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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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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현종12) 5월 10일 [[송시열|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밀양 박씨|손자 며느리 박씨]]에게 써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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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조선 현종 12년) 5월 10일에 [[송시열]]이 [[밀양 박씨|손자 며느리 박씨]]에게 써준 글이다.
  
 
=='''내용'''==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671년(현종12) 5월 10일 [[송시열|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밀양 박씨|손자 며느리 박씨]]에게 써준 글이다. [[송시열]]은 후사가 없던 형의 부부의 신주(神主)<ref>죽은 사람 위(位)를 베푸는 나무 패(牌)</ref>를 자신의 손자 [[송은석|송은석(宋殷錫)]]에게 모시게 하였다. 그리하여 제사 비용을 위한 땅과 노비의 상세 내역을 기록해 [[송은석]]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을 손자 며느리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풀어 써준 것이 바로 이 문서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7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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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후사가 없던 형의 부부의 신주(神主)<ref>죽은 사람 위(位)를 베푸는 나무 패(牌)</ref>를 자신의 손자 [[송은석|송은석(宋殷錫)]]에게 모시게 하였다. 그리하여 제사 비용을 위한 땅과 노비의 상세 내역을 기록해 [[송은석]]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을 [[밀양 박씨|손자 며느리 박씨]]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풀어 써준 것이 바로 이 문서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78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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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형 내외의 죽음===
 
이 편지에서 언급되는 [[송시열]]의 형은 [[송갑조|송갑조(宋甲祚)]]의 맏아들인 [[송시희|송시희(宋時熹)]]이다.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오랑캐 기병(騎兵)이 침범해 들어오자 목숨을 걸고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 [[송시희]]의 아내는 [[충의위|충의위(忠義衛)]] [[김성진|김성진(金聲振)]]의 딸 [[안동 김씨]]인데,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 같은 해에 죽어 합장(合葬)하였다. 후손이 없는 자식에 대한 제사는 종가에서 그 신주를 모시고, 죽은 사람의 4대에 이르는 후손이 없을 때까지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관례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http://jsg.aks.ac.kr/home/event/conferenceView.do?searchCondition=&searchWord=&page=2&idx=37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f>
 
이 편지에서 언급되는 [[송시열]]의 형은 [[송갑조|송갑조(宋甲祚)]]의 맏아들인 [[송시희|송시희(宋時熹)]]이다.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오랑캐 기병(騎兵)이 침범해 들어오자 목숨을 걸고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 [[송시희]]의 아내는 [[충의위|충의위(忠義衛)]] [[김성진|김성진(金聲振)]]의 딸 [[안동 김씨]]인데,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 같은 해에 죽어 합장(合葬)하였다. 후손이 없는 자식에 대한 제사는 종가에서 그 신주를 모시고, 죽은 사람의 4대에 이르는 후손이 없을 때까지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관례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http://jsg.aks.ac.kr/home/event/conferenceView.do?searchCondition=&searchWord=&page=2&idx=37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f>
  
 
===송시열과 그의 아들 및 손자===
 
===송시열과 그의 아들 및 손자===
그러나 송씨 가문의 종손인 [[송흠조|송흠조(宋欽祚)]]서자만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일찍 죽어 제사를 지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송시열]]의 모친인 [[선산 곽씨]]는 [[송시희]] 내외의 제사를 [[송시열]]이 모시도록 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송기태|송기태(宋基泰)]]를 양자로 입양한 상황이었다. [[송기태|송기태(宋基泰)]]의 친부는 [[송시열]]의 숙부인 [[송희조|송희조(宋熙祚)]]의 양자 [[송시영|송시영(宋時瑩)]]-송시열과 사촌지간-이었는데, 친형제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귀해 사촌형제의 자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송기태]]의 아들은 [[송은석|송은석(宋殷錫)]]인데, [[송은석]]의 아내 즉, [[송시열]]의 손자 며느리는 [[밀양 박씨]]이며, 그 아버지는 [[박승건|박승건(朴承健)]]이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http://jsg.aks.ac.kr/home/event/conferenceView.do?searchCondition=&searchWord=&page=2&idx=37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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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송씨 가문의 종손인 [[송흠조|송흠조(宋欽祚)]] 또한 서자만 두었는데 그마저도 일찍 죽어 제사를 지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송시열]]의 모친인 [[선산 곽씨]]는 [[송시희]] 내외의 제사를 [[송시열]]이 모시도록 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송기태|송기태(宋基泰)]]를 양자로 입양한 상황이었다. [[송기태|송기태(宋基泰)]]의 친부는 [[송시열]]의 숙부인 [[송희조|송희조(宋熙祚)]]의 양자 [[송시영|송시영(宋時瑩)]]으로 송시열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친형제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귀해 사촌형제의 자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송기태]]의 아들이 [[송은석|송은석(宋殷錫)]]이고, 그의 아내 즉, [[송시열]]의 손자 며느리는 [[밀양 박씨]]이며, 그 아버지는 [[박승건|박승건(朴承健)]]이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http://jsg.aks.ac.kr/home/event/conferenceView.do?searchCondition=&searchWord=&page=2&idx=37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f>
  
