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범묘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 시대: 대한제국 연대1900년(고종37년) 유형비문크기: 높이 135cm, 너비 60cm, 두께 20cm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
 
 
15번째 줄: 15번째 줄:
 
 
 
서광범묘갈 광주 치소의 서쪽에 있는 언주면 비정동 북동동쪽을 4척 정도 등진 곳에 있는 봉분이 고 대한주미공사 위산 서광범의 장지이다. 아! 슬프다. 천도는 분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고, 인사로 오직 알 만한 것이 바로 공의 큰 절개이다. 공은 갑신의 화를 당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어리석음을 한스럽게 여긴 것이 무릇 10년이 되었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여름, 조야에서 점차 공을 불러 살피니 이 해에 심사로 공을 모르는 자는 그 과거를 걱정하였으나 그러한 마음들을 용서하였다. 공을 아는 자들은 그러한 마음을 허락하고 예전의 일들에 대해 묵인하여 주었다. 이에 따라 백세지하에 이르도록 또한 공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모를 수 있겠는가. 이로써 어진 사람이나 군자의 죽음을 보게 되면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울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다. 공의 이름은 광범이고 자는 서구이며 위산은 그의 호이다. 세계는 대구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군기 소윤을 지낸 한의 후예이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이름이 해이고 호가 함재인 분이 학문으로써 명망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성을 낳았다. 성은 판중추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숙의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호는 약봉이다. 그는 선조 때의 명신으로 네 번 스승이 되었고, 영조의 국구 달성부원군 종제는 증시하여 효희공이라 하였으며 또한 두 번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신수는 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중형인 부사로 찬성에 추증된 인수의 둘째 아들인 유녕을 양자로 삼아 후사로 하였다. 그는 예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보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익헌인데 또한 후사가 없어 동생인 군수 증 찬성인 응보의 3남 대순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그는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헌이었다. 상익은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분이 곧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정부인 반남박씨로 생원 제완의 딸이다. 공은 철종 기미년(철종 10, 1859년) 11월 8일에 태어났으니 곧 서력 1859년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그 풍채와 기품이 비범하였으며 재예를 일찍 성취하였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원대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장성하면서는 경사를 섭렵하였으며, 또 각국의 문자를 몰래 연구하여 일찍이 스스로를 ‘사’라고 하였다. 우리 국가가 능히 스스로 기초를 세워 반태의 안정을 정하지 못하였은즉 황천이 우리에게 내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개연히 걱정하여 탄식하는 뜻이 있었다. 갑자기 나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고는 일찍이 말하길 “군주의 권력은 제한되어야만 한다. 백성의 뜻은 반드시 일치단결되어야만 한다. 관제는 빨리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는 명실상부한 것이어야 한다. 학교는 빨리 널리 세우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개명을 알게 해야 한다. 공 · 상을 빨리 권장하여야만 한다. 사신들은 재원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부강의 방책이 장차 어찌 시행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그 시대에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때가 이를 꺼려하였으므로 공은 곧 여러 번 되풀이 하여서 간절하게 명확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황상께서 경진년(고종 17, 1880년)에 증광문과를 통해 공을 뽑았고 임오년(고종 19, 1882년) 봄에 명을 받들어 일본을 유람하였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서 다시 일본에 갔다. 계미년(고종 20, 1883년)에는 대교에 권배되었고, 부수찬 겸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 부응교에 차례로 제배되었으며 경연에 출입하였는데, 주대하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웠다. 임금이 그를 크게 뛰어나다고 여겨 순서를 밟지 않고 크게 쓰려 하였다. 여름에 또한 참찬어봉사로서미주에 가 비로소 교린의 관계를 맺었으며, 갑신년(고종 21, 1884년) 여름에 복명하였다. 6월에 동부승지 내무참의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가을에 병조참의에 임명하였다. 10월에 국가의 변란(갑신정변)을 당하여 일본으로 유입하였다가 옮겨 합중국(미국)에 이르렀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비록 연소하였으나 지절은 더욱 굳어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학에 힘을 쏟아 격치의 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우국 애군의 정성은 10년이 되었건만 하루와 같았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6월에 강린(청나라와 일본)들이 기회를 타서 나라에 큰 난이 있자 임금이 크게 뉘우치게 되었고, 겨울에 특명으로 소설하여 공을 환국시킬 것을 의금부에 명하였다. 공이 또한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곧바로 좋은 비답을 내렸고 이내 명을 내려 입대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예가 더욱 융숭하였고 신임은 한결같았다. 특별히 숭정대부에 올려 법무 대신 판의금사사에 임명하였다. 을미년(고종 32, 1895년) 여름에 관제개정이 있자 다시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장에 임명되어 옥송을 해결하는데 사람들에게 공평하면서도 만족스럽게 하니 모두 그를 따라 마치 겨울에 따뜻한 햇살과 같이 아끼었다. 가을에 옮겨 학부대신이 되어 학교를 창설하여 인재를 배양하였고, 겨울에는 특명전권공사에 제배하여 먼저 미국에 가도록 하였다가 이내 주차를 명하였다. 이때 본국의 학생 10여 인이 일본에서부터 옮겨와 도착하였는데 공이 학업을 잃고 유리되는 것을 근심하여 봉급 2천 원을 내어 학자금으로 하도록 하자 미국인들 또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지금까지 전하여 미담으로 삼고 있다. 병신년(건양 1, 1896년) 봄에 중추원 일등의관에 제배되었으나 미처 복명치 못하고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때가 즉 광무 원년 정유년(1897년) 7월 17일 갑진일이었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 화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부탁하였으니 대저 성감(임금의 감식)에 공의 한결같은 마음을 드리워 밝혀 촛불의 밝히는 바를 다하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능히 성은을 우러러 답하여 연애로 보답하는 것이었다. 대개 소신하고자 한 것은 흔적을 없애고 그 과거를 흘러가도록 한 것일 따름이었다. 무술년(광무 2, 1898년) 봄에 몸이 재가 되어서 나라에 돌아오게 되니 장례를 지냈다. 부인의 정경부인에 추증된 안동김씨로 판서 효정공 병지의 딸이니 정결함과 조용함 그리고 화애로움과 정숙함이 있어 6친이 모두 따랐다. 공보다 23년 앞서 졸하였다. 후배는 정경부인 밀양 박씨로 사인 승헌의 딸이다. 내행은 정순함을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10년간 어려운 사정에 처하였다. 일찍이 어렵고 험난함을 겪었으나 몸을 지켜 삼가고 신칙하여 끝내 여사의 규범을 잃지 않았으니 사람들마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척인 광정의 아들 재덕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오호라! 공은 여러 세대를 통해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국운은 누가 돕고 유지하겠는가? 일치일란이 서로 이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바야흐로 장차 난이 닥쳐오니 하늘은 반드시 뛰어난 인물을 내는 법인데 우러르건대 공이 그 사람이 아닌가 한다. 훤칠하고 빼어나며 엄정하고 천박하지 않은 것은 공의 의용이요, 너그러우면서 후하고 크면서도 깊은 것은 공의 재간과 도량이며, 천하의 큰 정치를 맡아 고요하면서도 근신하여서 지모와 사려는 넓고 조용하였으니 공의 재주와 계책이라 하겠다. 초연함에 이르러서는 세상 물정의 바깥에 있었고, 조용함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였고 다른 곳에서 언급되는 사람을 보더라도 능히 언급하지 못할 바이니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면 공을 아는 것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오호라! 하늘이 내려준 수명은 공에게는 작았고, 모름지기 역사에서 그 쓰임을 다하게 하였다면 공은 대의를 펼쳐 큰 공을 거의 이루었을 것이다. 상천이 대훈을 사랑하지 않아 이루지 못하여 공은 곧 세상에서 묘초만을 얻었을 따름이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어찌 하늘은 공보다 다만 일란에 의심을 둘 따름인가? 이것이 어찌 홀로 공만이 지하에서 한을 품는 것이겠는가? 우러르건대 또한 지사 · 영웅이 천세동안 눈물을 닦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알수 없는 것이니 도라 하겠다. 아아! 슬프도다. 대미국 흠명 주차 대한 편의 행사대신 겸 총영사 안연이 글을 짓고, 사촌 동생 군부 주사 광식이 글을 쓰다. 대한 광무 4년(1900년) 경자년 5월 일 세우다.
 
