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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의식(徐毅植, 1956년 ~ )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서의식(徐毅植, 1956년 ~ )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서희석(徐熙錫, 1968년 ~ )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서희석(徐熙錫, 1968년 ~ )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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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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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창가곡 계면조 평거에 <녹초 청강상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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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초 청강 상에 굴레 벗은 말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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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머리 들어 북향하여 우는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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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재 넘어가매 임자 그려 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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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과 푸른 강에 굴레를 벗은 말이 되었다는 것은 벼슬에서 물러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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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가끔은 머리를 들어 임금이 살고 계신 곳을 향하여 소리 내어 우는 까닭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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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조를 연주가(戀主歌) 혹은 연군가(戀君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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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를 지은 사람은 서익(徐益:1542-1587)이라는 사람이다. 선조 때 병조·이조 좌랑, 안동부사·의주 목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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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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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을 지지하다가 의주 목사직을 물러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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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서익의 서자로 서양갑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서양갑은 광해군 때 같은 서자 출신 친구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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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도 관계에 진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상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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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일종의 모임을 만들어 소양강가에서 같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인생을 한탄하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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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술 마시며 놀면 천하 갑부가 아닌 이상 돈이 떨러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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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 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거액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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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곧 포도청에 모두 잡히고 만다. 이 해가 계축년(1613년)으로 광해군 5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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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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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소북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죽였다. 대북파가 남은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던 차에 바로 이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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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파인 이이첨 일파는 이들 도적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돈을 모아 군자금을 확보해서 영창대군의 모반에 사용하려고 했다, 이렇게 조작을 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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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창대군의 어머니는 인목대비다. 인목대비의 아버지가 김제남이다. 이 모든 것이 김제남이 시켜서 한 일이다, 이렇게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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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가 꾸민 일이다, 이렇게 되어 큰 사단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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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계축옥사이다. 서양갑의 친구인 박응서가 거짓 자백을 했고, 서양갑도 위협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다. 그리고 서양갑은 바로 사형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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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조작극으로 인해 김제남도 죽고 영창대군도 강화로 유배되었다.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부사가 바로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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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부사는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가두어 두고 장작을 많이 때서 분사(焚死)시켰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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쪄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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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갑 등 7인은 당시의 제도에 불만을 품고 악행을 일삼다가 이이첨 일파의 꼬임에 빠져, 자신도 죽고 죄없는 사람까지 죽게 만든 역사의 죄인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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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도 인조반정 이후 사형당하고 만다. 계축옥사는 당시의 서얼 문제와 함께 당쟁의 폐해를 직접 보여 준 사건이다. 서익은 그런 충성스러운 노래를 불렀건만, 그의 아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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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나 법이 잘못되었다고 그것을 핑계 삼아 범죄를 행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용서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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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과 같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혹세무민하는 행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 집성촌 ==
 
== 집성촌 ==

2022년 8월 22일 (월) 07:33 판

성씨 = 부여 서씨(扶餘 徐氏)

관향 = 충청남도 부여군

시조 = 부여융(扶餘隆)

중시조 = 서존(徐存)

집성촌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평안남도 개천군

년도 = 2015

인물 = 서익, 서필원, 서성 , 서승진, 서민석

인구 = 17,145명

순위 =

비고 = 백제의 왕족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역사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아들: 서첨(徐詹 예빈사(禮賓寺) 소윤(少尹)
              • 동생: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
              • 동생: 서적(徐迪남양군)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서씨일가연합회 [[1]] [[2]]

인물

  • 서익(徐益, 1542 ~ 1587년) : 본관은 부여(扶餘). 자 군수(君受), 호 만죽(萬竹), 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徐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1등 5인중에 2위으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 병조·이조좌랑, 병조정랑, 교리,수찬,군기경차관, 종부시첨정, 함경북도 순문관,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고창현감, 안동부사, 평양서윤, 서천군수·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삼당시인, 팔문장, 정철과 더불어 이십팔숙회라 칭하여졌고,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으며, 1585년 5월 의주목사 재직시 박순, 정철, 이이 등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내렸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사(葛山사)에 배향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우암 송시열이 현 가야곡면 산노리에 효암서원에 배향되었다가 다시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사에 모셔져 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유품으로 장검1점, 옥피리 1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시조2수는 청구영언, 국조시산, 기아 등 실려있으며 야담 및 일화 다수가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 서양갑(徐羊甲 혁명가.홍길동 모델)

