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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묘표徐貞壽墓表
 
서정수 묘표徐貞壽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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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조선 후기 서정수의 묘표. [개설] 서정수 묘표는 논산시 가야곡면의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중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다. 비명은 서정수가 찬(撰)하고 서(書)하였다. [위치]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난 육곡교를 건넌 후 북쪽으로 향하는 지방도 643호선을 타고 다시 약 1.6㎞ 정도를 가면 군계보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800m 정도 가면 두월리 호남고속도로 옆 구릉 동남향 사면에 부여서씨들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 안에서 서열 묘소에서 동쪽으로 50m가량 떨어진 서정수의 묘소 앞에 있다. [금석문] 묘표는 대리석의 원두 비신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120㎝, 폭 61㎝, 두께 27㎝로 되어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祔右)’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의 성과 이름을 시작으로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이곳에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돈을 모아 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황] 서정수 묘표는 부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각자가 많이 마모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정수는 부여서씨의 논산 입향조이다. 그의 묘표를 통해 부여서씨들이 논산에 터를 잡고 세거성씨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8월 22일 (월) 17:48 판

서정수(徐貞壽)


술 한 잔으로 맺은 인연, 서정수(徐貞壽)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의 부여현 성씨조에는 서씨가 부여의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시대 효자 서공(徐恭)의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 서씨는 고려시대에 부여현의 유력한 성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부여서씨가 육곡리에서는 언제부터 살았던 것일까. 후손들은 백제가 멸망할 때부터 육곡리 일대에 은거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그들의 구체적인 행적이 보이는 시기는 조선 초기 무렵이다. 처음 논산시 가야곡면 일대로 입향하였다고 전해지는 인물은 조선의 7대왕인 세조 시기 문관을 지냈던 서정수(徐貞壽)이다. 그가 가야곡면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그의 묘비명에 자세히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서정수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내던 민효열(여흥민씨)의 딸과 혼인하여 과거 급제 후 예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때는 마침 나라의 곳곳이 어려워 임금이 친히 금주령까지 내리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세조가 자신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온양 온천에 오게 되고 서정수의 장인 민효열이 이 행차를 따라나섰다. 당시 민효열은 나이가 많은데다 몸이 노쇠하여 임금의 행차를 따라 보필하기가 무척 어려운 때였다. 가까스로 약간의 술에 의지하며 억지로 길을 재촉했는데 왕이 직접 명령한 금주령 때문에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서정수는 장인의 어려운 처지를 못 본 척 할 수 없어 급기야 어두운 밤 몰래 술 한 그릇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그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관직마저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갖은 고초를 겪은 서정수는 결국 유배를 가게 되고 유배지가 지금의 논산시 은진면과 가야곡면 일대였던 은진 땅이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사연으로 맺은 인연이었지만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웠던 이곳에 자신의 터전을 마련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안장하였다. 또한 자신도 같은 하강마을에 묘를 안장하므로써 본격적으로 부여서씨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부여 서씨(扶餘徐氏)

부여융(서융)을 시조로 하고 서정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이후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낸 태원군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예산현감으로 있던 서정수(徐貞壽)가 논산의 은진 지역으로 유배 왔다가 가야곡면 두월리 강청마을에 부친 서열(徐悅)의 묘를 안장하고 살았다. 그 후 자손들이 은진현에 세거하였는데, 은진의 토착 성씨였던 남양홍씨나 장수황씨, 진주강씨 등과 인척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입향 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서인(徐益, 1542~1587)이다. 그는 송강 정철,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 저명한 기호 유현들과 깊은 교분이 있었다. 은진현에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 그루를 심고 만죽정(萬竹亭, 세심정이라고도 함)을 지어 스스로 호를 만죽헌이라 하였다.


2008년 기준으로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30여 호가 살고 있다. 부여서씨의 관련유적으로는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서정수 묘표가 있다. 묘표는 높이 120㎝, 너비 61㎝, 두께 27㎝로, 서역조가 글을 짓고 썼다. 또 가야곡면 삼전리에 서익의 묘소와 묘갈이 있다. 묘비는 복련형 이수를 올린 형태로, 비문은 이재가 짓고 5대손 서정덕이 써서 1672년(헌종 13)에 건립하였다. 가야곡면 산노리에 서익을 비롯하여 양응춘, 김문기, 김성휘 등을 모셨던 효암서원이 있다. 1867년(고종 4) 서익이 퇴위되어 6위만 모셨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폐철되었고, 192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는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 만죽헌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서익은 산노리의 갈산사에 배향되었다가 행림서원으로 분향되었다.

서정수 묘표徐貞壽墓表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조선 후기 서정수의 묘표. [개설] 서정수 묘표는 논산시 가야곡면의 세거성씨인 부여서씨 중 가야곡면에 처음 입향한 입향조 서정수(徐貞壽)의 묘 앞에 세운 묘표로서, 1694년(숙종 20)에 후손인 서경조(徐敬祖)가 세웠다. 비명은 서정수가 찬(撰)하고 서(書)하였다. [위치] 가야곡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02호선을 따라 동쪽으로 난 육곡교를 건넌 후 북쪽으로 향하는 지방도 643호선을 타고 다시 약 1.6㎞ 정도를 가면 군계보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800m 정도 가면 두월리 호남고속도로 옆 구릉 동남향 사면에 부여서씨들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 안에서 서열 묘소에서 동쪽으로 50m가량 떨어진 서정수의 묘소 앞에 있다. [금석문] 묘표는 대리석의 원두 비신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120㎝, 폭 61㎝, 두께 27㎝로 되어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조봉대부예산현감서정수지묘영인여주민씨부우(朝奉大夫禮山縣監徐貞壽之墓令人麗州閔氏祔右)’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서정수의 성과 이름을 시작으로 논산에 묘를 쓴 이유와 자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서정수가 예산현감으로 부임하였던 당시 이곳에 왕의 행차가 있었는데, 금주령이 내렸음에도 몸이 좋지 않아 술에 의지하던 장인을 돕기 위해 술 한 그릇을 올렸다가 은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배를 당한 서정수는 고향인 부여와 가까운 논산에 부모의 묘를 모시고 자신도 묻히게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비, 바람에 풍화되어 글자들이 닳고 보이지 않아 후손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돈을 모아 서열 묘표와 함께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황] 서정수 묘표는 부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각자가 많이 마모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정수는 부여서씨의 논산 입향조이다. 그의 묘표를 통해 부여서씨들이 논산에 터를 잡고 세거성씨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