서광범묘갈 광주 치소의 서쪽에 있는 언주면 비정동 북동동쪽을 4척 정도 등진 곳에 있는 봉분이 고 대한주미공사 위산 서광범의 장지이다. 아! 슬프다. 천도는 분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고, 인사로 오직 알 만한 것이 바로 공의 큰 절개이다. 공은 갑신의 화를 당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어리석음을 한스럽게 여긴 것이 무릇 10년이 되었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여름, 조야에서 점차 공을 불러 살피니 이 해에 심사로 공을 모르는 자는 그 과거를 걱정하였으나 그러한 마음들을 용서하였다. 공을 아는 자들은 그러한 마음을 허락하고 예전의 일들에 대해 묵인하여 주었다. 이에 따라 백세지하에 이르도록 또한 공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모를 수 있겠는가. 이로써 어진 사람이나 군자의 죽음을 보게 되면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울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다. 공의 이름은 광범이고 자는 서구이며 위산은 그의 호이다. 세계는 대구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군기 소윤을 지낸 한의 후예이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이름이 해이고 호가 함재인 분이 학문으로써 명망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성을 낳았다. 성은 판중추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숙의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호는 약봉이다. 그는 선조 때의 명신으로 네 번 스승이 되었고, 영조의 국구 달성부원군 종제는 증시하여 효희공이라 하였으며 또한 두 번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신수는 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중형인 부사로 찬성에 추증된 인수의 둘째 아들인 유녕을 양자로 삼아 후사로 하였다. 그는 예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보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익헌인데 또한 후사가 없어 동생인 군수 증 찬성인 응보의 3남 대순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그는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헌이었다. 상익은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분이 곧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정부인 반남박씨로 생원 제완의 딸이다. 공은 철종 기미년(철종 10, 1859년) 11월 8일에 태어났으니 곧 서력 1859년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그 풍채와 기품이 비범하였으며 재예를 일찍 성취하였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원대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장성하면서는 경사를 섭렵하였으며, 또 각국의 문자를 몰래 연구하여 일찍이 스스로를 ‘사’라고 하였다. 우리 국가가 능히 스스로 기초를 세워 반태의 안정을 정하지 못하였은즉 황천이 우리에게 내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개연히 걱정하여 탄식하는 뜻이 있었다. 갑자기 나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고는 일찍이 말하길 “군주의 권력은 제한되어야만 한다. 백성의 뜻은 반드시 일치단결되어야만 한다. 관제는 빨리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는 명실상부한 것이어야 한다. 학교는 빨리 널리 세우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개명을 알게 해야 한다. 공 · 상을 빨리 권장하여야만 한다. 사신들은 재원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부강의 방책이 장차 어찌 시행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그 시대에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때가 이를 꺼려하였으므로 공은 곧 여러 번 되풀이 하여서 간절하게 명확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황상께서 경진년(고종 17, 1880년)에 증광문과를 통해 공을 뽑았고 임오년(고종 19, 1882년) 봄에 명을 받들어 일본을 유람하였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서 다시 일본에 갔다. 계미년(고종 20, 1883년)에는 대교에 권배되었고, 부수찬 겸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 부응교에 차례로 제배되었으며 경연에 출입하였는데, 주대하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웠다. 임금이 그를 크게 뛰어나다고 여겨 순서를 밟지 않고 크게 쓰려 하였다. 여름에 또한 참찬어봉사로서미주에 가 비로소 교린의 관계를 맺었으며, 갑신년(고종 21, 1884년) 여름에 복명하였다. 6월에 동부승지 내무참의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가을에 병조참의에 임명하였다. 10월에 국가의 변란(갑신정변)을 당하여 일본으로 유입하였다가 옮겨 합중국(미국)에 이르렀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비록 연소하였으나 지절은 더욱 굳어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학에 힘을 쏟아 격치의 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우국 애군의 정성은 10년이 되었건만 하루와 같았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6월에 강린(청나라와 일본)들이 기회를 타서 나라에 큰 난이 있자 임금이 크게 뉘우치게 되었고, 겨울에 특명으로 소설하여 공을 환국시킬 것을 의금부에 명하였다. 공이 또한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곧바로 좋은 비답을 내렸고 이내 명을 내려 입대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예가 더욱 융숭하였고 신임은 한결같았다. 특별히 숭정대부에 올려 법무 대신 판의금사사에 임명하였다. 을미년(고종 32, 1895년) 여름에 관제개정이 있자 다시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장에 임명되어 옥송을 해결하는데 사람들에게 공평하면서도 만족스럽게 하니 모두 그를 따라 마치 겨울에 따뜻한 햇살과 같이 아끼었다. 가을에 옮겨 학부대신이 되어 학교를 창설하여 인재를 배양하였고, 겨울에는 특명전권공사에 제배하여 먼저 미국에 가도록 하였다가 이내 주차를 명하였다. 이때 본국의 학생 10여 인이 일본에서부터 옮겨와 도착하였는데 공이 학업을 잃고 유리되는 것을 근심하여 봉급 2천 원을 내어 학자금으로 하도록 하자 미국인들 또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지금까지 전하여 미담으로 삼고 있다. 병신년(건양 1, 1896년) 봄에 중추원 일등의관에 제배되었으나 미처 복명치 못하고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때가 즉 광무 원년 정유년(1897년) 7월 17일 갑진일이었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 화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부탁하였으니 대저 성감(임금의 감식)에 공의 한결같은 마음을 드리워 밝혀 촛불의 밝히는 바를 다하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능히 성은을 우러러 답하여 연애로 보답하는 것이었다. 대개 소신하고자 한 것은 흔적을 없애고 그 과거를 흘러가도록 한 것일 따름이었다. 무술년(광무 2, 1898년) 봄에 몸이 재가 되어서 나라에 돌아오게 되니 장례를 지냈다. 부인의 정경부인에 추증된 안동김씨로 판서 효정공 병지의 딸이니 정결함과 조용함 그리고 화애로움과 정숙함이 있어 6친이 모두 따랐다. 공보다 23년 앞서 졸하였다. 후배는 정경부인 밀양 박씨로 사인 승헌의 딸이다. 내행은 정순함을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10년간 어려운 사정에 처하였다. 일찍이 어렵고 험난함을 겪었으나 몸을 지켜 삼가고 신칙하여 끝내 여사의 규범을 잃지 않았으니 사람들마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척인 광정의 아들 재덕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오호라! 공은 여러 세대를 통해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국운은 누가 돕고 유지하겠는가? 일치일란이 서로 이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바야흐로 장차 난이 닥쳐오니 하늘은 반드시 뛰어난 인물을 내는 법인데 우러르건대 공이 그 사람이 아닌가 한다. 훤칠하고 빼어나며 엄정하고 천박하지 않은 것은 공의 의용이요, 너그러우면서 후하고 크면서도 깊은 것은 공의 재간과 도량이며, 천하의 큰 정치를 맡아 고요하면서도 근신하여서 지모와 사려는 넓고 조용하였으니 공의 재주와 계책이라 하겠다. 초연함에 이르러서는 세상 물정의 바깥에 있었고, 조용함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였고 다른 곳에서 언급되는 사람을 보더라도 능히 언급하지 못할 바이니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면 공을 아는 것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오호라! 하늘이 내려준 수명은 공에게는 작았고, 모름지기 역사에서 그 쓰임을 다하게 하였다면 공은 대의를 펼쳐 큰 공을 거의 이루었을 것이다. 상천이 대훈을 사랑하지 않아 이루지 못하여 공은 곧 세상에서 묘초만을 얻었을 따름이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어찌 하늘은 공보다 다만 일란에 의심을 둘 따름인가? 이것이 어찌 홀로 공만이 지하에서 한을 품는 것이겠는가? 우러르건대 또한 지사 · 영웅이 천세동안 눈물을 닦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알수 없는 것이니 도라 하겠다. 아아! 슬프도다. 대미국 흠명 주차 대한 편의 행사대신 겸 총영사 안연이 글을 짓고, 사촌 동생 군부 주사 광식이 글을 쓰다. 대한 광무 4년(1900년) 경자년 5월 일 세우다.
