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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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_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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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사인물초상화 Top icon}}
|DB유형 = 인물
+
{{인물정보
|국문명 = 김정호
+
|사진= joseon_mid_etc1.png
|한자명 = 金正浩
+
|사진출처=  
|이칭/호 = ():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 /고산자(古山子)
+
|대표명칭= 김정호
|시대 = 조선
+
|한자표기= 金正浩
|출생 - 사망 = 1804년(순조 4) 추정 - 1866년(고종 3) 추정
+
|영문명칭=
|성격 = 지리학자, 실학자
+
|본관= 청도(淸道)
|본관 = 청도(淸道)
+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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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image =
+
|호= 고산자(古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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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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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1804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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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866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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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황해도 토산(兎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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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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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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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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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저서=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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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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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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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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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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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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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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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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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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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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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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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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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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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ref>"유재건의...추정"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할 수 있는데, [[이향견문록]]은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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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편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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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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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을 통해 김정호는 [[최한기|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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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의) 벗 김정호는 나이가 동관(童冠)일 때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 곧 눈금선(方罫)을 그려 넣음에 어쩔 수 없이 물을 자르고 산을 끊었으며, 여러 고을을 흩어 놓아 진실로 표(表)를 보고 경계를 살피기가 어려웠다···(중간 생략)···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全幅)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이 정전(井田)을 구획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 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昭代)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曆算)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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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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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일본과의 [[강호도조약]],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책임자를 역임하였던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 서문에도 김정호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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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군(김정호)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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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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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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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과 업적===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ref>[[김양선]](金良善)의 주장.</ref>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ref>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음을 추측된다.</ref>
+
====청구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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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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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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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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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해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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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최근에 김정호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청구도]]) 2권을 저술했다. 별도로 바둑판처럼 만들어 번호를 매기고, 고을의 경계를 그었다.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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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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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성부|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ref>[[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 《창원국학산고》 제2편 조선고서해제; [[동아일보]] [[1931년]] [[3월 9일]]자와 16일자.</ref>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
====지구전후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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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순조 34)[[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ref>원문은 “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이다.</ref> 고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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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도지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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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호는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은 [[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834년]]([[조선 순조|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조선 철종|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
====여도비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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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동여도지]][[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조선 고종|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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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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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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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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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김정호의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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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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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E031/E031.htm 김정호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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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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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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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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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E031/E031.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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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과 [[기자 (고조선)|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정호]]||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
==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
+
| [[김정호 표준영정]] || [[김정호]]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
+
|-
{{위키문헌|고산자를 회함}}
+
| [[청구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ref name="글로벌">《[[글로벌세계대백과]]》, 〈실학의 융성〉, 김정호.</ref> 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ref name="조선인물실록">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256~264쪽.</ref><ref name="pp234" />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ref name="pp234">{{서적 인용
+
|-
|저자=이상태
+
| [[청구도]] || [[청구도제]]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제목=한국 고지도 발달사
+
|-
|연도=1999
+
| [[청구도제]] || [[최한기]] || A는 B가 썼다 || A dcterms:creator B
|출판사=혜안
+
|-
|출판위치=서울
+
| [[최한기]] || [[김정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페이지=234~236쪽
+
|-
|인용문=}}</ref>
+
| [[김정희]] || [[최한기]]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ref>유재건, 《이향견문록》, “癖於輿地之學 博攷廣蒐”.</ref> 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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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 || [[지구전후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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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국가 단위의 지도를 개인이 오로지 답사에만 의존해 제작했단 자체가 넌센스이며, 과거 민족사관에 힘입어 부각되고 조명된 여러 역사인물들이 그러했듯 민족적 긍지를 드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김정호 역시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전국을 낱낱이 답사해 지도를 만들었단 식으로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제작자가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도를 모아 집대성한 것만으로 그만한 정확도를 갖추긴 어려웠을 것이고 이전 지도보다 개선되었음을 감안할 때, 일관성 있는 편집 및 검증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의 면밀한 답사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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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전후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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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옥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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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여도지]] ||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ref name="글로벌" /><ref>《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제5권 4과.</ref>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9CwjAKvOtWY 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 대동여지도 목판], 문화유산채널</ref>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ref>또한 흥선대원군은 [[애로호 전쟁]]이나 두 차례의 강화도 군사분쟁 등 서구 열강의 쇄도가 동양을 죄어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을 통해 서양의 회중시계를 구해오게 하여 그것으로 시간을 맞추며 알뜰히 썼던 일이나, [[대동강]]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횡포를 부리다가 소각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의 잔해를 수습하여 연구하라 명령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문물 흡수에 적극성을 갖고 있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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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비지]] ||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ref name="조선인물실록" /><ref>〈대동여지도〉 등을 연구했던 김양선도 그 판목을 소유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판목이 15매 남아 있다.</ref><ref name="이상태" />,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진 않았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ref name="이상태">{{서적 인용 |저자=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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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 고지도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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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비지]] || [[최성환]]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연도=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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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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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출판위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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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236~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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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인용문=}}</ref>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신헌 등이 [[비변사]][[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는지라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ref name="조선인물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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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 || [[유재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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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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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주연문장전산고]]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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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와 지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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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 [[이규경]]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File:Daedongyeojido-full.jpg|250px|thumb|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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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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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초고]]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
 
