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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덕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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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후손들은 그 이후에도 잔인했다. 비명에 죽은 단종이 복원되는 데에는 240년도 더 걸렸다.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산군(魯山君) 대신 단종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당연히 서섭이 남긴 책과 글들도 금서(禁書)가 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쉬쉬' 하며 숨기기에 바빴다.
 
세조의 후손들은 그 이후에도 잔인했다. 비명에 죽은 단종이 복원되는 데에는 240년도 더 걸렸다.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산군(魯山君) 대신 단종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당연히 서섭이 남긴 책과 글들도 금서(禁書)가 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쉬쉬' 하며 숨기기에 바빴다.
  
그 후 1920년, 후손 서의곤이 집을 수리하던 중 서섭이 남긴 문장들이 상자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무려 400년만에 [[서섭]]의 행적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난 찰나였다.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 서섭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재실 첨모당을 건축했고, 첨모당은 1994년에 이르러 덕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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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20년, 후손 서의곤이 집을 수리하던 중 서섭이 남긴 문장들이 상자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무려 400년만에 [[서섭(조선)|서섭]]의 행적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난 찰나였다.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 서섭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재실 첨모당을 건축했고, 첨모당은 1994년에 이르러 덕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덕산서원 강학 공간에는 4칸 강당인 충정당, 각각 3칸 건물인 동재 구인재와 서재 존성재가 있다. 강당 뜰 남쪽에 서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과 구인제 사이 삼각지에는 [[서섭(조선)|서섭]] 선생 신도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덕산서원 강학 공간에는 4칸 강당인 충정당, 각각 3칸 건물인 동재 구인재와 서재 존성재가 있다. 강당 뜰 남쪽에 서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과 구인제 사이 삼각지에는 [[서섭(조선)|서섭]] 선생 신도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제향 공간인 사당 경의사는 강당 뒤에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을 보여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유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서원 정문인 외삼문의 현판에는 숭절문(崇節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외삼문 현판에 '절개 절(節)'이 들어 있는 것은 [[서섭(조선)|서섭]]의 호 중 한 글자가 '숨을 은(隱)'인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제향 공간인 사당 경의사는 강당 뒤에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을 보여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유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서원 정문인 외삼문의 현판에는 숭절문(崇節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외삼문 현판에 '절개 절(節)'이 들어 있는 것은 [[서섭(조선)|서섭]]의 호 중 한 글자가 '숨을 은(隱)'인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022년 8월 15일 (월) 15:42 판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유학자. 호는 남은(南隱)이다. 본관은 달성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대구(大邱) 금호읍(琴湖邑)이다.

부친 승사랑(承仕郞) 광흥창부승(廣興倉副承) 서문한(徐文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조 때 등과한 후, 문종조‧단종조에 벼슬을 지냈고, 관직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로 귀양보내자, 간신들을 물리치고 집현전 학자들을 등용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월사변(寧越事變) 때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이라는 시를 남기고 낙향한 후,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유림들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중양재(中陽齋)‧분양서원(汾陽書院)을 건립하고 향사를 지냈다. 또한 첨모재(瞻慕齋)와 신도비를 건립하여 그의 유지를 기렸다.

저서로 『남은선생집(南隱先生集)』 2권 1책이 있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증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형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형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조카: 서지원(徐智元 학자)
                              • 손조카: 서윤(徐尹 참봉(參奉))
                              • 손조카: 서괄(徐适 훈도(訓導))
                              • 손조카: 서세(徐洗찰방(察訪))
                              • 손조카: 서부(徐浮 목사(牧使))
                            • 조카: 서인원(徐仁元 목사)
                            • 조카: 서용원(徐勇元 생원)
                            • 조카: 서숙원(徐叔元 생원)
                          • 본인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작은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사촌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작은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작은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
                      • 작은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
                    • 작은증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작은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덕산서원

덕산서원(德山書院)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256번지에 있다. 대구 시민들은 도로명 주소 '청호로 46길 5-3 덕산서원'으로는 잘 가늠하기 어렵지만, '황금동 256 덕산서원'이라면 신천지아파트 입구 일대라는 것을 대략 떠올린다. 조선 시대의 교육기관인 서원은 보통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황금동 신천지아파트 입구는 예전처럼 산 좋고 물 좋은 청정 지역은 못 된다. 오늘날의 덕천서원 자리는 산 속이 아니라 신흥 개발지 한복판이 되고 말았다. 물론 덕산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회 지역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이는 황금동의 본래 이름이 증언해준다. 황금동의 본명은 황청동(黃靑洞)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 부민들 일부는 이곳 산골로 피란했는데, 두 달 가량 뒤 의병을 일으키는 손처눌 선생이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들녘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룬다'는 뜻에서 이 일대에 "황청(黃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1977년, 저승의 다른 말인 황천(黃泉)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명을 황금동으로 바꾸어버렸다.