 +
 +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 [[개화파]] 사상가.갑신정변의 주역.
 +
 +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조선)|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
 +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
 +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
 +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
 +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고려)|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고려8)|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
 +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https://open.kakao.com/o/gBQB1q6c]]
 +
 +
== 가족 ==
 +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섭(조선)|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조선)|서원]](徐遠 생원(生員)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고려3)|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조선)|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서후)|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조선)|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대]](徐岱 장사랑)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엄]](徐崦 학자)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조선)|서해]](徐嶰 학자)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조선)|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조선)|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문중(조선)|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수(조선)|서형수]](徐景需 전첨)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백(조선)|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 고고조할아버지: [[서신수]](徐信修 증 좌찬성)
 +
************************ 고조할아버지: [[서유녕]](徐有寧 이조판서 정2품)
 +
************************* 증조할아버지: [[서용보]](徐龍輔 영의정 정1품)
 +
************************** 할아버지:[[서대순]](徐戴淳 한성부판윤 정2품)
 +
*************************** 아버지:[[서상익]](徐相翊 이조참판 종2품)
 +
**************************** 본인:[[서광범]](徐光範 법무대신)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택리]](徐擇履)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상리]](徐祥履)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리]](徐匡履)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홍리]](徐弘履)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탄리]](徐坦履)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빈]](徐景霦 현감)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주(서경주)|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서정리)|서정리]](徐貞履 부사)
 +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상]](徐文尙) 병조 참의)
 +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종태]] (徐宗泰 영의정 정1품)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서명균]] (徐命均 좌의정 정1품)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지수]] (徐志修 영의정 정1품)
 +
************************ 작은고조할아버지:[[서유신]](徐有臣 대제학 정2품)
 +
************************* 작은증조할아버지:[[서영보(조선)|서영보]](徐榮輔 대제학 정2품)
 +
************************** 작은할아버지: [[서기순]](徐箕淳 대제학 정2품)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무수]](徐懋修 학자)
 +
************************ 작은고조할아버지:[[서유돈]](徐有敦 현감)
 +
************************* 작은증조할아버지:[[서당보]](徐堂輔 영의정 정1품)
 +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유]](徐文裕 부사)
 +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 이조판서 정2품)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서명익]](徐命翼 이조판서 정2품)
 +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호수]](徐浩修 이조판서 정2품)
 +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유구]](徐有榘 대제학 정2품)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응]] (徐命膺 대제학 정2품)
 +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선]] (徐命善 영의정 정1품)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조선)|서정리]](徐正履 좌랑)
 +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진리(조선)|서진리]](徐晉履 직장)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조선2)|서영]](徐嶸 서흥파(瑞興)
 +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 문하시중 종1품 이천백)
 +
 +
== 생애 ==
 +
===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전 ===
 +
1859년 11월 8일 평안감사 사택[* 당시 평안감사 사택은 [[평안도]]의 중심지였던 [[평양직할시|평양]]에 있었다.]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서상익]]과 생원 [[박제완]]의 딸 [[반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정조(조선)|정조]] 때의 [[문관]]이자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정약용]]의 앞날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인물이다.]
 +
 +
소년기에 [[안동 김씨]] 김병지[* 세도가였던 [[김조순]]의 손자이자 김조순의 차남 [[김원근]]의 아들.]의 딸과 [[결혼]]했으나 부인이 [[요절]]하면서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첫 부인이 안동 김씨였던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김옥균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가 [[친척]]인 [[박규수]]의 집을 함께 출입하게 되면서 동시에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
 +
1880년([[고종(대한제국)|고종]] 1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홍문관 부응교, [[세자]] 시강원 사서·세자 시강원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南學敎授), 부응교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는데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7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9월에는 임오군란 뒤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금]] 청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자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때 박영효의 권고로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잔류해 별도의 시찰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함께 남아 일본을 돌아보고 1883년 3월에 귀국하였다.