*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
 
*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1864년 편찬설이 있음)<ref name="kjh1"/>
 
*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ref name="kjh2"/>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 함께 보기 ==
 
* [[최한기]] / [[신헌]]
 
* [[청구도]] / [[대동여지도]] / [[대동지지]]
 
* [[지도박물관]]
 
 
 
==생애==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왜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원래는 문신이었다. 정여립과 대립으로 정치적으로는 정철과 함께 서인 측 강경파로 분류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 행동하는 선비로 길이 남게 된다.
 
 
 
전쟁 전에는 이이를 열렬히 숭배하는 서인 강경파이자[3] 전투적인 성질로 유명했고 이이의 제자였다가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을 맹렬히 비난했다. 관직에 있다가 자기 의견이 안 받아들여진다 싶으면 물러나면서도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정치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 등 독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선조가 "조헌 이 자는 서인 놈들 중에서도 간귀이니 앞으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다(=유배 보낼 것이다.)."라고 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는 서인 내 주전론자의 중심이었고, 전쟁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또한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여러 번 땅에 치는 등 상소를 강경하게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렇듯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바로 '지부상소'(持斧上疏)', 이른 바 '도끼 상소'라 알려진 것이다. 요컨대, 상소를 가납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가져간 도끼로 자기를 찍어 죽이라는(!!) 것. 상소를 올릴 당시에는 허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후에 이 양반이 하는 일을 본다면 아마 이건 진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흠좀무. 조헌의 이 지부상소는 후대에도 일부 양반, 유생들이 따라 행한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숙종조의 윤지완, 고종조의 최익현 등이 있다. 이러한 지부상소를 두고는 호의적인 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반면 무례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가령 심노숭이라는 양반이 쓴 '자저실기'에서는 조헌 때문에 임금 앞에서 도끼 들고 함부로 설치는 못된 풍조가 생겨났다는 투로 지부상소를 비판하고 있다.
 
 
 
낙향한 후에도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지만 다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라고 비웃었다. 오로지 연안성을 지키던 신각 장군만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성을 정비했고, 이는 나중에 이정암이 연안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밑거름이 된다. 신각은 약탈하던 일본군 수십명을 임진강 어귀에서 섬멸하여 조선군 사상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관계를 파악 않고 장계를 올리는 중대한 실수를 하여 적전도주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각설하고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의 경고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조헌은 이제 의병으로 전쟁터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입만 놀리는 주전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헌은 1592년 5월, 옥천에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 이우·김경·전승업 등의 도움으로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고 7월 초부터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헌은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해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라는 격문을 써 의병을 모집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관군 및 영규대사가 이끄는 1000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4]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비록 패했지만 이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했기에 왜군도 수천여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커서 우두머리를 난도질했는데, 아들인 조극관을 우두머리로 알고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스려야 했기에 호남 곡창 지대 방어에 큰 기여를 했다.
 
