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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9univ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29일 (금) 09: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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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의 임정요인묘역은 1919년 3·1운동 직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상해에서 수립 및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한 이동녕·조성환·차리석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이동녕 선생은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양기탁·신채호·조성환 등과 같이 상동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고,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인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으며,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는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조성환 선생은 부패한 군부에 분개하고 항일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신민회를 조직하고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8년 민족 대표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할 때 참여하였으며, 1920년 북로군정서 군사부장으로 청산리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생가지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에 위치한 여주 보통리 고택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차리석 선생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만주 독립군의 활동상, 임시정부의 힘찬 출발과 의욕적인 활동, 해외에서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취재 보도하여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하고 항일과 독립의 열망을 북돋았다.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임시정부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의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결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32년부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1935년 임시정부의 존폐가 기로에 섰을 때 차리석은 김구·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을 찾아 다니며 임시정부의 유지하고 재건하기로 뜻을 모으는 등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하여 민죽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계승, 발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