 +
 +
1883년 규장각대교(待敎)에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을 겸하였다. [[보빙사]](報聘使)가 최초로 [[미국]]에 파견될 때 보빙 전권 대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미국에 갔고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와도 면담하였다.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884년 1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당연하게도 [[서양]]의 선진 문물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와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84년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와 내무참의(內務參議), 8월에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
 +
=== [[갑신정변]](甲申政變) ===
 +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
 +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
 +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
 +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
 +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
 +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 협회|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
 +
=== 갑오개혁 ===
 +
[[1894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법무대신으로 참여하였다. 2차 [[갑오개혁]]과 [[1895년]]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특히 재판 제도 및 형벌의 개혁, 근대적 법학 교육 실시 등을 제안하였다.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조선)|김윤식]], 김홍집과 함께 [[단발령]]을 도입하기도 했다.
 +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 당시에 재판장을 맡기도 했다. 허나 이 재판에서 그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사실상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를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린 건 선구자적인 면모가 드러난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는 참으로 불합리적이다.
 +
 +
다만 이에 대한 쉴드를 굳이 쳐주자면, 조선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저항권]]이란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국민에게 인정되는 권리인데, 당연히 조선 시대에는 그런 개념 따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전제 군주제 자체가 이미 민주적 기본 질서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도 후세에 붙여진 것 뿐이고, 당시에는 그냥 수많은 반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
 +
즉, 당시 법 체계 하에서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은 반란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는데, 5.18 민주화 운동의 경우에는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항권 행사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반란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19세기의 동학 농민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역사를 실증학적이 아닌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 역시 현재엔 통용될 수 있는 말이긴 하다.
 +
 +
=== 도미와 최후 ===
 +
1895년 제4차 김홍집 내각(1895년 10월)에서는 학부 대신에 기용되었다가, 친러, 친일 양쪽의 이해 관계에 의해 12월 11일에는 주미 특명 전권 공사로 일종의 좌천이 되었다. 이때 미국의 로노크 대학은 [[김규식]]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로노크 대학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고, 대학에서도 주미국 조선 공사인 그에게 명예 법학 석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년 2월)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
 +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되지 못했고, 조선으로 귀국하지도 못했다. 1896년 6월 20일엔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지만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시민권이 있으니 망명이라기보단 걍 눌러앉았다고 봐도 될듯.
 +
 +
그러다 얼마 안된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골은 1898년 봄 본국으로 송환되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碑井洞) 산31(현 서울 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89-10) 야산에 유교 식으로 다시 장사 지냈다. 현재는 해당위치에 서울 강남개발을 통해 음식점이 들어서있으며, 묘는 몇번의 이장끝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198 야산에 안장되었다.
 +
 +
== 여담 ==
 +
비교적 일찍 요절해서 그런지 역사책에선 [[갑신정변]] 부분에서만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다. 허나 알고 보면 현대에도 꽤나 영향력을 끼친 사람인데, 일단 조선에서 최초로 (1881년부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국내 최초의 [[성경]] 번역자'''이기도 했다.
 +
 +
상술했듯 1892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시 [[유럽]]과 [[북아메리카|북미]], [[인도]] 등지에서 유행하던 신흥 종교인 [[신지학 협회]]에 귀의하기도 했다.
 +
 +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박용진]]이 분했다. 갑신정변 당시 청군이 처들어오자 직접 칼을 들고 무쌍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
 +
 +
== [[개화당]](開化黨) ==
 +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
 +
== [[조선 최초 양복 입은 - 서광범(徐光範)]] ==
 +
서양 사람의 옷이라고 정의되는 ‘양복’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초로 접한 것은 17C 초다.
 +
1627년 네덜란드인 벨트브레가 항해 중에 파선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서울로 호송되면서 비록
 +
선원의 복장이긴 하지만, 그때의 옷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초로 접한 양복인 셈이다.
 +
 +
== [[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 ==
 +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삼일로29번길 20 양주문화원
 +
 +
== [[대한민국 태극기]](太極旗) ==
 +
1881년 8월 9일 특명전권 대사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도일할 때, 당장 게양하여야 할 국기가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일(渡日)하기 전에 이미 조정에서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사괘(太極四掛)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한 것에 의견을 모아 박영효가 타고 간 일본 선박 메이지 마루(明治丸)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 때 메이지 마루에는 후일 개화당의 주역이었던 [[서광범]](徐光範), 김옥균(金玉均) 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에 고요(神戶)에 도착, 나 시 무라야(西村屋)에서 숙소를 정하고 이 건물 옥상에다 배 안에서 만든 태극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하였으니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로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일이다.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
 +
== [[이섭대천]](利涉大川) ==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 같이 보기 ==
 +
* [[이천 서씨]]
 +
* [[대구 서씨]]
 +
* [[달성 서씨]]
 +
* [[부여 서씨]]
 +
* [[연산 서씨]]
 +
* [[남양 서씨]]
 +
* [[당성 서씨]]
 +
* [[봉성 서씨]]
 +
* [[절강 서씨]]
 +
* [[중국 서씨]]
 +
* [[일본 서씨]]