 
 
다만 금산 전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 일본군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좀 의문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가깝기 때문. 이치 전투 항목에 적혀 있는 것처럼 이치 전투가 웅치 전투보다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벌어진 것이라면, 웅치 전투, 이치 전투, 2차 금산 전투의 시간순부터 애매해진다. 이치=웅치->금산이 아니라, 웅치 이후에는 순서가 불분명해지기 때문. 일본군이 조헌을 털어버린 다음에 다시 전주로 진격해서 이치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이 상황이라면 실질피해는 크지 않았을 듯 뒤에 조선군은 반격으로 금산을 탈환하게 된다.
 
 
 
율곡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이이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1조헌의 일생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어릴 적부터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대한 자세도 남달랐다. 당시 정치의 잘못된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일본이 접촉해오자 관계를 끊을 것을 강경히 주장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곧 의병을 일으켰다.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관군의 견제로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해 일전을 벌였고 장렬히 전사했다.
 
 
 
 
 
2시대적, 가문적 배경
 
선조대는 퇴계 이황(李滉)과 율곡 이이(李珥)가 국왕으로부터 스승대접을 받았으며,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하여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던 시기였다. 또한 성리학이 성숙하면서 학파도 갈리어 정파로 이어졌고, 그들 간의 갈등도 표면화되던 때였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김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황(璜), 조부는 세우(世佑), 부친은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처의 부친은 신세함(辛世諴)이다. 이이·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서인으로 분류된다.
 
 
 
 
 
3유년기의 조헌
 
조헌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공손히 섬겼다.
 
계모가 그를 매정하게 대우하여 외조모가 험담을 하였는데, 몇 달 뒤에야 가서 외조모를 뵈었다. 외조모가 왜 오랫동안 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지난번에 우리 모친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자식이 된 입장으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오지 못했을 뿐이다.’ 하였다. 외조모가 부끄럽게 여기며 감복하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조헌이 정성을 다하여 계모를 섬기자 계모도 감동하여 이 아이가 참으로 내 아들이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 낳았을 뿐이라고 했다한다.  상세정보 
 
12세에 비로소 김황(金滉)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친 조응지는 김포현의 교생이었는데 농사를 짓고 살았다. 가난하였으나 겨울에도 헤진 옷과 신으로 추위를 견디며 글을 배웠으며, 밭농사를 돕는 중에도 근처에 책을 두고 쉴 때마다 읽었다고 한다.
 
 
 
 
 
4관직생활
 
1565년에 성균관(조선)(成均館)에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보우(普雨)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1567년에 병과 제9인으로 급제했다.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1570년에 파주목 교수에 임명되었다. 성혼에게 학문을 청하였고, 이듬해 이이를 만났다. 관직활동 초반부터 강직한 상소를 자주 올려 국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으나, 때문에 조정의 동료 뿐 아니라 백성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서 정사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篈)과 함께 명나라 북경에 파견되었다. 8월 북경에 도착하였고 조회에 참석하였다. 8월17일에 황극전(皇極殿)에서 열린
 
명나라 시기 자금성의 주 건물로 청나라 때 태화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화재를 입어 수리를 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위로의 말을 올렸다.  상세정보 
 
만력제 신종의 성절하례식(聖節賀禮式)에 참석했다. 황제가 아침에 황극전에 나와 앉아 축하를 받았다. 조선사신 일행은 아침일찍 장안문과 통정문을 통해 들어가 기다렸다. 유생들이 와서 고려인이냐고 물어서 ‘고려는 전대이고, 지금은 조선이다’라고 했다. 황제가 나와 앉자 수많은 관원들이 일제히 의식에 따라 장엄한 축하예를 올렸다.  상세정보 
 
국자감과 문묘를 방문하였고 예부에 글을 올려 문묘의 위차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조헌은 예부제독 회동관주사에게 글을 올려 주돈이·정호·정이·주희의 위차가 낮은 이유, 공백료 등이 언제 어떻게 파출되었는지, 등등 위차의 상하관계와 문묘에 들지 못한 이유 등에 대해 질문했다.  상세정보 
 
