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범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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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

시대: 대한제국 연대1900년(고종37년) 유형비문크기: 높이 135cm, 너비 60cm, 두께 20cm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삼일로29번길 20 양주문화원 서체: 해서(楷書)찬자 /각자 /서자안연(安連) / 미상 / 서광식(徐光軾)


개관

이 비는 1900년(광무 4년) 경기도 양주에 건립된 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로 안연(安連)이 비문을 지었고, 서광식(徐光軾)이 글씨를 썼다.서광범(徐光範 : 1859~1897년)의 본관은 대구 서씨이고, 자는 서구(敍九)이며, 호는 위산(緯山)이다. 1880년(고종 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을 건너감에 수행, 문물제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을 계획했다.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소장층들과 집권층인 수구당(守舊黨) 제거를 획책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었으나 사흘 만에 와해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후 제 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으나 친로파(親露派) 및 사대수구파(事大守舊派)와 대립되어 그들의 압력으로 주미공사(駐美公使)로 부임한 후 임지에서 죽었다. 사적으로 시호를 내린 것은 익헌(翼獻)이다.현재 탁본은 양주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徐光範墓碣 維廣州治西彦周面碑井洞負寅四尺而封者故大韓駐美公使緯山徐公衣履之藏也嗚呼天道不可不知而惟可知者公之大節也盖公當 甲申之禍逃竄海外茹恨䵝昧者凡十周歲而至甲午夏朝野稍稍有徵察公當年心事不知公者憫其跡而原其心知公者許其心而撫其跡 從玆以往百世之下又不知以公爲何如人也由此觀之仁人君子之終不可誣有如是夫公諱光範字敘九緯山其號也系出大邱高麗軍器 少尹閈之後入 本朝有諱嶰號涵齋以學問有重名寔生諱渻判中樞府事 贈領議政諡忠肅號藥峯爲 穆陵名臣四傅而爲 元陵國 舅達城府院君諱宗悌諡孝僖又再傅而諱信修 贈贊成無嗣取仲兄府使 贈贊成諱仁修苐二男有寧爲後禮曹判書 贈上相諱龍輔 領議政諡翼獻亦無嗣取弟郡守 贈贊成應輔第三男戴淳爲後禮曹判書諡孝憲諱相翊吏曹叅判是爲公皇考妣貞夫人潘南朴氏生員 齊完女也 哲宗己未十一月八日生卽西曆一千八百五十九年也公生而姿品非凡才藝夙就見者咸期以遠大長而涉獵經史且潛究各 國文字嘗自以謂使我國家不能成自立基礎奠之於磐泰之安則決非皇天賦予之意也慨然憂歎之志造次靡懈嘗曰君權不得不限也民 志不得不壹也官制亟宜改革使名實相孚焉學校亟宜廣設使民智開明焉工商亟宜勸奬使財源導引焉不如此富强之術將何所施焉此 皆當世時諱而公則娓娓惓惓不明不措也 皇上庚辰擢增廣文科壬午春奉 命遊覽日本八月以叅贊官再往日本癸未圈拜待敎歷拜 副修撰兼司書兼弼善南學敎授副應敎出入經幄奏對如流 上大奇之亟欲不次大用夏又以叅贊啣奉使美洲始修交隣之誼甲申夏復 命六月特 除同副承旨內務叅議秋拜兵曹叅議十月當國家之變流入日本轉至合衆國時公年雖少而志節益堅不撓專力於政治之學 以及格致之科而憂國愛 君之誠盖十年如一日也甲午六月强隣乘釁國有大亂 上大悔之冬特 命昭雪還國公胥 命金吾又陳疏 請罪 上卽不優批仍 命入對自是禮遇隆而信任專特陞崇政階任法務大臣判義禁司事乙未夏官制改正復任法部大臣兼高等裁判 長決獄平允人咸比之以冬日可愛秋移學部大臣刱設學校培養人材冬拜特命全權公使前往美國仍 命駐箚時有本國學生十餘人自 日本轉至者公憫其失學流離捐俸銀二千元以爲學資美人亦無不感歎至今傳爲美談丙申春拜中樞院一等議官未及復 命而卒卽光 武元年丁酉七月十七日甲辰也公臨歿以火葬遺囑大抵 聖鑑垂明公之秉心悉所烱燭而竟未能仰答 聖恩以報涓埃盖欲燒身滅跡 湥引其過而已戊戌春以身灰返國而葬配 贈貞敬夫人安東金氏判書孝貞公炳地女貞靜和淑六親咸服先公二十三年卒後配貞敬夫 人密陽朴氏士人承憲女內行純備不幸十年處困備嘗艱險而持身謹飭終不失女士之範人莫不稱之取族人光鼎子載德爲後嗚呼公間 世人也世道國步誰爲扶持一治一亂相承而不已方其將亂而天必生能弭之人枊公非其人耶頎秀凝遠公之容儀也寬厚宏湥公之局量 也樞機靜毖而謀廬宥密公之才猷也至若超然物外澹然理內見人所不及見處言人所不能言者非天之生知公其孰能如此嗚呼天假之 年使公少須曳以訖其庸則其伸大義成大功庶幾於萬一上天不仁大勳未底而公則就世墓草已屢宿矣豈天之於公只擬於一亂而已耶 此奚獨公之飮恨於泉下抑亦志士英雄抆淚於千載之下也然是不可與不知者道也噫 大美國欽命駐箚大韓便宜行事大臣兼總領事安連撰 四寸弟軍部主事光軾書 大韓光武四年庚子五月 日立