2024년 6월 29일 (토) 19:04 기준 최신판

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

시대: 대한제국 연대1900년(고종37년) 유형비문크기: 높이 135cm, 너비 60cm, 두께 20cm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삼일로29번길 20 양주문화원 서체: 해서(楷書)찬자 /각자 /서자안연(安連) / 미상 / 서광식(徐光軾)


개관

이 비는 1900년(광무 4년) 경기도 양주에 건립된 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로 안연(安連)이 비문을 지었고, 서광식(徐光軾)이 글씨를 썼다.서광범(徐光範 : 1859~1897년)의 본관은 대구 서씨이고, 자는 서구(敍九)이며, 호는 위산(緯山)이다. 1880년(고종 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을 건너감에 수행, 문물제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을 계획했다.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소장층들과 집권층인 수구당(守舊黨) 제거를 획책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었으나 사흘 만에 와해되자 일본에 망명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후 제 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으나 친로파(親露派) 및 사대수구파(事大守舊派)와 대립되어 그들의 압력으로 주미공사(駐美公使)로 부임한 후 임지에서 죽었다. 사적으로 시호를 내린 것은 익헌(翼獻)이다.현재 탁본은 양주문화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徐光範墓碣 維廣州治西彦周面碑井洞負寅四尺而封者故大韓駐美公使緯山徐公衣履之藏也嗚呼天道不可不知而惟可知者公之大節也盖公當 甲申之禍逃竄海外茹恨䵝昧者凡十周歲而至甲午夏朝野稍稍有徵察公當年心事不知公者憫其跡而原其心知公者許其心而撫其跡 從玆以往百世之下又不知以公爲何如人也由此觀之仁人君子之終不可誣有如是夫公諱光範字敘九緯山其號也系出大邱高麗軍器 少尹閈之後入 本朝有諱嶰號涵齋以學問有重名寔生諱渻判中樞府事 贈領議政諡忠肅號藥峯爲 穆陵名臣四傅而爲 元陵國 舅達城府院君諱宗悌諡孝僖又再傅而諱信修 贈贊成無嗣取仲兄府使 贈贊成諱仁修苐二男有寧爲後禮曹判書 贈上相諱龍輔 領議政諡翼獻亦無嗣取弟郡守 贈贊成應輔第三男戴淳爲後禮曹判書諡孝憲諱相翊吏曹叅判是爲公皇考妣貞夫人潘南朴氏生員 齊完女也 哲宗己未十一月八日生卽西曆一千八百五十九年也公生而姿品非凡才藝夙就見者咸期以遠大長而涉獵經史且潛究各 國文字嘗自以謂使我國家不能成自立基礎奠之於磐泰之安則決非皇天賦予之意也慨然憂歎之志造次靡懈嘗曰君權不得不限也民 志不得不壹也官制亟宜改革使名實相孚焉學校亟宜廣設使民智開明焉工商亟宜勸奬使財源導引焉不如此富强之術將何所施焉此 皆當世時諱而公則娓娓惓惓不明不措也 皇上庚辰擢增廣文科壬午春奉 命遊覽日本八月以叅贊官再往日本癸未圈拜待敎歷拜 副修撰兼司書兼弼善南學敎授副應敎出入經幄奏對如流 上大奇之亟欲不次大用夏又以叅贊啣奉使美洲始修交隣之誼甲申夏復 命六月特 除同副承旨內務叅議秋拜兵曹叅議十月當國家之變流入日本轉至合衆國時公年雖少而志節益堅不撓專力於政治之學 以及格致之科而憂國愛 君之誠盖十年如一日也甲午六月强隣乘釁國有大亂 上大悔之冬特 命昭雪還國公胥 命金吾又陳疏 請罪 上卽不優批仍 命入對自是禮遇隆而信任專特陞崇政階任法務大臣判義禁司事乙未夏官制改正復任法部大臣兼高等裁判 長決獄平允人咸比之以冬日可愛秋移學部大臣刱設學校培養人材冬拜特命全權公使前往美國仍 命駐箚時有本國學生十餘人自 日本轉至者公憫其失學流離捐俸銀二千元以爲學資美人亦無不感歎至今傳爲美談丙申春拜中樞院一等議官未及復 命而卒卽光 武元年丁酉七月十七日甲辰也公臨歿以火葬遺囑大抵 聖鑑垂明公之秉心悉所烱燭而竟未能仰答 聖恩以報涓埃盖欲燒身滅跡 湥引其過而已戊戌春以身灰返國而葬配 贈貞敬夫人安東金氏判書孝貞公炳地女貞靜和淑六親咸服先公二十三年卒後配貞敬夫 人密陽朴氏士人承憲女內行純備不幸十年處困備嘗艱險而持身謹飭終不失女士之範人莫不稱之取族人光鼎子載德爲後嗚呼公間 世人也世道國步誰爲扶持一治一亂相承而不已方其將亂而天必生能弭之人枊公非其人耶頎秀凝遠公之容儀也寬厚宏湥公之局量 也樞機靜毖而謀廬宥密公之才猷也至若超然物外澹然理內見人所不及見處言人所不能言者非天之生知公其孰能如此嗚呼天假之 年使公少須曳以訖其庸則其伸大義成大功庶幾於萬一上天不仁大勳未底而公則就世墓草已屢宿矣豈天之於公只擬於一亂而已耶 此奚獨公之飮恨於泉下抑亦志士英雄抆淚於千載之下也然是不可與不知者道也噫 大美國欽命駐箚大韓便宜行事大臣兼總領事安連撰 四寸弟軍部主事光軾書 大韓光武四年庚子五月 日立