한편으로 양명학이 유행하는 명나라의 학문 현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조헌과 허봉은 명나라 사람을 만나 명나라 학자들의 왕양명에 대한 평가를 물어보았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상세정보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8개조의 상소를 올렸다. 〈質正官回還先上八條疏〉 명나라의 의례, 풍속 등에 대한 최신의 상세한 보고였다. 조헌은 명나라의 문묘배향, 의관(衣冠) 제도, 음식과 연향, 사대부들의 인사예절, 스승과 제자의 예법, 지방의 풍속, 군대의 기강 등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상세정보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 및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횡행하는 내노(內奴) 행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1577년 부평으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이이를 찾아가 몇 달 동안 학문을 배웠다. 동인이었던 이발(李潑), 김우옹(金宇顒) 등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이이에게 사론의 분열을 아쉬워하는 시를 올렸다,
 
공주 교수로 재직하던 1586년과 1587년 정여립(鄭汝立) 등의 흉패한 모의와 간사한 무리를 논박하는 만언소를 지어 올렸다. 당파의 옳고 그름과 정치 풍토의 폐단을 비판하는 장문의 상소. 당시 정치 현황 속에서 서인을 옹호하고 동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은 이발, 이길과 함께 스승을 배반한 자로 맹비난하였다.  상세정보 
 
수차례 상소 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옥천으로 귀향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치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5일본과의 접촉을 배격하다
 
이해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 통신사를 요청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쓰시마를 시켜 조선의 사신을 일본에 불러오기를 요구했다. 1587년부터 요구가 시작되었고, 조선 조정 내에서는 파견여부를 두고 많은 논의가 펼쳐졌다. 상세정보 
 
조헌은 일본사신을 배척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 임금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자이니 의리를 들어 이들의 요청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사신을 구류하고 찬탈을 모의한 자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고, 다른 종자들은 일본으로 돌려보내 일본으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자고 하였다.  상세정보 
 
1589년에는 시폐를 극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귀양을 가기도했다. 백성이주의 문제와 그의 주된 원인인 부역과 조세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산해, 윤탁연, 김응남, 유성룡 등을 비난하였다.  상세정보 
 
조선은 1590년에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보냈다. 통신사가 돌아온 후 1591년 조헌은 일본사신 현소(玄蘇)를 목 벨 것을 요청하였으며,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의도가 전국에 퍼져나갔다. 조헌은 빨리 일본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 조정에 보내는 한편 류큐(琉球) 등 이웃나라에 침략위협을 알려 함께 일본에 대응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상세정보 
 
이 외에도 명나라에 보낼 글, 류큐(琉球)와 쓰시마(對馬島), 일본유민 등에게 보낼 글, 영호남지역의 일본방비책 등에 대한 상소를 연이어 올렸으나 답을 듣지 못했고, 결국 옥천으로 돌아왔다.
 
 
 
 
 
6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활동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6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각지에 의병참여를 호소하였고 사람들이 모였다. 지방관들의 방해가 있자, 자신을 따르는 전참봉 이광륜(李光輪), 선비 장덕개(張德盖), 신난수(申蘭秀), 고격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과 다시 의병을 모집했고 모여든 사람이 1,600명에 이르렀다. 7월 5일 웅진에서 군사들과 국난극복과 진격을 맹세했다.
 
몰래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를 침략한 왜적은 우리의 원수이다. 왜적을 물리치고자하는 사람들이 떨쳐 모였다. 나를 의병장으로 삼으니 감히 의병을 규합하여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죄 없는 백성들을 구하고 한 사람의 왜적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니 하늘은 도와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상세정보 
 
의병을 이끌고 회덕(懷德)으로 진군했다. 앞서 호남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금강 중류인 형강(荊江)을 건너 일본군을 무찌르기로 하였으나 고경명은 이미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고경명이 의병 6~7천을 데리고 북상하다가 일본군이 호남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선 이를 막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금산성 밖에 진을 쳤다. 전투가 시작되어 성을 공격하였는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공격했고, 선봉장이 도망치면서 전열이 무너졌다. 고경명 등이 의병장들이 모두 전사했다.  상세정보 
 
고경명을 위한 추도시를 지었다.동녘 땅 용맹스런 백만 정병이, 이 어려움을 구할 방법이 없을 것인가. 형강으로 기약한 사람 어디로 가버렸는지. 가을바람 노를 치며 혼자만 건너간다.  상세정보 
 
일본군이 청주를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헌은 승장 영규(靈圭)의 군대와 연합하여 8월1일 청주성을 탈환했다. 이후 전투결과를 전승업과 아들 완도(完堵)를 시켜 당시 선조가 머물던 의주의 행재소에 보고하였다.
 
