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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맑은 바람이 부는 청풍계

Synopsis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인 청풍계는 조선 때 인왕산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이 청풍계에는 김상용(金尙容)의 집터가 있다. 김상용과 그 동생 김상헌은 조선 후기의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 가운데 서울 서촌에 살았던 일파)의 시조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거부했다. 김상용의 자결은 인조실록(인조 15년 1637년 1월)에도 기술[1]되어 있을만큼 당시 최고의 충절을 보였고, 훗날 인조가 김상용을 충신으로 인정하면서 장동김씨의 가세는 강해졌다. 덕분에 청풍계는 (율곡학파) 노론(서인 중 송시열학파)의 성지가 되어 청풍계는 충절을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간이 되었다.

현재 이 일대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고 김상용 집의 여러 건물이 사라졌지만, 어느 주택 앞에 ‘백세청풍’(영원한 맑은 바람)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는 권신응이 그린 《청풍계》를 통해 김상용의 집을 세세하게 엿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작품 안에 건물의 이름과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맨 위 능선에는 ‘인왕산’이란 글씨가, 그 아래 바위엔 ‘백세청풍’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권신응의 그림을 보면, 백세청풍 바위 바로 아래 건물의 용마루 위엔 ‘선원영당’(仙源影堂)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시냇가(청풍계) 오른쪽엔 짚으로 지붕을 올린 정자가 하나 서 있고, 그 지붕 위에 ‘태고정’(太古亭)이라고 적혀 있다. 태고정은 청풍계의 건물 가운데 가장 소박하지만, 김상용 집 전체의 중심 공간으로 김상용 집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김상용 집은 조선 후기 서인의 중심 공간이었고, 그 집의 중심 공간이 태고정이다. 그래서 태고정에는 서인 노론 계열의 대신과 명사들만 방문할 수 있었다. 정조(정조 14년 1790년 2월 28일), 순조(순조 28년 1828년 3월 13일)도 이곳을 찾았다.

태고정 오른쪽에는 3개의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이 세 연못의 오른쪽에 청풍지각(靑楓池閣 또는 淸風池閣)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권신응의 그림에도 이 건물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데, 1766년 김양근이 지은 책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서 함벽지 옆에 청풍지각이 있다고 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다. [2] 이 청풍지각은 김상용 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정선의 《청풍계도(淸風溪圖)》와 《청풍계지각(淸風溪池閣)》 등에 그려져 있다.

정선의 《청풍계도》는 1730년대 초반에 그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본과 1730년대 후반에 그린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있다. 고려대 소장본은 보다 근접한 시점에서 그려졌고, 수목과 바위 표현이 더 과감하고 인물이 있다. 반면 간송미술관 소장은이 적묵법을 적용한 정선의 개성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어 보물 제195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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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上)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
  2. 최완수, 『겸재의 한양 진경』, 동아일보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