서광범묘갈 광주 치소의 서쪽에 있는 언주면 비정동 북동동쪽을 4척 정도 등진 곳에 있는 봉분이 고 대한주미공사 위산 서광범의 장지이다. 아! 슬프다. 천도는 분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이고, 인사로 오직 알 만한 것이 바로 공의 큰 절개이다. 공은 갑신의 화를 당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어리석음을 한스럽게 여긴 것이 무릇 10년이 되었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여름, 조야에서 점차 공을 불러 살피니 이 해에 심사로 공을 모르는 자는 그 과거를 걱정하였으나 그러한 마음들을 용서하였다. 공을 아는 자들은 그러한 마음을 허락하고 예전의 일들에 대해 묵인하여 주었다. 이에 따라 백세지하에 이르도록 또한 공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모를 수 있겠는가. 이로써 어진 사람이나 군자의 죽음을 보게 되면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울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다. 공의 이름은 광범이고 자는 서구이며 위산은 그의 호이다. 세계는 대구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군기 소윤을 지낸 한의 후예이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이름이 해이고 호가 함재인 분이 학문으로써 명망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성을 낳았다. 성은 판중추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숙의 시호를 추증 받았으며 호는 약봉이다. 그는 선조 때의 명신으로 네 번 스승이 되었고, 영조의 국구 달성부원군 종제는 증시하여 효희공이라 하였으며 또한 두 번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신수는 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중형인 부사로 찬성에 추증된 인수의 둘째 아들인 유녕을 양자로 삼아 후사로 하였다. 그는 예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용보는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익헌인데 또한 후사가 없어 동생인 군수 증 찬성인 응보의 3남 대순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그는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헌이었다. 상익은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이분이 곧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정부인 반남박씨로 생원 제완의 딸이다. 공은 철종 기미년(철종 10, 1859년) 11월 8일에 태어났으니 곧 서력 1859년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그 풍채와 기품이 비범하였으며 재예를 일찍 성취하였으니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원대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장성하면서는 경사를 섭렵하였으며, 또 각국의 문자를 몰래 연구하여 일찍이 스스로를 ‘사’라고 하였다. 우리 국가가 능히 스스로 기초를 세워 반태의 안정을 정하지 못하였은즉 황천이 우리에게 내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개연히 걱정하여 탄식하는 뜻이 있었다. 갑자기 나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고는 일찍이 말하길 “군주의 권력은 제한되어야만 한다. 백성의 뜻은 반드시 일치단결되어야만 한다. 관제는 빨리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는 명실상부한 것이어야 한다. 학교는 빨리 널리 세우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개명을 알게 해야 한다. 공 · 상을 빨리 권장하여야만 한다. 사신들은 재원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부강의 방책이 장차 어찌 시행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그 시대에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때가 이를 꺼려하였으므로 공은 곧 여러 번 되풀이 하여서 간절하게 명확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황상께서 경진년(고종 17, 1880년)에 증광문과를 통해 공을 뽑았고 임오년(고종 19, 1882년) 봄에 명을 받들어 일본을 유람하였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서 다시 일본에 갔다. 계미년(고종 20, 1883년)에는 대교에 권배되었고, 부수찬 겸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 부응교에 차례로 제배되었으며 경연에 출입하였는데, 주대하는 것이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러웠다. 임금이 그를 크게 뛰어나다고 여겨 순서를 밟지 않고 크게 쓰려 하였다. 여름에 또한 참찬어봉사로서미주에 가 비로소 교린의 관계를 맺었으며, 갑신년(고종 21, 1884년) 여름에 복명하였다. 6월에 동부승지 내무참의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가을에 병조참의에 임명하였다. 10월에 국가의 변란(갑신정변)을 당하여 일본으로 유입하였다가 옮겨 합중국(미국)에 이르렀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비록 연소하였으나 지절은 더욱 굳어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학에 힘을 쏟아 격치의 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우국 애군의 정성은 10년이 되었건만 하루와 같았다. 갑오년(고종 31, 1894년) 6월에 강린(청나라와 일본)들이 기회를 타서 나라에 큰 난이 있자 임금이 크게 뉘우치게 되었고, 겨울에 특명으로 소설하여 공을 환국시킬 것을 의금부에 명하였다. 공이 또한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곧바로 좋은 비답을 내렸고 이내 명을 내려 입대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예가 더욱 융숭하였고 신임은 한결같았다. 특별히 숭정대부에 올려 법무 대신 판의금사사에 임명하였다. 을미년(고종 32, 1895년) 여름에 관제개정이 있자 다시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장에 임명되어 옥송을 해결하는데 사람들에게 공평하면서도 만족스럽게 하니 모두 그를 따라 마치 겨울에 따뜻한 햇살과 같이 아끼었다. 가을에 옮겨 학부대신이 되어 학교를 창설하여 인재를 배양하였고, 겨울에는 특명전권공사에 제배하여 먼저 미국에 가도록 하였다가 이내 주차를 명하였다. 이때 본국의 학생 10여 인이 일본에서부터 옮겨와 도착하였는데 공이 학업을 잃고 유리되는 것을 근심하여 봉급 2천 원을 내어 학자금으로 하도록 하자 미국인들 또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지금까지 전하여 미담으로 삼고 있다. 병신년(건양 1, 1896년) 봄에 중추원 일등의관에 제배되었으나 미처 복명치 못하고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때가 즉 광무 원년 정유년(1897년) 7월 17일 갑진일이었다. 