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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규 당시 회담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조선 측과 서양복식을 입고 있는 일본 측으로 양자가 구별되고 있다. 이는 1856년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던 조약 상황과도 같은 모습이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03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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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6일 (화) 22: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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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901.Story

Theme

Episode 3: 새로운 문물을 향한 탐방과 개혁

Synopsis

1876년 조일수호조규 당시 회담모습을 스케치한 것으로 알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조선 측과 서양복식을 입고 있는 일본 측으로 양자가 구별되고 있다. 이는 1856년 미국과 일본 간에 맺어졌던 조약 상황과도 같은 모습이다.[1]

조선은 개항 이후 1876년 4월에서 5월(음력)에 걸쳐 김기수를 수신사[2]로 하여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어서 1880년 6월부터 8월(음력)에 걸쳐 김홍집을 수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1881년 4월초부터 윤 7월까지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고자 조사시찰단[3](소위 ‘신사유람단’)을 파견한다. 이 때까지 이들은 공무를 볼 때는 전통식 관복인 사모와 흉배가 달린 단령을 입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전통식 편복을 입고 지냈다.[4]

1882년 8월 9일(음력)에 제물포를 출발하여 일본에 도착한 후 11월 27일(음력) 돌아오는 일정으로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파견한다. 박영효는 10월 26일(음력 9월 15일)에 동경 구단자카의 스즈키 신이치가 운영하는 스즈키 사진관에서 사진을 촬영한 바 있다. 이 사진에는 상투를 자른 짧은 머리에 양복차림을 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수신사들과는 다른 행동이라 볼 수 있다.[5]

1883년 조미수호조약[6]의 비준을 위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하여 미국으로 견미사절단(보빙사)[7]을 파견하였다. 9월 2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시카고, 워싱턴을 거쳐 9월 18일 뉴욕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하였다. 대통령과의 만남은 『뉴욕 타임즈』에 자세하게 묘사되었으며, 일러스트로도 묘사되어 『뉴스 페이퍼』 9월 29일자에 실렸다.[8]

여러 기록을 통해 보빙사 일행도 앞선 수신사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식 복장으로 공무를 행하고 평상시에도 전통식 편복으로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서양 현지에서 서구 복식 체계를 경험하였다는 것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9]

Storytelling Network




  1.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03쪽.
  2. 조항래, “수신사(修信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506
  3. 정옥자,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036
  4.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05~114쪽.
  5.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14~117쪽.
  6. 김원모, “조미조약(朝美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767
  7. 정경숙, “보빙사(報聘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371
  8.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19~122쪽.
  9.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