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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지닌 효창원, 문화공간이 되다

Synopsis

현재 많은 시민들이 휴식 및 운동하는 공간으로 방문하는 효창공원. 그 곳은 본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5세에 요절한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1년 일제는 효창원을 골프장으로 이용하였고, 1944년 문효세자의 묘를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가 훼손한 이 곳을 독립선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구상하고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유해, 임정요인(이동녕·차리석·조성환)의 유해를 모셨다.

이후 정치적 의도로 독립운동가들이 묻혀있는 효창공원에 대한 정체성 변화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효창공원에는 효창운동장과 같은 근린공원으로서의 유희시설들과 원효대사 동상, 반공투사위령탑 등 공간의 성격과는 상관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덧씌워졌다. 민주화 이후 효창공원에 의열사[1], 창열문[2]가 건립되고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면서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독립선열의 유적으로 보존의 당위성을 부여 받았다.

이후 효창공원에 대한 국립묘지화와 독립공원화 등 국가적 시도가 있었지만 근린공원(서울시, 용산구의 입장)과 순국선열이 잠든 문화재(보훈처 입장)의 정체성 사이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현재는 울창한 소나무숲과 무덤 주위의 넓은 산책로로 많은 지역민들의 휴식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효창공원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으로 혼재된 정체성을 가진 공원의 기억과 흔적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이에 효창공원의 유래 및 역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인물, 더 나아가 해당 인물의 독립운동을 살펴봄으로써 효창공원이 단순히 휴식하는 공간만이 아닌,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독립선열을 기억하고 그 뜻을 기리는 문화재적 의미가 가미된 복합 문화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도록 그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Storyline

Episode 1: 문효세자, 5세에 요절하여 효창원에 안장되다

정조임금에게는 아들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이며 또 다른 한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한 문효세자이다.

문효세자가 태어날 당시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3]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4]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하여 어린 나이일 때부터 교육기관인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고 스승 보양관(輔養官)을 임명하였다. 보양관이 정해지면 바로 원자와 상견례(相見禮)를 실시하였는데, 상견례는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보양관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보양청에서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이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1784년 1월 문효세자가 창덕궁 대은원(戴恩院)에서 두 명의 보양관과 처음 만나 서로 인사하는 의식을 그린 궁중행사도이며, 『문효세자 보양청일기(輔養廳日記)』에는 1783년 11월 18일부터 1785년 4월 3일까지 보양청에서 있었던 일들이 매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왕세자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였기에 그 위상을 높이는 각종 통과의례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통과의례는 책봉, 입학, 관례, 가례다. 책례는 책봉 의식으로 왕세자가 왕의 후계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공식 의식이며 왕이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서를 수여하고, 세자가 이를 하사받는 의식이다. 왕세자 책봉을 위해서는 책례도감이 구성되어 책봉에 따른 의장과 물품을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책례도감의궤를 작성하였다.

문효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정조의 나이가 30대였기 때문에 신하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5]본래 책봉례와 수책례는 동시에 진행되지만, 문효세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책봉례에 참석할 수 없어서 별도로 치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책봉례는 1784년 8월 1일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와 대신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하고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 수책례가 진행되었다. 이때 어린 문효세자 대신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을 맡았고, 문효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이 책봉례와 수책례의 모습은 《문효세자책례계병》에 각각 묘사되어있으며,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에도 기술되어 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왕세자궁인 중희당을 짓고 현판을 직접 썼다. 그러나 1786년 문효세자는 홍역에 걸렸고 그해(1786년) 5월 문효세자는 5세(만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같은 해 9월 의빈 성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6]하였다.

이에 정조는 궁궐 가까운 곳[7]에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원소를 조성하며 정조는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효창묘'라고 명명하였고, 묘소 조성에 관해서는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조는 효창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이 행차하는 것)하였기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을 ‘거둥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8] 특히 효창원의 아기 석호는 정조의 애달픔이 들어있는 것으로 앙증맞고 귀엽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조가 쓴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에는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라며 사랑하는 문효세자를 잃고 슬픔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애통한 심경을 서술했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Episode 2: 네 명의 독립운동가를 위한 삼의사 묘역