공은 죽음에 임하여 화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부탁하였으니 대저 성감(임금의 감식)에 공의 한결같은 마음을 드리워 밝혀 촛불의 밝히는 바를 다하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능히 성은을 우러러 답하여 연애로 보답하는 것이었다. 대개 소신하고자 한 것은 흔적을 없애고 그 과거를 흘러가도록 한 것일 따름이었다. 무술년(광무 2, 1898년) 봄에 몸이 재가 되어서 나라에 돌아오게 되니 장례를 지냈다. 부인의 정경부인에 추증된 안동김씨로 판서 효정공 병지의 딸이니 정결함과 조용함 그리고 화애로움과 정숙함이 있어 6친이 모두 따랐다. 공보다 23년 앞서 졸하였다. 후배는 정경부인 밀양 박씨로 사인 승헌의 딸이다. 내행은 정순함을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10년간 어려운 사정에 처하였다. 일찍이 어렵고 험난함을 겪었으나 몸을 지켜 삼가고 신칙하여 끝내 여사의 규범을 잃지 않았으니 사람들마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척인 광정의 아들 재덕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오호라! 공은 여러 세대를 통해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와 국운은 누가 돕고 유지하겠는가? 일치일란이 서로 이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바야흐로 장차 난이 닥쳐오니 하늘은 반드시 뛰어난 인물을 내는 법인데 우러르건대 공이 그 사람이 아닌가 한다. 훤칠하고 빼어나며 엄정하고 천박하지 않은 것은 공의 의용이요, 너그러우면서 후하고 크면서도 깊은 것은 공의 재간과 도량이며, 천하의 큰 정치를 맡아 고요하면서도 근신하여서 지모와 사려는 넓고 조용하였으니 공의 재주와 계책이라 하겠다. 초연함에 이르러서는 세상 물정의 바깥에 있었고, 조용함에 이르러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안에 있었다.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였고 다른 곳에서 언급되는 사람을 보더라도 능히 언급하지 못할 바이니 하늘이 낸 인물이 아니라면 공을 아는 것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오호라! 하늘이 내려준 수명은 공에게는 작았고, 모름지기 역사에서 그 쓰임을 다하게 하였다면 공은 대의를 펼쳐 큰 공을 거의 이루었을 것이다. 상천이 대훈을 사랑하지 않아 이루지 못하여 공은 곧 세상에서 묘초만을 얻었을 따름이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어찌 하늘은 공보다 다만 일란에 의심을 둘 따름인가? 이것이 어찌 홀로 공만이 지하에서 한을 품는 것이겠는가? 우러르건대 또한 지사 · 영웅이 천세동안 눈물을 닦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알수 없는 것이니 도라 하겠다. 아아! 슬프도다. 대미국 흠명 주차 대한 편의 행사대신 겸 총영사 안연이 글을 짓고, 사촌 동생 군부 주사 광식이 글을 쓰다. 대한 광무 4년(1900년) 경자년 5월 일 세우다.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 개화파 사상가.갑신정변의 주역.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대(徐岱 장사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엄(徐崦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徐嶰 학자)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형수(徐景需 전첨)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고고조할아버지: 서신수(徐信修 증 좌찬성)
                                                • 고조할아버지: 서유녕(徐有寧 이조판서 정2품)
                                                  • 증조할아버지: 서용보(徐龍輔 영의정 정1품)
                                                    • 할아버지:서대순(徐戴淳 한성부판윤 정2품)
                                                      • 아버지:서상익(徐相翊 이조참판 종2품)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택리(徐擇履)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상리(徐祥履)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리(徐匡履)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홍리(徐弘履)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탄리(徐坦履)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빈(徐景霦 현감)
                                    • 작은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徐貞履 부사)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상(徐文尙) 병조 참의)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종태 (徐宗泰 영의정 정1품)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서명균 (徐命均 좌의정 정1품)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지수 (徐志修 영의정 정1품)
                                                • 작은고조할아버지:서유신(徐有臣 대제학 정2품)
                                                  • 작은증조할아버지:서영보(徐榮輔 대제학 정2품)
                                                    • 작은할아버지: 서기순(徐箕淳 대제학 정2품)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무수(徐懋修 학자)
                                                • 작은고조할아버지:서유돈(徐有敦 현감)
                                                  • 작은증조할아버지:서당보(徐堂輔 영의정 정1품)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유(徐文裕 부사)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종옥(徐宗玉 이조판서 정2품)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서명익(徐命翼 이조판서 정2품)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호수(徐浩修 이조판서 정2품)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유구(徐有榘 대제학 정2품)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응 (徐命膺 대제학 정2품)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명선 (徐命善 영의정 정1품)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정리(徐正履 좌랑)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진리(徐晉履 직장)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嶸 서흥파(瑞興)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 문하시중 종1품 이천백)