서광범묘갈 광주 치소의 서쪽에 있는 언주면 비정동 북동동쪽을 4척 정도 등진 곳에 있는 봉분이 고 대한주미공사 위산 서광범의 장지이다. 아! 슬프다. 천도는 분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고, 인사로 오직 알 만한 것이 바로 공의 큰 절개이다. 공은 갑신의 화를 당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어리석음을 한스럽게 여긴 것이 무릇 10년이 되었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여름, 조야에서 점차 공을 불러 살피니 이 해에 심사로 공을 모르는 자는 그 과거를 걱정하였으나 그러한 마음들을 용서하였다. 공을 아는 자들은 그러한 마음을 허락하고 예전의 일들에 대해 묵인하여 주었다. 이에 따라 백세지하에 이르도록 또한 공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모를 수 있겠는가. 이로써 어진 사람이나 군자의 죽음을 보게 되면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울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다. 공의 이름은 광범이고 자는 서구이며 위산은 그의 호이다. 세계는 대구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군기 소윤을 지낸 한의 후예이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이름이 해이고 호가 함재인 분이 학문으로써 명망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성을 낳았다. 성은 판중추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숙의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호는 약봉이다. 그는 선조 때의 명신으로 네 번 스승이 되었고, 영조의 국구 달성부원군 종제는 증시하여 효희공이라 하였으며 또한 두 번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신수는 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중형인 부사로 찬성에 추증된 인수의 둘째 아들인 유녕을 양자로 삼아 후사로 하였다. 그는 예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보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익헌인데 또한 후사가 없어 동생인 군수 증 찬성인 응보의 3남 대순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그는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헌이었다. 상익은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분이 곧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정부인 반남박씨로 생원 제완의 딸이다. 공은 철종 기미년(철종 10, 1859년) 11월 8일에 태어났으니 곧 서력 1859년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그 풍채와 기품이 비범하였으며 재예를 일찍 성취하였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원대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장성하면서는 경사를 섭렵하였으며, 또 각국의 문자를 몰래 연구하여 일찍이 스스로를 ‘사’라고 하였다. 우리 국가가 능히 스스로 기초를 세워 반태의 안정을 정하지 못하였은즉 황천이 우리에게 내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개연히 걱정하여 탄식하는 뜻이 있었다. 갑자기 나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고는 일찍이 말하길 “군주의 권력은 제한되어야만 한다. 백성의 뜻은 반드시 일치단결되어야만 한다. 관제는 빨리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는 명실상부한 것이어야 한다. 학교는 빨리 널리 세우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개명을 알게 해야 한다. 공 · 상을 빨리 권장하여야만 한다. 사신들은 재원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부강의 방책이 장차 어찌 시행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그 시대에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때가 이를 꺼려하였으므로 공은 곧 여러 번 되풀이 하여서 간절하게 명확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황상께서 경진년(고종 17, 1880년)에 증광문과를 통해 공을 뽑았고 임오년(고종 19, 1882년) 봄에 명을 받들어 일본을 유람하였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서 다시 일본에 갔다. 계미년(고종 20, 1883년)에는 대교에 권배되었고, 부수찬 겸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 부응교에 차례로 제배되었으며 경연에 출입하였는데, 주대하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웠다. 임금이 그를 크게 뛰어나다고 여겨 순서를 밟지 않고 크게 쓰려 하였다. 여름에 또한 참찬어봉사로서미주에 가 비로소 교린의 관계를 맺었으며, 갑신년(고종 21, 1884년) 여름에 복명하였다. 6월에 동부승지 내무참의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가을에 병조참의에 임명하였다. 