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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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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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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덕이(德以), 호는 남계(南溪), 이명은 서질. 고려 성종 때 거란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강동 6주를 회복하는 데 기여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의 11세손이다. 원주판관을 역임한 [[서강(조선)|서강]](徐强)과 양천 허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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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즐]](徐騭)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에서 태어나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로 이거해 정착하였다. 생몰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스승인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가 1371년(공민왕 20) 생이고 서즐의 행적이 기록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1434년(세종 16) 편찬된 점 등을 감안할 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즐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해 고향인 지례현으로 낙향한 반곡 장지도의 제자가 되어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와 함께 아들이 없는 스승을 극진히 공양하고 스승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를 한 행적이 『삼강행실도』에 등재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세종 10)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이 지은 교훈서이다.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씩 가려 뽑아 모두 105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당대의 이름난 화가인 안견(安堅)과 최경(崔涇)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1436년(세종 18) 편찬하였다. 특히 효행을 기록한 35편 중 31편이 중국의 사례이고 4편만이 우리나라의 이야기인데, 이 가운데 ‘은보감오(殷保感烏)’, 즉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라는 제목으로 서즐과 윤은보의 행적이 수록되면서 지례 고을이 명실 공히 예향(禮鄕)으로서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삼강행실도』에 “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이 장지도에게 배웠는데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을 하나같이 섬기기로 결의하고 성심껏 모셨고,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시묘를 하였다. 시묘 도중에 윤은보가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을 지키다가 회오리바람에 날아간 향로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스승을 어버이와 같이 섬기고 예를 다한 윤은보와 서즐에게 1432년(세종 14) 정려문과 벼슬을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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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김천시 대덕면 중산2리 다화마을 뒷산인 매봉재 자락에 있다. 묘지는 예부터 명당으로 이름이 났는데, 뒷산인 매봉재를 주산(主山)으로 하여 부시밭골산을 청룡(靑龍)으로 삼고 큰 골짜기에서 뻗어 내린 숫돌봉을 백호(白虎)로 삼았다. 백호가 숫돌봉에서 멎었다면 다소 아쉬웠을 법도 하였건만 감천(甘川) 앞으로까지 이어지더니 마침내 음지말 앞산을 안산(案山)으로 택하였다. 마을 앞을 우에서 좌로 빗겨 흐르는 대덕천이 임수(臨水)의 기능을 넉넉히 하고 있어 풍수의 기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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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지례면 교리의 마을 어귀에 장지도, 윤은보, 서즐 세 사람을 기리는 양효위사 윤은보 서즐 정려각(兩孝爲師 尹殷保 徐騭 旌閭閣)과 삼선생 유허비(三先生遺墟碑)가 나란히 서 있고,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동별묘에 배향되었다

2022년 8월 19일 (금) 20:42 판

조선 효자 서즐(徐騭)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덕이(德以), 호는 남계(南溪), 이명은 서질. 고려 성종 때 거란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강동 6주를 회복하는 데 기여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의 11세손이다. 원주판관을 역임한 서강(徐强)과 양천 허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즐(徐騭)은 지금의 김천시 지례면 거물리에서 태어나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로 이거해 정착하였다. 생몰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스승인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가 1371년(공민왕 20) 생이고 서즐의 행적이 기록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1434년(세종 16) 편찬된 점 등을 감안할 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생존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즐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해 고향인 지례현으로 낙향한 반곡 장지도의 제자가 되어 절효(節孝) 윤은보(尹殷保)와 함께 아들이 없는 스승을 극진히 공양하고 스승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를 한 행적이 『삼강행실도』에 등재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강행실도』는 1428년(세종 10)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이 지은 교훈서이다.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효자·열녀를 각각 35명씩 가려 뽑아 모두 105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당대의 이름난 화가인 안견(安堅)과 최경(崔涇)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1436년(세종 18) 편찬하였다. 특히 효행을 기록한 35편 중 31편이 중국의 사례이고 4편만이 우리나라의 이야기인데, 이 가운데 ‘은보감오(殷保感烏)’, 즉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라는 제목으로 서즐과 윤은보의 행적이 수록되면서 지례 고을이 명실 공히 예향(禮鄕)으로서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삼강행실도』에 “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이 장지도에게 배웠는데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을 하나같이 섬기기로 결의하고 성심껏 모셨고,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시묘를 하였다. 시묘 도중에 윤은보가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을 지키다가 회오리바람에 날아간 향로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스승을 어버이와 같이 섬기고 예를 다한 윤은보와 서즐에게 1432년(세종 14) 정려문과 벼슬을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김천시 대덕면 중산2리 다화마을 뒷산인 매봉재 자락에 있다. 묘지는 예부터 명당으로 이름이 났는데, 뒷산인 매봉재를 주산(主山)으로 하여 부시밭골산을 청룡(靑龍)으로 삼고 큰 골짜기에서 뻗어 내린 숫돌봉을 백호(白虎)로 삼았다. 백호가 숫돌봉에서 멎었다면 다소 아쉬웠을 법도 하였건만 감천(甘川) 앞으로까지 이어지더니 마침내 음지말 앞산을 안산(案山)으로 택하였다. 마을 앞을 우에서 좌로 빗겨 흐르는 대덕천이 임수(臨水)의 기능을 넉넉히 하고 있어 풍수의 기본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김천시 지례면 교리의 마을 어귀에 장지도, 윤은보, 서즐 세 사람을 기리는 양효위사 윤은보 서즐 정려각(兩孝爲師 尹殷保 徐騭 旌閭閣)과 삼선생 유허비(三先生遺墟碑)가 나란히 서 있고,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동별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