 
===송시열이 분재 편지를 쓴 의도===
 
===송시열이 분재 편지를 쓴 의도===
[[송시열]]은 65세에 분재 문서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제사 및 맏형 [[송시희]]의 제사를 장손인 [[송은석]]과 그의 처 [[밀양 박씨|박씨]]에게 맡긴다. 왜냐하면 양아들인 [[송기태]]가 당시 홀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사당 옆에 형 [[송시희]]의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송은석]]과 [[밀양 박씨]]가 죽은 후에는 [[묘제 |묘제사]]만 지낼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밀양 박씨]]는 시조부인 [[송시열]]보다 8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송은석]]과 그의 아들 [[송일원|송일원(宋一源)]] 내외가 그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봉사조]] 노비와 전지(田地)는 대대로 장자(長子)가 맡고, 혹 시동생([[송은석]]의 동생들)이나 그 자손들 중 패가(敗家)<ref>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여 없앰</ref>하는 이가 있다면 가서 살게 하고, [[묘제 |묘제사]]를 지낼시에는 그 전지(田地)를 잠시 줄 수 있으나, 나중에는 다시 종손이 차지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http://jsg.aks.ac.kr/home/event/conferenceView.do?searchCondition=&searchWord=&page=2&idx=37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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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은 65세에 분재 문서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제사 및 맏형 [[송시희]]의 제사를 장손인 [[송은석]]과 그의 처 [[밀양 박씨|박씨]]에게 맡긴다. 왜냐하면 양아들인 [[송기태]]가 당시 홀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사당 옆에 형 [[송시희]]의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송은석]]과 [[밀양 박씨]]가 죽은 후에는 [[묘제 |묘제사]]만 지낼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밀양 박씨]]는 시조부인 [[송시열]]보다 8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송은석]]과 그의 아들 [[송일원|송일원(宋一源)]] 내외가 그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봉사조]] 노비와 전지(田地)는 대대로 장자(長子)가 맡고, 혹 시동생([[송은석]]의 동생들)이나 그 자손들 중 패가(敗家)<ref>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여 없앰</ref>하는 이가 있다면 가서 살게 하고, [[묘제 |묘제사]]를 지낼시에는 그 전지(田地)를 잠시 줄 수 있으나, 나중에는 다시 종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명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http://jsg.aks.ac.kr/home/event/conferenceView.do?searchCondition=&searchWord=&page=2&idx=37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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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19:43 기준 최신판

송시열 분재 편지
한글팀 송시열 분재편지.png
영문명칭 Song Siyeol's writing to his daughter-in-law
작자 송시열
간행시기 1671년
소장처 국립청주박물관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3.0×102.5㎝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표기문자 한글


정의

1671년(조선 현종 12년) 5월 10일에 송시열손자 며느리 박씨에게 써준 글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후사가 없던 형의 부부의 신주(神主)[1]를 자신의 손자 송은석(宋殷錫)에게 모시게 하였다. 그리하여 제사 비용을 위한 땅과 노비의 상세 내역을 기록해 송은석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을 손자 며느리 박씨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풀어 써준 것이 바로 이 문서이다.[2]

