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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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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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_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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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사인물초상화 Top icon}}
|DB유형 = 인물
+
{{인물정보
|국문명 = 김정호
+
|사진= joseon_mid_etc1.png
|한자명 = 金正浩
+
|사진출처=  
|이칭/호 = ():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 /고산자(古山子)
+
|대표명칭= 김정호
|시대 = 조선
+
|한자표기= 金正浩
|출생 - 사망 = 1804년(순조 4) 추정 - 1866년(고종 3) 추정
+
|영문명칭=
|성격 = 지리학자, 실학자
+
|본관= 청도(淸道)
|본관 = 청도(淸道)
+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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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im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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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고산자(古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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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866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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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황해도 토산(兎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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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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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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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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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저서=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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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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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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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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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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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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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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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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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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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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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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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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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ref>"유재건의...추정"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할 수 있는데, [[이향견문록]]은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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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편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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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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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을 통해 김정호는 [[최한기|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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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의) 벗 김정호는 나이가 동관(童冠)일 때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 곧 눈금선(方罫)을 그려 넣음에 어쩔 수 없이 물을 자르고 산을 끊었으며, 여러 고을을 흩어 놓아 진실로 표(表)를 보고 경계를 살피기가 어려웠다···(중간 생략)···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全幅)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이 정전(井田)을 구획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 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昭代)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曆算)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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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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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일본과의 [[강호도조약]],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책임자를 역임하였던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 서문에도 김정호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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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군(김정호)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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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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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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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과 업적===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ref>[[김양선]](金良善)의 주장.</ref>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ref>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음을 추측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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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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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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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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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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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해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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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최근에 김정호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청구도]]) 2권을 저술했다. 별도로 바둑판처럼 만들어 번호를 매기고, 고을의 경계를 그었다.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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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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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성부|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ref>[[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 《창원국학산고》 제2편 조선고서해제; [[동아일보]] [[1931년]] [[3월 9일]]자와 16일자.</ref>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
====지구전후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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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순조 34)[[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ref>원문은 “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이다.</ref> 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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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도지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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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호는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은 [[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834년]]([[조선 순조|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조선 철종|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
====여도비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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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동여도지]][[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조선 고종|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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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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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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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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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김정호의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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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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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E031/E031.htm 김정호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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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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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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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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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E031/E031.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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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고조선)|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정호]]||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
==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
+
| [[김정호 표준영정]] || [[김정호]]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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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문헌|고산자를 회함}}
+
| [[청구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ref name="글로벌">《[[글로벌세계대백과]]》, 〈실학의 융성〉, 김정호.</ref> 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ref name="조선인물실록">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256~264쪽.</ref><ref name="pp234" />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ref name="pp234">{{서적 인용
+
|-
|저자=이상태
+
| [[청구도]] || [[청구도제]]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제목=한국 고지도 발달사
+
|-
|연도=1999
+
| [[청구도제]] || [[최한기]] || A는 B가 썼다 || A dcterms:creator B
|출판사=혜안
+
|-
|출판위치=서울
+
| [[최한기]] || [[김정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페이지=234~236쪽
+
|-
|인용문=}}</ref>
+
| [[김정희]] || [[최한기]]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ref>유재건, 《이향견문록》, “癖於輿地之學 博攷廣蒐”.</ref> 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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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 || [[지구전후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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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국가 단위의 지도를 개인이 오로지 답사에만 의존해 제작했단 자체가 넌센스이며, 과거 민족사관에 힘입어 부각되고 조명된 여러 역사인물들이 그러했듯 민족적 긍지를 드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김정호 역시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전국을 낱낱이 답사해 지도를 만들었단 식으로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제작자가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도를 모아 집대성한 것만으로 그만한 정확도를 갖추긴 어려웠을 것이고 이전 지도보다 개선되었음을 감안할 때, 일관성 있는 편집 및 검증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의 면밀한 답사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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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전후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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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옥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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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여도지]] ||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ref name="글로벌" /><ref>《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제5권 4과.</ref>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9CwjAKvOtWY 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 대동여지도 목판], 문화유산채널</ref>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ref>또한 흥선대원군은 [[애로호 전쟁]]이나 두 차례의 강화도 군사분쟁 등 서구 열강의 쇄도가 동양을 죄어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을 통해 서양의 회중시계를 구해오게 하여 그것으로 시간을 맞추며 알뜰히 썼던 일이나, [[대동강]]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횡포를 부리다가 소각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의 잔해를 수습하여 연구하라 명령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문물 흡수에 적극성을 갖고 있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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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비지]] ||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ref name="조선인물실록" /><ref>〈대동여지도〉 등을 연구했던 김양선도 그 판목을 소유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판목이 15매 남아 있다.</ref><ref name="이상태" />,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진 않았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ref name="이상태">{{서적 인용 |저자=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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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 고지도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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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비지]] || [[최성환]]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연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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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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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출판위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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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236~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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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인용문=}}</ref>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신헌 등이 [[비변사]][[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는지라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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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  || [[유재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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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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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주연문장전산고]]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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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 [[이규경]]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저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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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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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초고]]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File:Daedongyeojido-full.jpg|250px|thumb|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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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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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초고]] || [[신헌]]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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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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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 || [[김정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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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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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헌]] || [[최한기]]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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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ref name="kj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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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 || [[신헌]]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ref name="kj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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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 [[신헌]]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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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 [[의순]]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懷)함」이란 글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평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기타==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br/>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br/>
 
 
 
===[[이향견문록]]에서의 김정호===
 
 
 
 
 
 
 
 
 
 
 
 
 
 
 
=='''노드 및 관계'''==
 
{| class="wikitable"
 