어쨌든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숨고,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덕산서원의 애초 터는 지금과 달리 한적한 자연 속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저 세월이 흐르고 개발과 도시화의 바람에 못 이겨 덕산서원도 결국은 주택가 안에 자리잡은 평범한 기와집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 덕산서원의 현판과 강당 마루가 보이는 풍경

덕산서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켰던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서섭은 달성서씨 판서공파의 파조(派祖)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아득한 뒷날, 서섭의 충절을 알게 된 자손들과 유림에서 1926년 그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에 덕산서원의 모태인 첨모재를 건립했다. 1954년 중수했고, 최근 대대적으로 경역을 확장하고 당우(堂宇)를 신축하여 덕산서원이라 편액하였다.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안내판을 읽으면서 본문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추정을 해본다. 서섭의 호에 은(隱)이 들어 있는 까닭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숨을 은'은 본래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등 이성계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고려 충신들의 호에 즐겨 사용된 글자이다. 그렇다면 서섭은 누구에게 협조를 하지 않다가 피해를 입었을까?

▲ 덕산서원 경내에 세워져 있는 서섭 선생 신도비

본문이 서섭을 '조선 초기의 문신'이라고 밝힌 점에 주목한다. 서석은 이성계 또는 이방원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숨어 살았던 인물인가? 그런데 뒤에 '세종 때 대과에 급제, 문종을 거쳐 단종 때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서섭이 수양대군, 즉 세조의 권력 찬탈에 저항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서섭은 '간신들을 물리치소서'라는 취지의 '척간소(斥姦疏)'를 단종에게 올린다. 그는 '척간소'에서 '선왕(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죽고 난 뒤 경등을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보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곁에서 들은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나이다.' 하고 말한다. 서섭은 이 일로 귀양을 가고, 1453년(단종 2)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聞昔長沙有此人 듣자하니 옛날 장사에 귀양 간 사람이 있다던데 今人我亦被誣人 오늘날 나 또한 남의 모함을 당했네 天必降人同賦性 하늘이 사람에게 같은 성품을 내렸으니 惡何人也善何人 악한 사람 누구이며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귀양을 간 서섭은 위의 시 '재적소시(在謫所時)'를 남겼다. '재적소시'는 '유배지에 머물면서' 정도의 뜻이다. 시의 내용은 대략 하늘은 이 땅에 같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어째서 누군가는 악인이 되고 누군가는 선인이 되는지 알 수 없다는 탄식으로 헤아려진다. 과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남을 죽이고 내치고 구석진 곳에 가두는 것일까? 서섭은 권력을 향한 수양 무리의 잔인함을 개탄했다.

그러나 서섭은 자신의 귀양보다도 더한 슬픔과 고통을 불과 2년 뒤에 겪게 된다. 1455년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을 죽인다. 서섭은 충신들이 6월 9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네 마리 말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은 '문육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擧天奉日死於忠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받들어 충의로 죽으니 萬古吾東第一忠 만고의 우리나라 제일 가는 충신일세 男兒此世生無面 남아로서 이 세상에 살 면목이 없으니 誰識中心有血忠 누가 마음에 피 맺힌 충성 있음을 알리

1457년(세조 3) 10월 결국 단종은 세조의 핍박에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 세조가 보낸 사약(賜藥)을 든 사신이 유배지 영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그 순간, 단종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민간에는 단종의 주검이 청령포(淸?浦)에 떠있는 것을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莊陵) 자리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서섭은 단종의 원통한 마지막 순간을 듣고 통곡했다. 어린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산은 문득 텅 빈 듯했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하늘의 해도 빛을 잃었다. 모든 백성들이 목을 놓아 울부짖으니 집집마다 부모가 별세한 듯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 장차 죽어 저승에서 어린 임금을 어찌 뵐 수 있을까! 서섭은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을 써서 소년 임금의 애통한 원혼을 위로하고, 또 자신의 참담한 심사를 애써 달래었다.

山空木落日無光 산은 비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해도 빛을 잃었는데 痛哭家家考?喪 통곡소리 집집마다 요란하니 부모를 잃은 듯 堪愧微臣生在世 부끄럽구나 못난 신하 살아 이 세상에 있으니 他時地下面何相 뒷날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뵈올 것인가

세조의 후손들은 그 이후에도 잔인했다. 비명에 죽은 단종이 복원되는 데에는 240년도 더 걸렸다.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산군(魯山君) 대신 단종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허용되었다. 당연히 서섭이 남긴 책과 글들도 금서(禁書)가 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쉬쉬' 하며 숨기기에 바빴다.

그 후 1920년, 후손 서의곤이 집을 수리하던 중 서섭이 남긴 문장들이 상자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무려 400년만에 서섭의 행적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난 찰나였다.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 서섭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재실 첨모당을 건축했고, 첨모당은 1994년에 이르러 덕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덕산서원 강학 공간에는 4칸 강당인 충정당, 각각 3칸 건물인 동재 구인재와 서재 존성재가 있다. 강당 뜰 남쪽에 서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과 구인제 사이 삼각지에는 서섭 선생 신도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제향 공간인 사당 경의사는 강당 뒤에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을 보여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유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고 보니 서원 정문인 외삼문의 현판에는 숭절문(崇節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외삼문 현판에 '절개 절(節)'이 들어 있는 것은 서섭의 호 중 한 글자가 '숨을 은(隱)'인 것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