조헌이 청주성을 탈환한 후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보고를 하는 한편, 전쟁이 일어나게 된 시폐에 대해 논했다. 전투 후 남은 7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영규와 함께 금산으로 향했다.  상세정보 
 
8월15일 조정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의 벼슬을 내렸다.
 
관군의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8월16일 영규의 군대와 함께 청주를 떠나 금산으로 전진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은 18일자로 약속된 금산성 공격 날짜를 미루자고 하였으나 조헌은 이에 따르지 않고 금산으로 진격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은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교대로 공격해왔고, 조헌의 700의병은 수에서 밀려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을 2차 금산성 전투라고 부른다.
 
조헌은 700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금산을 공격하려 했다. 권율과 허욱이 만류하며 공격일자를 미루자고 했으나 거부했다. 금산성 밖에 진을 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다. 아들 조완기(趙完基)도 함께 전사했다. 동생 조범(趙範)이 시신을 거두었다.  상세정보 
 
10월에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를 증직하였다. 조헌과 김제갑, 남정유, 승장 영규를 증직하였다. 상세정보 
 
1593년 11월에 광해군이 아들 완도를 불러 포상하고 황신(黃愼) 등을 보내 치제하였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1971년에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다.
 
 
 
 
 
본관은 백천(白川)이며 중종 39년(1544) 6월28일 김포군 감정리에서 부친 응지와 모친 용성 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도원·후율이라 했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문열이라 하였다. 1565년(명조 20) 성균관에 진학하였으며 24세가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교서관의 부정자직에 있다가 곧 경주, 파주, 홍주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조헌은 파주목의 교수로 있을때 성혼, 이이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1548년(명종 3년) 어느 봄날 김포군 서감정리의 큰 길가에 있는 한 정자에서 마을 아이들이 모여 천자문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정자 아래의 대로에 위의(威儀)를 갖춘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가 지나가다 글을 읽던 아이들이 다투어 이 요란한 행차를 구경하려고 달려나왔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살이 된 어린아이만은 그대로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지나가던 벼슬아치가 이를 보고 기특히 여겨 정자에 올라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의 행차를 구경하는데 너만은 왜 그냥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오로지 글 읽기에만 마음 쓰라는 아버지의 말씀이옵니다"라고 의젓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감복한 벼슬아치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 "우리나라에 참다운 학자가 또 하나 나오게 되었습니다"하고 칭찬하면서 극진한 예를 올리고 떠났다 한다.
 
 
 
  11572년(선조 5)교서관 정자로 있을 때, 왕이 절에 향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가 곧 저작에 등용되고 1574년(선조 7) 성절사 박희립을 따라 명에 질정관으로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의 좌랑, 감찰을 거쳐 통진 현감이 되었으나 죄인을 장살한 일로 탄핵되어 2년간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전라도 도사·종묘서령을 지내고,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보은현감으로 나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이 최초로 왜군과 싸운 것은 8월1일 청주전투였다. 청주로 가서 죽음으로 싸움을 결심한 의병들과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싸움에 임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의병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자세로 싸우니 왜적이 성안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기개를 마음대로 펴보았던 조헌은 마침내 금산 벌판에서 49세를 일기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 조헌의 시신은 옥천으로 옮겨져서 장례를 지냈고, 이해 12월에 무계 성혼의 상소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영춘추관 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증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봉하였으며 그 부친과 함께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묘소는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다. 1656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청음(淸陰) 김상헌이 글을 짓고 동춘당(同春當)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중봉의 묘소가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것은 그가 죽은지 44년만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아늑한 곳을 택하여 편히 모시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옥천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서 그의 충절을 받들어 제향하고, 금산에는 비를 세웠으며 7백의총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중봉집』『중봉동환봉사』가 있다. 그는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사충신의 한 사람이다.
 
