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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경주 분황사|분황사(芬皇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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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경주 분황사|분황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대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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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분황사(芬皇寺)]]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원효대사(元曉大師)]]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970000,37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받침돌에는 [[김정희|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새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라는 글귀가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205&cid=40942&categoryId=3338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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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분황사(芬皇寺)]]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원효대사(元曉大師)]]를 기려 세운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였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970000,37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받침돌에는 [[김정희|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새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라는 글귀가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205&cid=40942&categoryId=3338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1101년([[고려 숙종|숙종]] 6), [[원효|원효(元曉}]]와 [[의상|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고려 숙종|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주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205&cid=40942&categoryId=3338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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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년([[고려 숙종|고려 숙종]] 6), [[원효|원효(元曉)]]와 [[의상|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고려 숙종|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주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96205&cid=40942&categoryId=3338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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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2일 (금) 00:24 기준 최신판

분황사화쟁국사비부
(芬皇寺和諍國師碑趺)
대표명칭 분황사화쟁국사비부
한자표기 芬皇寺和諍國師碑趺
시대 고려시대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지정일 1979년 01월 25일
소장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관련인물 원효(元曉)
관련장소 경주 분황사(慶州 芬皇寺)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대좌이다.

내용

분황사(芬皇寺)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元曉大師)를 기려 세운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였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1] 받침돌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새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라는 글귀가 있다.[2]

1101년(고려 숙종 6), 원효(元曉)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주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3]

Quote-left.png 8월 계사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원효(元曉)와 의상(義相)은 동방의 성인(聖人)으로 비기(碑記)와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깊이 슬퍼하여 원효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靜國師)로, 의상은 대성원교국사(大聖圓敎國師)로 추증하니 유사(有司)에서는 즉시 그들이 살던 곳에 비를 세우고 덕을 기록하여 무궁하게 전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원효와 의상에게 비문과 시호를 추증하다", 고려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김시습(金時習)은 이 비석을 보고 「무쟁비(無諍碑)」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분황사가 소실되면서 파괴된 듯하며, 이후 비석의 대좌만 남게 되었는데 조선 말기에 이곳을 찾은 추사 김정희의 고증으로 이것이 원효의 비석을 세웠던 비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비문 일부가 탁본으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전하며, 1976년 분황사 경내에서 발견된 비편(크기: 16㎝×14㎝)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4]

Quote-left.png 그대는 알아보지 못하는가!

신라의 신이한 승려 첫 아침(元旭)을,

삭발하고 신라의 저자거리에서 도(道)를 행하였네.

입당하여 진리를 공부하려다 돌이켜 고향으로 돌아와

출가와 재가 구분 없이 마을 곳곳을 유행하였네.

거리의 아이와 부인들에까지 뜻을 쉽게 얻으니

누가 누구집 아이인지 다 가리킬 정도였네.

그리고 또한 밀행은 크고 항상됨이 없어서

소타고 법을 연설해 종지를 해석했네.

여러 경의 소초들 책궤에 가득하니

후인들 그를 보고 다투어 따랐네.

국사로 추봉하니 그 이름 다툼없음(無諍)이라.

저 비석에 아로새겨 매우 칭송하였네.

비석 위의 금가루는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법다움 그림과 좋은 찬사 또한 기쁘기 그지없네.

우리 역시 잘 변하는 무리여서

환어에 대하여도 대강은 알았다네.

다만 내 옛 것을 좋아해 뒷짐지고 읽건만

君不見新羅異僧元旭氏 剔髮行道新羅市 入唐學法返桑梓 混同緇白行閭里 街童巷婦得容易 指云誰家誰氏子 然而密行大無常 騎牛演法解宗旨 諸經疏抄盈巾箱

後人見之爭仰企 追封國師名無諍 勤彼貞珉頗稱美 碣上金屑光燐燐 法畫好辭亦可喜 我曹亦是善幻徒 其於幻語商略矣 但我好古負手讀 吁嗟不見西來士

Quote-right.png
출처: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 분황사의 「화쟁국사비」를 보고 시(詩)를 쓰다",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회고, 『문화원형백과』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비문의 찬자

『신증동국여지승람』 분황사조에는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재료는 오금석(烏金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

Quote-left.png 분황사(芬皇寺)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선덕왕 3년에 세웠다.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찬술한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있는데, 오금석(烏金石)이다. Quote-right.png
출처: "경주부(慶州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경상도(慶尙道),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그런데 비석 건립과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최유청묘지명(崔惟淸墓誌銘)」에서는 「화쟁국사비명」을 최유청(崔惟淸)이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6]

Quote-left.png 또 ▨을 받들어 「해동선각국사비(海東先覺國師碑)」, 「분황화쟁국사비(芬皇和諍國師碑)」,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의 세 비명(碑銘)을 지으니 ▨과 뜻이 모두 아름다웠다. Quote-right.png
출처: "최유청묘지명",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식관계망

  • 원효와 의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분황사화쟁국사비부 경주 분황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분황사화쟁국사비부 김정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분황사화쟁국사비부 최유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분황사화쟁국사비부 한문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분황사화쟁국사비부 원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무쟁비 원효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이강근,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강근,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강근, "분황사 화쟁국사 비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경상북도유형문화재97 분황사화쟁국사비편 이미지 전체1 경상북도 미술", 이미지검색,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