1945년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가 훼손한 효창원의 터에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에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묘 뿐 아니라 가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언젠가 조국으로 봉환되어 오리라 염원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자리이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32년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 축하연에서 폭탄을 던져 중국 주둔 일본군대의 수뇌부에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훙커우공원 의거)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사형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는 질문에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므로 하등의 남길 말이 없다."라고 하였다. 윤봉길의사의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청북도 예산에는 윤봉길이 태어난 집인 광현당 및 제향공간인 충의사 등이 매헌 윤봉길 의사 유적지로 사적 제229호에 등록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가 순국 후 일본 정부가 보내 준 유품들은 보물 등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중 회중시계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전 김구 선생과 최후로 작별할 때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시계가 더 비싸나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일이 없으니 바꾸자고 하여 바꾼 것이라고 김구의 『백범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이봉창 의사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는 1932년 동경에서 신년 관병식을 끝내고 지나가는 일왕 히로히토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사쿠라다문 의거) 그러나 일본 궁내부 대신이 탄 마차를 일왕이 탄 것으로 오인하여 첫번째 수류탄을 던졌으며, 두번째는 불발되었다. 첫번째 수류탄으로 굉음과 함께 말이 거꾸러지고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으나, 일왕은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비록 거사는 실패하였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일본 왕의 행차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사의 의거는 한국의 지속적인 저항과 강인한 독립 운동을 세계에 보여준 것이며, 무엇보다 침체되어 가던 우리 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이봉창의 거사는 중국의 각 신문들이 대서특필하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며 유감을 표하였는데, 이 표현에 일본은 주중일본군을 동원하여 신문사와 국민당 당사를 습격하게 되었고,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과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및 의거자금 송금증서는 국가등록문화재에 등록되어 있으며, 효창공원에는 이봉창의사가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다.

백정기 의사

일제강점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정기 의사는 1931년 한국·중국·일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고 산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장에 나서는 등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조직적인 아나키스트 활동을 펼쳤다.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상해 훙커우[虹口]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정객 참모부원들을 위시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첩자의 밀고로 잡혔다. 이 육삼정 의거로 백정기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순국하였다. 백정기 의사의 고택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03호(구파 백정기의사 고택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읍에는 백정기의사의 기념관인 구파기념관이 있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 등을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며 한국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하자 1908년 4월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대한의군참모중장이 되어 동의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하였다.(하얼빈 의거) 안중근은 1910년 2월 일본 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9]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은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10]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는데, 사형 집행 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 (중략)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사형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묘지에 묻었다”고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매장 위치에 대해선 기록이 없고, 감옥 담장 바깥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한국 답사팀이 수차례 답사 및 측량을 통해 2008년 한·중 공동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로 당초 목표로 삼은 지역의 40%가량은 발굴을 하지 못하고 철수했고,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발굴이 불가능하다. 그 이후 중국이 고려인 묘지가 있었다는 인근 야산을 발굴하고, 북한도 공동묘지를 발굴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은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쓴 유묵들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라남도 장흥의 해동사에는 안중근의사의 배향공간이 있고(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 서울 중구에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Episode 3: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 임시정부

효창공원의 임정요인묘역은 1919년 3·1운동 직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상해에서 수립 및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한 이동녕·조성환·차리석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이동녕 선생

이동녕 선생은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양기탁·신채호·조성환 등과 같이 상동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고,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인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으며,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는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성환 선생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조성환 선생은 부패한 군부에 분개하고 항일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신민회를 조직하고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8년 민족 대표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할 때 참여하였으며, 1920년 북로군정서 군사부장으로 청산리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생가지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에 위치한 여주 보통리 고택으로 국가민속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차리석 선생

차리석 선생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자로 만주 독립군의 활동상, 임시정부의 힘찬 출발과 의욕적인 활동, 해외에서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취재 보도하여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하고 항일과 독립의 열망을 북돋았다.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임시정부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의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결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32년부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1935년 임시정부의 존폐가 기로에 섰을 때 차리석은 김구·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을 찾아 다니며 임시정부의 유지하고 재건하기로 뜻을 모으는 등 임시정부가 명맥을 유지하여 민죽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계승, 발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Episode 4: 나라의 큰 선생, 백범 김구

효창공원의 서쪽에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나라의 큰 선생인 백범 김구의 묘역이 있다. 김구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히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안악사건으로 옥중생활을 하던 중, 호를 백범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백정의 백(白)과 범부의 범(凡)을 딴 것이며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모두 적어도 본인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을 고취하여 완전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김구선생은 1919년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는 한인애국단을 설립하고, 1932년 1·8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문 의거)와 4·29 윤봉길 의거(훙커우 의거)를 주도하였다.

1933년 중국 주석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의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하였고,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40년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여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1944년 4월 미 육군 전략처와의 합의를 체결하여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일제가 훼손한 효창원의 터에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싸우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봉환하여 안장하고자 하였으며, 덕분에 오늘날 효창공원에 3인의 의사와 3인의 임정요인의 묘역이 자리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던 가운데,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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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맨틱데이터 네트워크 그래프



Metaverse 구현

참고문헌

  1. 칠위선열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2. 전통 건축 형태로 지어진 정문
  3. 출산 이후 정조는 승은 상궁에게 정식 후궁 인 ‘소용’의 첩지를 내렸고, 1783년 2월 19일 소용 성씨에게 의빈(宜嬪)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4. 『정조실록』 정조 6년(1782) 9월 7일
  5. 『정조실록』 정조 8년(1784) 7월 2일
  6.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786년) 9월 14일
  7. 효창원은 서소문 밖에서 2km 떨어져있다.
  8. 「거둥 고개」, 서울지명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72XXXXXX8944
  9. 관선 변호인은 안중근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하였다.
  10. 『안응칠역사』는 안중근의 자서전이며,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인데 사형으로 『동양평화론』은 완결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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