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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9univ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4월 27일 (수) 15: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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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메타버스 속 효창원과 효창공원

Synopsis

1923년 인왕산 자락 은행나무골에 세워진 아름다운 건물 ‘딜쿠샤’와 그 집의 주인이었던 테일러 부부가 경험한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와 문화 이야기. 4대 130년에 갈친 테일러 가문과 한국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떠한 유산으로 남았는가?

Storyline

Episode 1: 문효세자, 5세에 요절하여 효창원에 안장되다

정조임금에게는 아들이 2명 있었는데, 한명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이며 또 다른 한명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왕이 되기 전에 요절한 문효세자이다.

문효세자가 태어날 당시 정조는 나이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정부인 이었던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궁인 원빈 홍씨는 이미 병으로 죽었으며 화빈 윤씨는 임신을 했다고 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20개월이 되어도 출산소식이 없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승은 상궁인 성덕임(훗날 의빈성씨)[1]은 2차례 임신했었지만 2번의 유산 끝에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출산에 성공하였고, 이것이 문효세자이다. 이에 정조는 자신이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라며 크게 기뻐하였다.[2]

문효세자는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어린 나이인 3세(22개월, 만 1세)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정조의 나이가 30대였기 때문에 신하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3]

본래 책봉례와 수책례는 동시에 진행되지만, 문효세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책봉례에 참석할 수 없어서 별도로 치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책봉례는 1784년 8월 1일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에서 정조와 대신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이어 임금의 사자들이 책봉 교명과 책인을 가지고 동궁 중희당으로 이동하고 왕세자는 책봉례 동안 중희당에서 대기하다가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 수책례가 진행되었다. 이때 어린 문효세자 대신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이 교명과 책인을 받는 역할을 맡았고, 문효세자는 이후 사배례를 올렸다. 이 책봉례와 수책례의 모습은 <문효세자책례계병>에 각각 묘사되었다.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새로운 세자궁인 중희당을 짓고 직접 현판을 쓸 만큼 아꼈으나, 1786년 문효세자는 홍역에 걸렸고 그해(1786년) 5월 문효세자는 5세(만 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같은 해 9월 의빈 성씨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4]하였다.

이에 정조는 궁궐 가까운 곳[5]에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원소를 조성하고, 정조는 이 곳을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로 '효창묘'라고 명명한다. 정조는 효창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이 행차하는 것)하였기 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을 ‘거둥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6] 특히 효창원의 아기 석호는 정조의 애달픔이 들어있는 것으로 앙증맞고 귀엽고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효창묘는 고종황제 때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Episode 2:

Episode 3:

Episode 4:

Episode 5:

Storytelling Network


Metaverse 구현 예시

Virtual Classroom: 메타버스 속 효창원과 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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