서자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으나 서얼차대(庶孼差待)로 관리에 등용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겨오던 중, 같은 서출인 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김평손(金平孫)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강변칠우·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교유하였다.

  • 서필원(徐必遠, 1614년 ~ 1671) : 164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 서성 (법조인)(徐晟, 1942년 ~ ) : 대법원 대법관
  • 서한범(徐漢範, 1945년 ~ ) :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 서승직(徐承稷, 1949년 ~ ) : 인하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 서승진(徐承鎭, 1953년 ~ ) : 대한민국 제24대 산림청장
  • 서의식(徐毅植, 1956년 ~ )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서희석(徐熙錫, 1968년 ~ )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양갑

여창가곡 계면조 평거에 <녹초 청강상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녹초 청강 상에 굴레 벗은 말이 되어

때때로 머리 들어 북향하여 우는 뜻은


석양이 재 넘어가매 임자 그려 우노라

푸른 들판과 푸른 강에 굴레를 벗은 말이 되었다는 것은 벼슬에서 물러났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머리를 들어 임금이 살고 계신 곳을 향하여 소리 내어 우는 까닭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조를 연주가(戀主歌) 혹은 연군가(戀君歌)라고 한다.

이 시조를 지은 사람은 서익(徐益:1542-1587)이라는 사람이다. 선조 때 병조·이조 좌랑, 안동부사·의주 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율곡을 지지하다가 의주 목사직을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서익의 서자로 서양갑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서양갑은 광해군 때 같은 서자 출신 친구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서자도 관계에 진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상소다.

이것이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일종의 모임을 만들어 소양강가에서 같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인생을 한탄하면서 살았다.

맨날 술 마시며 놀면 천하 갑부가 아닌 이상 돈이 떨러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 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거액을 훔쳤다.

이들은 곧 포도청에 모두 잡히고 만다. 이 해가 계축년(1613년)으로 광해군 5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 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소북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죽였다. 대북파가 남은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던 차에 바로 이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대북파인 이이첨 일파는 이들 도적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돈을 모아 군자금을 확보해서 영창대군의 모반에 사용하려고 했다, 이렇게 조작을 하려고 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는 인목대비다. 인목대비의 아버지가 김제남이다. 이 모든 것이 김제남이 시켜서 한 일이다, 이렇게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

즉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가 꾸민 일이다, 이렇게 되어 큰 사단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계축옥사이다. 서양갑의 친구인 박응서가 거짓 자백을 했고, 서양갑도 위협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다. 그리고 서양갑은 바로 사형을 당한다.

결국 이 조작극으로 인해 김제남도 죽고 영창대군도 강화로 유배되었다.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부사가 바로 죽여버렸다.

강화부사는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가두어 두고 장작을 많이 때서 분사(焚死)시켰다고 전한다.

쪄죽인 셈이다.

서양갑 등 7인은 당시의 제도에 불만을 품고 악행을 일삼다가 이이첨 일파의 꼬임에 빠져, 자신도 죽고 죄없는 사람까지 죽게 만든 역사의 죄인으로 남았다.

이이첨도 인조반정 이후 사형당하고 만다. 계축옥사는 당시의 서얼 문제와 함께 당쟁의 폐해를 직접 보여 준 사건이다. 서익은 그런 충성스러운 노래를 불렀건만, 그의 아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다.

제도나 법이 잘못되었다고 그것을 핑계 삼아 범죄를 행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용서받을 수 없다.

이이첨과 같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혹세무민하는 행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부여서씨 재실(夫餘徐氏 齋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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