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1774년(영조50)~1833년(순조33). 자 유상(幼祥). 호 남애(南厓). 복윤(福胤)의 아들. 생부는 연사(烟沙) 종윤(宗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8번째 줄: 8번째 줄:
  
 
과거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에서는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 불리(不利)하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1814년(순조14)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움. 공은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과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으며,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송서(松西) 강운(姜橒), 석남(石南) 권보(權補)와 절친한 교분을 맺었음. 또한 귀천(龜川) 서성렬(徐成烈)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서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창수(唱酬)하는 즐거움을 나누었음.
 
과거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에서는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 불리(不利)하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1814년(순조14)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움. 공은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과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으며,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송서(松西) 강운(姜橒), 석남(石南) 권보(權補)와 절친한 교분을 맺었음. 또한 귀천(龜川) 서성렬(徐成烈)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서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창수(唱酬)하는 즐거움을 나누었음.
 +
 +
일찍이 세 번이나 영월(寧越)에 들어가 단종(端宗)의 고적(古迹)을 유람하면서 감회를 쏟아내기도 하였고, 청량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를 따라 금강산의 경승을 모두 구경하기도 하였음. 공은 후진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송상규(宋相奎)와 더불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강임(講任)을 맡아서, 유생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문예를 고과(考課)하였음.
 +
 +
공이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을 때, 서성렬과 더불어 ������태극도(太極圖)������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공에게 한 말씀하시기를 청하자 “천명(天命)에 순응할 따름이다!”라고 하였고, 어린 손자를 보고는 “불의(不義)를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음. 일찍이 강운이 공에 대해 “오당(吾黨)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나, 늙어서 끝내 죽고 말았구나!”라고 아쉬워하였다고 함.
 +
 +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이 「挽徐幼祥榦發」에 이르기를
 +
 +
 +
鶴下于皐物外翔 학이 언덕으로 내려와 물외에 노니니 登西樓畔月如霜 등서루(登西樓) 가 뜬 달이 서리와 같구나. 梧翁詩禮承衣鉢 오옹(梧翁 : 서창재)이 가르친 가학은 공이 의발을 이었고 楓嶽烟霞裹笈箱 풍악(楓嶽)의 아름다운 경치는 책 상자에 담겨 있네.
 +
 +
 +
라고 하였음.
 +
 +
������봉해첩(逢海帖)������ 및 유고가 있음.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南厓徐公墓碣銘」을 찬함.

2022년 8월 24일 (수) 01:39 판

1774년(영조50)~1833년(순조33).

자 유상(幼祥). 호 남애(南厓). 복윤(福胤)의 아들. 생부는 연사(烟沙) 종윤(宗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인혜(仁惠)하고 총명함이 비범하였다고 함. 또한 평소 정아(靜雅)하면서도, 호기(豪氣)가 있었음. 4세 때에 생부를 잃게 되자, 오산(梧山) 창재(昌載)가 공을 거두어 길렀음.

약관 무렵에 양양(襄陽 : 예천의 옛 이름을 가리키는 듯함.)의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공부하면서,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의 유교(遺敎)를 들었으며,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 가은(稼隱) 성언근(成彦根)을 찾아뵙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많았음.

과거 공부를 하여 향시(鄕試)에서는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 불리(不利)하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1814년(순조14)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움. 공은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과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었으며,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송서(松西) 강운(姜橒), 석남(石南) 권보(權補)와 절친한 교분을 맺었음. 또한 귀천(龜川) 서성렬(徐成烈)과는 한 집안 사람으로서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창수(唱酬)하는 즐거움을 나누었음.

일찍이 세 번이나 영월(寧越)에 들어가 단종(端宗)의 고적(古迹)을 유람하면서 감회를 쏟아내기도 하였고, 청량산으로부터 동쪽으로 바다를 따라 금강산의 경승을 모두 구경하기도 하였음. 공은 후진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송상규(宋相奎)와 더불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강임(講任)을 맡아서, 유생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문예를 고과(考課)하였음.

공이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을 때, 서성렬과 더불어 ������태극도(太極圖)������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공에게 한 말씀하시기를 청하자 “천명(天命)에 순응할 따름이다!”라고 하였고, 어린 손자를 보고는 “불의(不義)를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음. 일찍이 강운이 공에 대해 “오당(吾黨)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나, 늙어서 끝내 죽고 말았구나!”라고 아쉬워하였다고 함.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이 「挽徐幼祥榦發」에 이르기를


鶴下于皐物外翔 학이 언덕으로 내려와 물외에 노니니 登西樓畔月如霜 등서루(登西樓) 가 뜬 달이 서리와 같구나. 梧翁詩禮承衣鉢 오옹(梧翁 : 서창재)이 가르친 가학은 공이 의발을 이었고 楓嶽烟霞裹笈箱 풍악(楓嶽)의 아름다운 경치는 책 상자에 담겨 있네.


라고 하였음.

������봉해첩(逢海帖)������ 및 유고가 있음.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가 「南厓徐公墓碣銘」을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