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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1844년(헌종10)~1907년(융희1). 자 형백(衡伯). 호 봉남(鳳南). 응렬(應烈)의 아들. 심락재(尋樂齋) 간승(榦昇)의 손자.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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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헌종10)~1907년(융희1).
 
1844년(헌종10)~1907년(융희1).
  
자 형백(衡伯). 호 봉남(鳳南). 응렬(應烈)의 아들. 심락재(尋樂齋) 간승(榦昇)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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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형백(衡伯). 호 봉남(鳳南). [[서응렬]](徐應烈)의 아들. 심락재(尋樂齋) 간승(榦昇)의 손자.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독실하였으며, 슬기와 재주가 있었고 총민하였음. 공은 어린 나이로 어머니 상을 당함에, 변벽(拚擗 : 상을 당해 가슴을 치며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다고 함. 공의 조부인 심락재가 공이 일찍 어머니를 잃은 것을 가련하게 여겨, 공을 가르침에 심하게 독려하지 않았으나, 공은 스스로 학업에 소홀하지 않았음.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독실하였으며, 슬기와 재주가 있었고 총민하였음. 공은 어린 나이로 어머니 상을 당함에, 변벽(拚擗 : 상을 당해 가슴을 치며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다고 함. 공의 조부인 심락재가 공이 일찍 어머니를 잃은 것을 가련하게 여겨, 공을 가르침에 심하게 독려하지 않았으나, 공은 스스로 학업에 소홀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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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철종11)에 진성이씨(眞城李氏)와의 혼사가 이루어져서 원대(遠坮)로 장가를 들었는데, 공은 이때 이만정(李晩正)・이만도(李晩燾)・이만인(李晩寅) 등과 망년지교를 맺음.
 
1860년(철종11)에 진성이씨(眞城李氏)와의 혼사가 이루어져서 원대(遠坮)로 장가를 들었는데, 공은 이때 이만정(李晩正)・이만도(李晩燾)・이만인(李晩寅) 등과 망년지교를 맺음.
  
공은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극진히 하고 예법에 맞게 집례하였으며, 임오군란 등으로 세상일이 날로 어긋나는 것을 보고는 과거를 그만두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에 힘을 썼음. 공은 특히 위선(爲先) 사업에 진력하여, 누대 위토(位土)를 잘 보전하고 송추(松楸)를 작벌하지 않았으며, 1896년(건양1)에는 서성구(徐聖耈)의 ������눌헌집(訥軒集)������을 간행하는 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뵙고 책의 편질(篇帙)을 정리하는 문제를 상의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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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극진히 하고 예법에 맞게 집례하였으며, 임오군란 등으로 세상일이 날로 어긋나는 것을 보고는 과거를 그만두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에 힘을 썼음. 공은 특히 위선(爲先) 사업에 진력하여, 누대 위토(位土)를 잘 보전하고 송추(松楸)를 작벌하지 않았으며, 1896년(건양1)에는 [[서성구]](徐聖耈)의 ������눌헌집(訥軒集)������을 간행하는 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뵙고 책의 편질(篇帙)을 정리하는 문제를 상의하였음.
  
 
공은 같은 해 가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가 특전(特典)을 베풀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순종(純宗) 가례 후에는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음. 그러나 공은 임종할 때에 자손들에게 당부하기를 명정(銘旌)에 자신의 직함을 참봉(參奉)으로 적으라고 하였음.
 
공은 같은 해 가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가 특전(特典)을 베풀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순종(純宗) 가례 후에는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음. 그러나 공은 임종할 때에 자손들에게 당부하기를 명정(銘旌)에 자신의 직함을 참봉(參奉)으로 적으라고 하였음.

2022년 8월 24일 (수) 02:26 판

1844년(헌종10)~1907년(융희1).

자 형백(衡伯). 호 봉남(鳳南). 서응렬(徐應烈)의 아들. 심락재(尋樂齋) 간승(榦昇)의 손자.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독실하였으며, 슬기와 재주가 있었고 총민하였음. 공은 어린 나이로 어머니 상을 당함에, 변벽(拚擗 : 상을 당해 가슴을 치며 극도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다고 함. 공의 조부인 심락재가 공이 일찍 어머니를 잃은 것을 가련하게 여겨, 공을 가르침에 심하게 독려하지 않았으나, 공은 스스로 학업에 소홀하지 않았음.

1860년(철종11)에 진성이씨(眞城李氏)와의 혼사가 이루어져서 원대(遠坮)로 장가를 들었는데, 공은 이때 이만정(李晩正)・이만도(李晩燾)・이만인(李晩寅) 등과 망년지교를 맺음.

공은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극진히 하고 예법에 맞게 집례하였으며, 임오군란 등으로 세상일이 날로 어긋나는 것을 보고는 과거를 그만두고 후진을 교육하는 데에 힘을 썼음. 공은 특히 위선(爲先) 사업에 진력하여, 누대 위토(位土)를 잘 보전하고 송추(松楸)를 작벌하지 않았으며, 1896년(건양1)에는 서성구(徐聖耈)의 ������눌헌집(訥軒集)������을 간행하는 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뵙고 책의 편질(篇帙)을 정리하는 문제를 상의하였음.

공은 같은 해 가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가 특전(特典)을 베풀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순종(純宗) 가례 후에는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음. 그러나 공은 임종할 때에 자손들에게 당부하기를 명정(銘旌)에 자신의 직함을 참봉(參奉)으로 적으라고 하였음.

공은 ������명현록(名賢錄)������, ������염락풍아(濂洛風雅)������, ������팔대가(八代家)������ 등을 수집하여 손 가는 대로 정밀히 베껴, 문중 자제들에게 나누어주며 공부하게 하였음.

희암(希庵) 신태일(申泰一)이 「鳳南徐公墓碣銘」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