송시열의 형 내외의 죽음

이 편지에서 언급되는 송시열의 형은 송갑조(宋甲祚)의 맏아들인 송시희(宋時熹)이다. 송시희는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오랑캐 기병(騎兵)이 침범해 들어오자 목숨을 걸고 홀로 싸우다가 죽었다. 송시희의 아내는 충의위(忠義衛) 김성진(金聲振)의 딸 안동 김씨인데, 남편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다 같은 해에 죽어 합장(合葬)하였다. 후손이 없는 자식에 대한 제사는 종가에서 그 신주를 모시고, 죽은 사람의 4대에 이르는 후손이 없을 때까지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 관례였다.[3]

송시열과 그의 아들 및 손자

한편 송씨 가문의 종손인 송흠조(宋欽祚) 또한 서자만 두었는데 그마저도 일찍 죽어 제사를 지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송시열의 모친인 선산 곽씨송시희 내외의 제사를 송시열이 모시도록 하였다. 이때 송시열송기태(宋基泰)를 양자로 입양한 상황이었다. 송기태(宋基泰)의 친부는 송시열의 숙부인 송희조(宋熙祚)의 양자 송시영(宋時瑩)으로 송시열과는 사촌지간이었다. 친형제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귀해 사촌형제의 자식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송기태의 아들이 송은석(宋殷錫)이고, 그의 아내 즉, 송시열의 손자 며느리는 밀양 박씨이며, 그 아버지는 박승건(朴承健)이다. [4]

송시열이 분재 편지를 쓴 의도

송시열은 65세에 분재 문서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제사 및 맏형 송시희의 제사를 장손인 송은석과 그의 처 박씨에게 맡긴다. 왜냐하면 양아들인 송기태가 당시 홀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사당 옆에 형 송시희의 사당을 지어 신주(神主)를 모셔 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송은석밀양 박씨가 죽은 후에는 묘제사만 지낼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밀양 박씨는 시조부인 송시열보다 8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송은석과 그의 아들 송일원(宋一源) 내외가 그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봉사조 노비와 전지(田地)는 대대로 장자(長子)가 맡고, 혹 시동생(송은석의 동생들)이나 그 자손들 중 패가(敗家)[5]하는 이가 있다면 가서 살게 하고, 묘제사를 지낼시에는 그 전지(田地)를 잠시 줄 수 있으나, 나중에는 다시 종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명시하였다.[6]


연계 자원 보러 가기
송시열 분재 편지 (해독)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송시열 송시열 A는 B에 의해 작성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송시열 송자고택 A는 B에서 거주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송시열 송갑조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송시희 송갑조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송시희 정묘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송시희 송시희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송시희의 처 김성진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안동 김씨 김성진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송흠조 송시열 A는 B와 같은 혈족이다 A ekc:isLineageKinOf B
송갑조 송갑조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선산 곽씨 송갑조의 처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송시열 송기태 A는 양자 B를 두었다 A ekc:hasAdoptedHeir B
송희조 송갑조 A는 형제 B가 있다 A ekc:hasBrother B
송희조 송시영 A는 양자 B를 두었다 A ekc:hasAdoptedHeir B
송기태 송시영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송기태 송기태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전주 이씨 송기태의 처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송은석 송기태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송은석 송은석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밀양 박씨 송은석의 처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송일원 송은석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봉사조 송시열 분재 편지 A는 B에 언급되었다 A ekc:isMentionedIn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27년 송시희(宋時熹)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죽었다.
1653년-1661년 송시열(宋時烈)송자고택(宋子古宅)에 거주하였다.
1658년 송시열(宋時烈)송기태(宋基泰)를 양자로 들였다.
1671년 송시열(宋時烈)송시열 분재 편지를 작성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649161 127.512186 송시열 분재 편지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6.335657 127.440397 송시열(宋時烈)송자고택(宋子古宅)에 거주하였다.

시각자료

주석

  1. 죽은 사람 위(位)를 베푸는 나무 패(牌)
  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78쪽.
  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
  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
  5.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여 없앰
  6.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7년 1월 20일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발표내용'(박꽃새미)에서 발췌 및 보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