10월에 국가의 변란(갑신정변)을 당하여 일본으로 유입하였다가 옮겨 합중국(미국)에 이르렀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비록 연소하였으나 지절은 더욱 굳어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학에 힘을 쏟아 격치의 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우국 애군의 정성은 10년이 되었건만 하루와 같았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6월에 강린(청나라와 일본)들이 기회를 타서 나라에 큰 난이 있자 임금이 크게 뉘우치게 되었고, 겨울에 특명으로 소설하여 공을 환국시킬 것을 의금부에 명하였다. 공이 또한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곧바로 좋은 비답을 내렸고 이내 명을 내려 입대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예가 더욱 융숭하였고 신임은 한결같았다. 특별히 숭정대부에 올려 법무 대신 판의금사사에 임명하였다. 을미년(고종 32, 1895년) 여름에 관제개정이 있자 다시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장에 임명되어 옥송을 해결하는데 사람들에게 공평하면서도 만족스럽게 하니 모두 그를 따라 마치 겨울에 따뜻한 햇살과 같이 아끼었다. 가을에 옮겨 학부대신이 되어 학교를 창설하여 인재를 배양하였고, 겨울에는 특명전권공사에 제배하여 먼저 미국에 가도록 하였다가 이내 주차를 명하였다. 이때 본국의 학생 10여 인이 일본에서부터 옮겨와 도착하였는데 공이 학업을 잃고 유리되는 것을 근심하여 봉급 2천 원을 내어 학자금으로 하도록 하자 미국인들 또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지금까지 전하여 미담으로 삼고 있다. 병신년(건양 1, 1896년) 봄에 중추원 일등의관에 제배되었으나 미처 복명치 못하고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때가 즉 광무 원년 정유년(1897년) 7월 17일 갑진일이었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 화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부탁하였으니 대저 성감(임금의 감식)에 공의 한결같은 마음을 드리워 밝혀 촛불의 밝히는 바를 다하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능히 성은을 우러러 답하여 연애로 보답하는 것이었다. 대개 소신하고자 한 것은 흔적을 없애고 그 과거를 흘러가도록 한 것일 따름이었다. 무술년(광무 2, 1898년) 봄에 몸이 재가 되어서 나라에 돌아오게 되니 장례를 지냈다. 부인의 정경부인에 추증된 안동김씨로 판서 효정공 병지의 딸이니 정결함과 조용함 그리고 화애로움과 정숙함이 있어 6친이 모두 따랐다. 공보다 23년 앞서 졸하였다. 후배는 정경부인 밀양 박씨로 사인 승헌의 딸이다. 내행은 정순함을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10년간 어려운 사정에 처하였다. 일찍이 어렵고 험난함을 겪었으나 몸을 지켜 삼가고 신칙하여 끝내 여사의 규범을 잃지 않았으니 사람들마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척인 광정의 아들 재덕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오호라! 공은 여러 세대를 통해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국운은 누가 돕고 유지하겠는가? 일치일란이 서로 이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바야흐로 장차 난이 닥쳐오니 하늘은 반드시 뛰어난 인물을 내는 법인데 우러르건대 공이 그 사람이 아닌가 한다. 훤칠하고 빼어나며 엄정하고 천박하지 않은 것은 공의 의용이요, 너그러우면서 후하고 크면서도 깊은 것은 공의 재간과 도량이며, 천하의 큰 정치를 맡아 고요하면서도 근신하여서 지모와 사려는 넓고 조용하였으니 공의 재주와 계책이라 하겠다. 초연함에 이르러서는 세상 물정의 바깥에 있었고, 조용함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였고 다른 곳에서 언급되는 사람을 보더라도 능히 언급하지 못할 바이니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면 공을 아는 것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오호라! 하늘이 내려준 수명은 공에게는 작았고, 모름지기 역사에서 그 쓰임을 다하게 하였다면 공은 대의를 펼쳐 큰 공을 거의 이루었을 것이다. 상천이 대훈을 사랑하지 않아 이루지 못하여 공은 곧 세상에서 묘초만을 얻었을 따름이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어찌 하늘은 공보다 다만 일란에 의심을 둘 따름인가? 이것이 어찌 홀로 공만이 지하에서 한을 품는 것이겠는가? 우러르건대 또한 지사 · 영웅이 천세동안 눈물을 닦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알수 없는 것이니 도라 하겠다. 아아! 슬프도다. 대미국 흠명 주차 대한 편의 행사대신 겸 총영사 안연이 글을 짓고, 사촌 동생 군부 주사 광식이 글을 쓰다. 대한 광무 4년(1900년) 경자년 5월 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