생애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전

1859년 11월 8일 평안감사 사택[* 당시 평안감사 사택은 평안도의 중심지였던 평양에 있었다.]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서상익과 생원 박제완의 딸 반남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정조 때의 문관이자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정약용의 앞날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인물이다.]

소년기에 안동 김씨 김병지[* 세도가였던 김조순의 손자이자 김조순의 차남 김원근의 아들.]의 딸과 결혼했으나 부인이 요절하면서 광산 김씨재혼하였다. 첫 부인이 안동 김씨였던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김옥균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가 친척박규수의 집을 함께 출입하게 되면서 동시에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0년(고종 1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해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홍문관 부응교, 세자 시강원 사서·세자 시강원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南學敎授), 부응교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 도쿄로 건너갔는데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7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9월에는 임오군란 뒤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금 청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자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때 박영효의 권고로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잔류해 별도의 시찰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함께 남아 일본을 돌아보고 1883년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규장각대교(待敎)에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을 겸하였다. 보빙사(報聘使)가 최초로 미국에 파견될 때 보빙 전권 대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미국에 갔고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와도 면담하였다.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884년 1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당연하게도 서양의 선진 문물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와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84년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와 내무참의(內務參議), 8월에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 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박영효(반남 박씨)의 '영(泳)'자 항렬은 '승(勝)'[* 이건 근거없는 풍문으로 반남 박씨 족보 을유보(乙酉譜, 1825년 발행)에는 이때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적혀 있었다. 갑신정변(1884년)이 발생한지 약 60년 전에 이미 '승(勝)'자 항렬이 정해져 있었으며 박영효의 집안인 오창공파 금양위 분서공 박미(朴瀰)의 자손들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泳자 항렬을 사용했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및 워싱턴 D.C.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갑오개혁

1894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법무대신으로 참여하였다. 2차 갑오개혁1895년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특히 재판 제도 및 형벌의 개혁, 근대적 법학 교육 실시 등을 제안하였다.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김홍집과 함께 단발령을 도입하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 당시에 재판장을 맡기도 했다. 허나 이 재판에서 그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사실상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를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린 건 선구자적인 면모가 드러난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는 참으로 불합리적이다.

다만 이에 대한 쉴드를 굳이 쳐주자면, 조선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저항권이란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국민에게 인정되는 권리인데, 당연히 조선 시대에는 그런 개념 따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전제 군주제 자체가 이미 민주적 기본 질서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도 후세에 붙여진 것 뿐이고, 당시에는 그냥 수많은 반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당시 법 체계 하에서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은 반란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는데, 5.18 민주화 운동의 경우에는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항권 행사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반란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19세기의 동학 농민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만 역사를 실증학적이 아닌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 역시 현재엔 통용될 수 있는 말이긴 하다.

도미와 최후

1895년 제4차 김홍집 내각(1895년 10월)에서는 학부 대신에 기용되었다가, 친러, 친일 양쪽의 이해 관계에 의해 12월 11일에는 주미 특명 전권 공사로 일종의 좌천이 되었다. 이때 미국의 로노크 대학은 김규식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로노크 대학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고, 대학에서도 주미국 조선 공사인 그에게 명예 법학 석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년 2월)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되지 못했고, 조선으로 귀국하지도 못했다. 1896년 6월 20일엔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지만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시민권이 있으니 망명이라기보단 걍 눌러앉았다고 봐도 될듯.

그러다 얼마 안된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골은 1898년 봄 본국으로 송환되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碑井洞) 산31(현 서울 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89-10) 야산에 유교 식으로 다시 장사 지냈다. 현재는 해당위치에 서울 강남개발을 통해 음식점이 들어서있으며, 묘는 몇번의 이장끝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198 야산에 안장되었다.

여담

비교적 일찍 요절해서 그런지 역사책에선 갑신정변 부분에서만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다. 허나 알고 보면 현대에도 꽤나 영향력을 끼친 사람인데, 일단 조선에서 최초로 (1881년부터)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이 사람이다. 그리고 국내 최초의 성경 번역자이기도 했다.

상술했듯 1892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시 유럽북미, 인도 등지에서 유행하던 신흥 종교인 신지학 협회에 귀의하기도 했다.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박용진이 분했다. 갑신정변 당시 청군이 처들어오자 직접 칼을 들고 무쌍을 찍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개화당(開化黨)

1874년(고종11)경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중심이 되어 개화 정책을 추구한 정치 집단.

조선 최초 양복 입은 - 서광범(徐光範)

서양 사람의 옷이라고 정의되는 ‘양복’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초로 접한 것은 17C 초다. 1627년 네덜란드인 벨트브레가 항해 중에 파선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서울로 호송되면서 비록 선원의 복장이긴 하지만, 그때의 옷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초로 접한 양복인 셈이다.

서광범묘갈(徐光範墓碣)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삼일로29번길 20 양주문화원

대한민국 태극기(太極旗)

1881년 8월 9일 특명전권 대사 겸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도일할 때, 당장 게양하여야 할 국기가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일(渡日)하기 전에 이미 조정에서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정도 찬성을 본 국기의 도안 내용을 다소 수정한, 태극사괘(太極四掛)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게양한 것에 의견을 모아 박영효가 타고 간 일본 선박 메이지 마루(明治丸)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 때 메이지 마루에는 후일 개화당의 주역이었던 서광범(徐光範), 김옥균(金玉均) 등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에 고요(神戶)에 도착, 나 시 무라야(西村屋)에서 숙소를 정하고 이 건물 옥상에다 배 안에서 만든 태극사괘가 그려진 기를 게양하였으니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로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일이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