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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901.Story

Theme

Episode 4: 조선왕조의 복식 제도 개혁

Synopsis

조선은 서구식 예복을 받아들이기 전에 전통복식에 대한 간소화를 실시하였다.

1884년 윤 5월 24일 '관복(官服)은 흑단령(黑團領)으로 통일하되 착수(窄袖)로 만들도록 하라'[1]는 고종의 명이 있었고, 윤 5월 25일 '사복(私服) 중에서 도포, 직령, 창의, 중의와 같이 겹겹으로 입고 소매가 넓은 옷은 일하는데 불편하므로 약간 변통시켜서 오직 착수의(窄袖衣)와 전복(戰服)을 입고 사대(絲帶)를 대어 간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세우라'[2]는 고종의 명에 따라 예조에서 6월 3일에 '사복 변제 절목(私服變制節目)'을 정하여 올린다.[3] 그러나 이 갑신년의 의제개혁은 많은 관료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샀고, 고종은 일관된 입장으로 반대의견을 고수해 가면서 수개월간 의견대립이 지속된다.[4] 그러다가 10월에 갑신정변[5]이 일어났다가 실패하면서 선비 및 서민들은 다시 옛날 의복을 입는 것으로 돌아간다.[6]

의제개혁은 이로부터 10년 뒤 1894년에 다시 논의된다. 이 때는 갑오개혁(소위 '갑오경장')[7]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갑오개혁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권하게 된 정권에 의해 진행되었다. 초정부적인 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안건을 올리면 고종이 윤허하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갑오의제개혁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좀 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8] 그 내용은 갑신의제개혁에서 정하였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흑단령 복장을 '대례복(大禮服)'이라 하고, 공무복을 '통상예복(通常禮服)'이라 한 것에서 차이가 있다. 통상예복으로는 주의(周衣), 답호, 사모, 화(靴)를 착용하게 하였다.[9]

다음해인 1895년에도 의제개혁 내용은 계속해서 다듬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먼저 3월 29일 '공사예복(公私禮服)'에서 답호를 제외하고, 궁에 들어갈 때만 사모, 화(靴), 사대(絲帶)를 사용하도록 하고, 주의(周衣)는 모두 검은색으로 할 것을 명했다.[10] 그 다음, 8월 10일 '조신 이하 복장식(朝臣以下服章式)'이라는 규정을 발표하여 조복(朝服), 제복(祭服) 제도는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갑오년 의제개혁에서 대례복만 정했던 복식제도의 형식을 대례복(大禮服), 소례복(小禮服), 통상복색(通常服色)으로 하여 근대적 개념에 대응시켰다.[11] 대례복은 소매가 넓은 흑단령, 사모, 품대(品帶), 화(靴)를 착용하고, 소례복은 소매가 좁은 흑단령(黑盤領窄袖袍), 사모, 속대, 화를 착용하고, 통상복은 주의(周衣), 답호, 사대(絲帶) 차림으로 하도록 했다.[12]

갑오의제개혁[13]과 을미의제개혁[14]이 일본의 간섭하에 진행된 개혁이라 하더라도 고종이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갑신의재게혁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으며, 전통식 복식제도의 바탕 위에 서양식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15]

이러한 의제개혁이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고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16]이 발생하였고, 갑신정변 때 부터 문제로 떠오르던 단발문제가 대두되면서 복식제도 개혁은 다시 한 번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일본의 기록 중 '경성의 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일 단발령을 내려 국왕, 대원군, 관리, 병사가 단발하고 인민은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내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17] 그러나 본래 계획하던 것보다 이른 12월 30일, 유길준, 조희연 등과 일본인의 협박으로 고종부터 강제로 단발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백성들도 체두관에 의해 마구 머리를 깎였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시행된 단발령[18]에 거리에는 행인들의 발걸음이 거의 끊겼고, 결국 나라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19] 그리하여 결국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백성들이 전국각지에서 을미의병으로 일어났다.[20]

단발령 직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하여 단발령 철회 조치를 내린다. 당시에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고종의 상복 차림 사진에서 백립에 흰색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이미 단발을 한 상태지만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망건을 사용하여 머리를 정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종이 단발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차림이라고 볼 수 있다.[21]

단발령은 고종의 철회 조치로 인해 일시적으로 복구되지만, 점차 단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는 단발이 개화의 상징 보다는 친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져서 의제개혁과 단발이 모두 시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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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高宗實錄』 21년(1884) 윤5월 24일 丁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5124_001
  2. 『高宗實錄』 21년(1884) 윤5월 25일 戊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5125_001
  3. 『高宗實錄』 21년(1884) 6월 3일 戊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06003_004
  4. 최연우, “갑신의제개혁(甲申衣制改革)”,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6839
  5. 신용하, “갑신정변(甲申政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922
  6. 황현(저)/김준(역), 『梅泉野錄』, 교문사, 1994, 164쪽.
  7. 유영익, “갑오개혁(甲午改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925
  8.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36~138쪽.
  9. “朝臣大禮服, 用黑團領, 進宮通常禮服, 周衣撘護, 用黑色土産紬布及紗帽靴子.” 『高宗實錄』 31년(1894) 12월 16일 戊午;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112016_001
  10. “自今公私禮服中 褡護를 除하고 進宮時뿐 帽靴絲帶를 用하고 周衣는 官民이 一體로 黑色類를 從하라.” 『高宗實錄』 32년(1895) 3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203029_001
  11.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0쪽.
  12. 『高宗實錄』 32년(1895) 8월 10일 戊寅;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208010_001
  13. 최연우, “갑오의제개혁(甲午衣制改革)”,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6840
  14. 최연우, “을미의제개혁(乙未衣制改革)”,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7142
  15.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0쪽.
  16. 이민원, “을미사변(乙未事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48
  17. “『日本』 25일 京城發 來一日國王, 大院君, 官吏, 兵士は斷髮し, 人民は自由にする事に內定せり.” 『明治編年史』 9권, 341面, 明治 28년(1895) 12월 26일.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2쪽 재인용.)
  18. 윤병석, “단발령(斷髮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579
  19.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5쪽.
  20. 유영익, “을미의병(乙未義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949
  21.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9쪽.
  22.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48~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