족손(族孫) 창재(昌載)가 「進士訥軒徐公行狀」을 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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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이 간행됨. 족손(族孫) [[서창재]](徐昌載)가 「進士訥軒徐公行狀」을 찬함.

2022년 8월 24일 (수) 09:47 판

1663년(현종4)~1735년(영조11).

자 희언(希彦). 호 눌헌(訥軒). 선교랑(宣敎郞) 서후득(徐後得)의 손자이자, 기암(寄菴) 서숙(徐琡)의 아들. 진사시에 입격함.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고 함. 6, 7세에 이미 향학(向學)에 뜻을 독실하게 하여, 비록 다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책상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함. 공은 증광(增廣) 진사시에 입격하고서도, 그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욱 분발하여 공부하였으나, 문과(文科)에서는 불리(不利)하였음.

공은 서법(書法)에 더욱 장기(長技)가 있어, 소년 시절부터 이미 기위(奇偉)한 대자(大字) 글씨를 썼고, 특히 초서는 당대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니,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공의 글씨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듯이 하였다고 함.

그러나 공은 이러한 재주로 이름을 이루고자 하지 않고, 침식을 잊어가며 역학(易學)에 잠심하였음. 또 이수(理數) 공부에 있어 스스로 터득한 바를 기록하여 「학리도설(學理圖說)」이라 명명하였음.(이에 대해서는 김도화(金道和)의 「학리도설서(學理圖說序)」를 참조할 것.) 만년에는 고금(古今) 제현(諸賢)들이 사례(四禮)에 대해 논한 것을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 「의례논변(疑禮論辨)」이라 하였음.

만년에 공은 정침(正寢) 동쪽에 작은 서재를 지어 ‘눌헌(訥軒)’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이는 선산(先山)이 눌곡(訥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선대에 대한 추모의 정을 깃들이기 위함이었음. 또 집 옆에 있던 긴 둑에 송죽(松竹)을 죽 심어놓고, 다시 그 위에 대(臺)를 만들어 ‘세한대(歲寒臺)’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가한 날 산책하면서 시를 읊었음. 늘 좌우의 곁에 성현(聖賢)의 잠계(箴戒)를 비치하였고, 손수 “친척돈목(親族敦睦), 형제담락(兄弟湛樂)” 등의 말을 써서 벽 위에 걸어놓고 늘 보면서 행실을 닦는 준칙으로 삼았다고 함.

후진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힘을 써서 공의 문하에서 재주에 따라 성취한 자들이 많았는데, 공은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설강(設講)하곤 하였음. 공은 위의(威儀)가 특출하였기 때문에, 수령인 신필하(申弼夏)가 그러한 공을 보고 향약(鄕約)을 시행할 때에 공을 도약정(都約正)으로 삼기도 하였음. 이때 그 자리에 있던 서울 사람이 공의 행동거지와 논의를 보고 “내가 서울의 위인(偉人)들이 많음을 보았지만, 일찍이 이러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고 함.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기 위해 순흥에 의병진이 결성됨에, 공은 황수익(黃壽益) 등과 더불어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임명되었음.

공이 돌아간 후 북벽(北壁) 김홍제(金弘濟)는 “몸을 다스림이 청렴(淸廉)하고, 행실이 구차스럽지 아니하며, 조심하고 삼갔고, 지론(持論)이 평정(平正)하며, 평생토록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나 또한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평은, 나의 말이 아니라 곧 일세(一世)의 공변된 말이다.”라고 하였음.

문집이 간행됨. 족손(族孫) 서창재(徐昌載)가 「進士訥軒徐公行狀」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