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杜門洞) 72현
杜門洞七十二賢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서중보(徐仲輔-직제학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서보(徐輔-공조전서 본관;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광준(徐光俊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장령 서견(徐甄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성사제(成思齊) 이경(李瓊)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곳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종 때 설과(設科)를 했는데, 이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하였으므로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정조 때에 와서야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
정조 대 1783년, 당시 개경부유수였던 서유방(徐有防)이 두문동 72인 중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孟)씨(이름이 전해지지 않음) 세 명을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그대로 배향이 시행되었다. 이후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알려지면서부터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하게 되었다.
조선의 새 임금 태조는 그들을 미워해서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선비의 학업은 닦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후에 유명해진 개성상인1)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300년 이래로 개성에는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고, 경성의 사대부들도 개성에 가서 사는 사람이 없었다. 『택리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더욱 괘씸한 것은 정도전이 목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고려 말기에 재상 반열에 있으면서 왕검과 저연이 하던 짓을 따른 일이다. 나라를 팔아서 제 자신의 사리를 채우고 스승을 해하며 벗을 죽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려가 망하자 또 왕씨의 종친을 없애기 위한 꾀를 내었다. 즉 자연도(紫燕島)에 귀양 보낸다는 말로 속인 후 큰 배에다 왕씨들을 가득 태워 바다에 띄운 다음, 비밀리에 배 밑에 구멍을 파서 가라앉게 한 것이다. 당시 왕씨와 친하게 지내던 스님 하나가 언덕에서 내려다보았는데 왕씨 중의 한 사람이 이런 시를 읊었다.
천천히 젓는 노 소리 푸른 물결 위인데, 비록 산승이 있다 하나 네 어이하리.
조선을 창업하는 데는 일등공신이었으면서도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처세에 능한 모사가’, ‘아예 없었어야 할 사람’으로 평가된 채 역사의 물밑 속으로 잠긴 삼봉(三峰) 정도전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영광은 이씨 왕조에게, 오욕은 삼봉 정도전에게 씌워야 할까?
서중보(徐仲輔)
고려 문신. 직제학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외부와 차단하며 모여 살던 곳.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서중보(徐仲輔-직제학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서보(徐輔-공조전서 본관;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광준(徐光俊 본관; 이천서씨(利川徐氏) 장령 서견(徐甄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성사제(成思齊) 이경(李瓊)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곳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종 때 설과(設科)를 했는데, 이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하였으므로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1740년 영조는 이곳을 지나면서(영조 16년 9월) 승지에게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시를 짓게 하였다. 칠언시 한귀를 지어 올렸다.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 왕을 따르는 선비들이 이에 이어서 시를 지었다. 왕은 직접 '부조현' 세 글자를 써주고 그곳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1751년(영조 27년 9월) 영조는 고려 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어필로써 "고려 충신의 명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에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14자를 써주고 비를 세우도록 하명하였다.
이어서, 두문동 72인 가운데 임(林), 조(曺) 두 성만이 남아있다고 하니, 그들 가운데서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조용(調用)하라고 하였다. 1768년(영조 44년 11)에는 중국이나 조선이나 각 왕조에는 제왕의 묘(廟)가 있으니 이를 모시는 일에 충실함을 강조하고, 부조현 후손들을 조용(調用)하고 그곳의 제단을 다른 곳의 단(壇)과 함께 수축하고 가꾸도록 명하였다. 후일 정조(正祖) 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이천서씨 절효공파
이천 서씨 시조의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의 세손 .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좌복야(左僕射).정 2품.부총리)
5세 서존(徐存 병부상서(兵部尙書).정 3품.장관)
6세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정 3품.장관)
7세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左僕射).정 2품. 부총리)
8세 서찬(徐贊 백주지사(白州知事)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 대호군(大護軍)(대장군). 종 3품.차관)
9세 서희팔(徐希八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현재 군장성급).
정당문학(政堂文學.) 종 2품 .부총리)
형제는 1.서춘(徐椿 부여파(扶餘 대종) .판내부시사.장관)
2.서능(서릉)(徐稜 장성長城 파=이천서씨 절효공파.문하시중.국무총리)
3.서박(徐樸(부여扶餘 봉례공파)
4.서적(徐迪 판도판서. 정3품. 장관.남양(당성)서파(南陽徐)
5.서직(徐稷(연산(連山)파)
목차
관악산 연주대(冠岳山 戀主臺)
연주대(戀主臺)는 원래 의상대(義湘臺)라고 불렸습니다. 신라 고승 의상조사가 관악산의 수려함에 끌려 산정에 암자 의상대를 세웠다고 합니다. 의상대(義湘臺)라는 이름이 연주대(戀主臺)로 바뀐 것은 고려의 충신들 때문이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강득용(康得龍)과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조견(趙狷) 등 고려의 유신(遺臣)들은 관악산으로 은신을 했습니다.
도원가곡비의 7현
전오륜, 이색, 최문한, 서견, 원천석, 구홍, 길재
두문동(杜門洞) 72현(杜門洞七十二賢)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서중보(徐仲輔-직제학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서보(徐輔-공조전서 본관; 이천서씨(利川徐氏) 서광준(徐光俊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장령 서견(徐甄 본관;이천서씨(利川徐氏),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성사제(成思齊) 이경(李瓊)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곳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종 때 설과(設科)를 했는데, 이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하였으므로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