 
 
==연보==
 
 
 
 
 
 
 
==저서==
 
 
 
==상훈과 추모==
 
 
 
==작품==
 
池塘에 비 뿌리고  楊柳에 내 끼인 제
 
沙工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夕陽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평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br/>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br/>
 
 
 
==[[이향견문록]]에서의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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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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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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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 || [[김정호]][[지구전후도]]를 판각하였다
*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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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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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1845년 || [[김정호]][[동여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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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1856년 || [[김정호]]가 [[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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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1년 || [[김정호]]가 목판본 22첩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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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여자》 (SBS, 2003년, 배우:한상혁)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강인기)
 
*칠백의총
 
*금산 전투
 
*중봉 조헌 신도비
 
*이이
 
*정철
 
*성혼
 
*안방준
 
*김장생
 
*김자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안코쿠지 에케이
 
*우저서원(牛渚書院)
 
  
=='''참고문헌'''==
+
=='''시각자료'''==
*[https://namu.wiki/w/%EA%B9%80%EC%A0%95%ED%98%B8 나무위키 "김정호"]
+
===가상현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0%95%ED%98%B8 위키백과 "김정호"]
+
===갤러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42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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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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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사이언스]김정호의 꿈과 조선시대 지도체계(게시일: 2014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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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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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추가자료'''==
+
=='''참고문헌'''==
*정명목 서용선 진행, 「작가와의 대담」, 『김태, 1952–1972』,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6.
+
===인용 및 참조===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143&article_id=0000040057&section_id=103&section_id2=245&menu_id=103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 김정호의 전국답사설을 비판하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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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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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국립중앙도서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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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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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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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양보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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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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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8일 (화) 13:36 기준 최신판


김정호(金正浩)
Joseon mid etc1.png
대표명칭 김정호
한자표기 金正浩
생몰년 1804년 추정-1866년 추정
본관 청도(淸道)
고산자(古山子)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
출생지 황해도 토산(兎山)
시대 조선
국적 대한민국
대표저서 대동여지도
성격 지리학자, 실학자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내용

가계와 생애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1]

김정호에 대한 기록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

  •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2]할 수 있는데, 이향견문록은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Quote-left.png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편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


Quote-left.png (나의) 벗 김정호는 나이가 동관(童冠)일 때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 곧 눈금선(方罫)을 그려 넣음에 어쩔 수 없이 물을 자르고 산을 끊었으며, 여러 고을을 흩어 놓아 진실로 표(表)를 보고 경계를 살피기가 어려웠다···(중간 생략)···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全幅)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이 정전(井田)을 구획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 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昭代)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曆算)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Quote-left.png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군(김정호)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활동과 업적

청구도 제작

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3]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Quote-left.png 최근에 김정호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청구도) 2권을 저술했다. 별도로 바둑판처럼 만들어 번호를 매기고, 고을의 경계를 그었다.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지구전후도 제작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4]

동여도지 저술

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호는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5]

여도비지 제작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6]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이다.[7] 동여도지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8]

대동여지도 제작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9]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10]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1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김정호 표준영정 김정호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청구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청구도 청구도제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청구도제 최한기 A는 B가 썼다 A dcterms:creator B
최한기 김정호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정희 최한기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최한기 지구전후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지구전후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동여도지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여도비지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여도비지 최성환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이향견문록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이향견문록 유재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오주연문장전산고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금당초고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금당초고 신헌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신헌 김정호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신헌 최한기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정희 신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약용 신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약용 의순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신헌 의순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의순 김정희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34년 김정호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다
1834년 김정호지구전후도를 판각하였다
1834년-1845년 김정호동여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1850년-1856년 김정호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1861년 김정호가 목판본 22첩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YTN 사이언스]김정호의 꿈과 조선시대 지도체계(게시일: 2014년 8월 10일)

  • [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주석

  1.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유재건의...추정" :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여도비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1.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2. "지구전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홍시환, "청구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양보경, "여도비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장상훈, "대동여지도목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국립중앙도서관, 2011.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