! 노드 || 관계 || 노드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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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isTheSubjectOf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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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헌]] || [[의순]]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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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creates||[[대동여지도]] ||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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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순]] || [[김정희]]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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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isMentionedIn||[[이향견문록]] || [[이향견문록]][[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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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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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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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20%px"|시간정보!!style="width:80%px"|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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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 || [[김정호]][[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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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isMentionedIn||[[청구도제]] || [[청구도제]]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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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 || [[김정호]][[지구전후도]]를 판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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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isMentionedIn||[[금당초고]] || [[금당초고]]는 [[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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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1845년 || [[김정호]]가 [[동여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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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creates||[[청구도]] || [[청구도]]는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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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isMentionedIn||[[오주연문장전상고]] || [[오주연문장전상고]][[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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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1856년 || [[김정호]][[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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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hasFriendshipWith||[[최한기]] || [[최한기]]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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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1년 || [[김정호]]가 목판본 22첩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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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hasFriendshipWith||[[김정희]] || [[김정희]]는 [[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
 
|}
  
=='''함께 보기'''==
 
*최한기
 
*신헌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지도박물관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82%B0%EC%9E%90,_%EB%8C%80%EB%8F%99%EC%97%AC%EC%A7%80%EB%8F%84 《고산자, 대동여지도》] - 영화, 2016.09.07 개봉, 감독:강우석, 출연:차승원, 유준상
 
  
=='''참고문헌'''==
+
=='''시각자료'''==
*[https://namu.wiki/w/%EA%B9%80%EC%A0%95%ED%98%B8 나무위키 "김정호"]
+
===가상현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0%95%ED%98%B8 위키백과 "김정호"]
+
===갤러리===
**2차 자료: 이상태 (1999).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185~242쪽.
+
<gallery mode=packed caption=" "  heights=180px  style="float:center" >
**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도서출판 자작나무, 1996년. 中 8장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
파일:역사인물_인물_김정호_지구전후도.jpg| 지구전후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095 지구전후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42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호"]
+
파일:역사인물_인물_김정호_청구도.jpg| 청구도 중 본조팔도주현도총목<ref>홍시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274 청구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향견문록
+
파일:역사인물_인물_김정호_여도비지.jpg|여도비지<ref>양보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파일:역사인물_인물_김정호_대동여지도.jpg| 목판본 대동여지도<ref>장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9797 대동여지도목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파일:김태-대동여지도(김정호)-1979s.jpg|?-1866년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gallery>
 +
 
 +
===영상===
 +
*'''[YTN 사이언스]김정호의 꿈과 조선시대 지도체계(게시일: 2014년 8월 10일)'''
 +
<html>
 +
<iframe width="640"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g4ZakRt_6Dk"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
*'''[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
<html>
 +
<iframe width="640" height="360" src="https://www.youtube.com/embed/9CwjAKvOtW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각주'''==
+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추가자료'''==
+
=='''참고문헌'''==
*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
===인용 및 참조===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143&article_id=0000040057&section_id=103&section_id2=245&menu_id=103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 김정호의 전국답사설을 비판하는 기사.
+
#단행본
 +
#*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국립중앙도서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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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양보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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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분류:역사인물]][[분류:조선]][[분류:지리학자]][[분류: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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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분류:인물]]

2017년 11월 28일 (화) 13:36 기준 최신판


김정호(金正浩)
Joseon mid etc1.png
대표명칭 김정호
한자표기 金正浩
생몰년 1804년 추정-1866년 추정
본관 청도(淸道)
고산자(古山子)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
출생지 황해도 토산(兎山)
시대 조선
국적 대한민국
대표저서 대동여지도
성격 지리학자, 실학자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내용

가계와 생애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1]

김정호에 대한 기록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

  •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2]할 수 있는데, 이향견문록은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Quote-left.png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편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


Quote-left.png (나의) 벗 김정호는 나이가 동관(童冠)일 때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 곧 눈금선(方罫)을 그려 넣음에 어쩔 수 없이 물을 자르고 산을 끊었으며, 여러 고을을 흩어 놓아 진실로 표(表)를 보고 경계를 살피기가 어려웠다···(중간 생략)···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全幅)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이 정전(井田)을 구획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 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昭代)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曆算)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Quote-left.png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군(김정호)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활동과 업적

청구도 제작

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3]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Quote-left.png 최근에 김정호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청구도) 2권을 저술했다. 별도로 바둑판처럼 만들어 번호를 매기고, 고을의 경계를 그었다.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지구전후도 제작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4]

동여도지 저술

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호는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5]

여도비지 제작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6]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이다.[7] 동여도지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8]

대동여지도 제작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9]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10]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1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김정호 표준영정 김정호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청구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청구도 청구도제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청구도제 최한기 A는 B가 썼다 A dcterms:creator B
최한기 김정호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정희 최한기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최한기 지구전후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지구전후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동여도지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여도비지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여도비지 최성환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이향견문록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이향견문록 유재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오주연문장전산고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금당초고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금당초고 신헌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신헌 김정호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신헌 최한기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정희 신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약용 신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약용 의순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신헌 의순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의순 김정희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34년 김정호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다
1834년 김정호지구전후도를 판각하였다
1834년-1845년 김정호동여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1850년-1856년 김정호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1861년 김정호가 목판본 22첩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YTN 사이언스]김정호의 꿈과 조선시대 지도체계(게시일: 2014년 8월 10일)

  • [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주석

  1.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유재건의...추정" :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여도비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1.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2. "지구전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홍시환, "청구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양보경, "여도비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장상훈, "대동여지도목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국립중앙도서관, 2011.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