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1 강훈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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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ss11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11일 (금) 13: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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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본 과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에 지정된 사적지인 이경석선생묘, 성남시향토문화재 제8호에 지정된 이효백묘를 대상으로 파노라마 및 스틸컷을 촬영하여 파빌리온을 구성하고 관련 지식정보와 스토리를 제공하는 온라인 콘텐츠를 소개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일반적인 과제 보고서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과제를 수행해나간 과정에 있다. 기존의 연구과제는 우선 특정한 주제를 선정하여 관련 선행 연구자료와 저서 및 논문 등을 찾아 읽고 나름의 소고를 정리하여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거치겠지만, 본 과제는 그 순서가 다소 바뀌었다. 제한적 발상에서 출발하여 기술적인 결과물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과제가 외연의 확장에 따라 최초 단계에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재료들을 발견했고, 거기에서 파생한 스토리텔링은 과제의 주제 자체를 바꿔놓았다. 초기에는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던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기존에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함께 나타난 까닭이다.

제작 과정은 파노라마 촬영 시점과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에 따라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지며, 관련 지식정보를 재료로 하여 파생되는 스토리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그려냈다.

파빌리온 1차 구성

초기 단계에서의 기획 의도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의 자연환경을 보여줄 수 있는 장소들을 중심으로 파노라마와 스틸컷을 제작하고 파빌리온으로 구성하자는 단순한 것이었다. 강의에서 예제로 사용된 파빌리온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요 건축물을 대상으로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것이었으므로 해당 파빌리온에서 보여주지 못한 요소들, 즉 건축물 사이 또는 외곽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경치와 풍광을 항공 시점에서 볼 수 있도록 파노라마를 촬영하고 스틸컷을 배치하려는 취지였다. 1차 촬영 대상으로 선정한 장소는 학의정, 시습재, 중앙 공터, 동편 연못, 운중저수지 총 다섯 곳이다.

본래 스틸컷들을 개별적인 사진 이미지로 삽입하여 파노라마 속 촬영 대상 위에 배치하였지만, 전체적인 인상이 난잡해질 것을 고려하여 갤러리 아이콘으로 일괄 통합하여 재배치하였다. 촬영 시점은 4~5월로 계절상 봄에 한정돼있으나 다양한 계절의 경치를 선보이기 위해 과거 가을과 겨울에 촬영한 사진을 찾아 재사용하기도 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일차적으로 완성된 파빌리온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아름다운 경관과 자연환경을 담아낸다는 초기의 기획 의도에는 부합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파빌리온을 제작하고 그것을 시각적 콘텐츠로만 활용한다는 데 한하여 의미가 있을 뿐 지식정보간의 맥락과 연관성을 찾고 스토리를 발굴한다는 목적에는 부합하지 못했다. 본 과제가 파노라마와 파빌리온을 제작하는 기술적 방법론에 그칠 것이라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기획을 잡은 결과였다. 따라서 기존의 촬영물을 무의미하게 폐기하지 않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연계될 수 있으면서 인문학적 지식과 스토리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또 다른 노드를 찾는 작업이 수반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파빌리온 2차 구성 항목에서 후술한다.

파노라마 이미지는 매빅 2 프로(Mavic 2 Pro) 기기를 활용한 항공 시점의 드론 촬영을 거쳐 소스 파일을 확보하고, 파빌리온 제작 방법 문서에서 제공하는 DH 디지털 큐레이션 저작도구 (Copyright (C) 2017-2021 디지털인문학연구소, AKS)를 이용하여 파빌리온을 최종 완성하였다.

학의정


시습재


중앙 공터


동편 연못


운중저수지


파빌리온 2차 구성

중간 단계에서 기존의 기획이 시각적으로는 좋은 콘텐츠를 내놓을 수는 있어도 특정한 지식정보와 스토리텔링을 수반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본 과제가 파노라마를 제작하는 기술적 방법론을 배우는 취지에 그칠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던 결과였다.

따라서 기존의 촬영을 무의미하게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주제를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를 찾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인문학적 지식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적을 물색하였다. 그 결과 답사를 결정한 사적이 경기도 기념물 제84호에 지정된 이경석선생묘(李景奭先生墓)이다.

해당 사적은 조선의 문신 이경석(李景奭)의 묘역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인접한 곳에 있음은 물론 1981년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내로 이관된 장서각에 이경석의 저작 중 하나인 인조대왕행장(仁祖大王行狀)이 보관돼있기 때문에 미약한 연관성이 있다. 헌데 그 장서각을 매개로 하여 이경석과 당대 조선의 정치적 사건 및 관련 인물들이 얽히는 스토리를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하단의 파노라마 가운데 장서각 파노라마에 배치된 스틸컷 이미지는 국보 제335호에 지정된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라는 문화재를 묘사한 현수막으로, 최근까지 장서각 외벽에 걸려있던 것이다. 조선 후기 공신 및 그 자손들과 회맹제를 거행한 것에 관한 문서로써 숙종 대의 정치적 동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어 2021년 2월 17일 국보로 지정되었고,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던 장서각에서 대형 현수막을 걸어 이를 알린 것이다.

숙종 대의 환국들과 관련 공신들의 녹훈과 삭훈 및 복훈의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써 의의가 있는데, 특히 보사공신(保社功臣) 책봉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경신환국(庚申換局)에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적 거물이었던 송시열(宋時烈)과 관련된 인사가 포진해있고, 또한 그 송시열이 이경석과 갈등을 빚었던 점에 착안하면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추출하고 관계도를 그려낼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파생 스토리텔링 및 네트워크 그래프 항목에서 후술한다.

이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파노라마 이미지는 매빅 2 프로(Mavic 2 Pro) 기기를 활용한 항공 시점의 드론 촬영을 거쳐 소스 파일을 확보하고, 파빌리온 제작 방법 문서에서 제공하는 DH 디지털 큐레이션 저작도구 (Copyright (C) 2017-2021 디지털인문학연구소, AKS)를 이용하여 파빌리온을 최종 완성하였다.

이경석선생묘


장서각


이효백묘


파생 스토리텔링

수이강(壽而康) 사건

  •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옛 사례를 물으니, 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중략)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壽而康]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7일 임술 2번째 기사
  • "(전략)……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크게 노하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았다. 손적(孫覿)에 빗대어 이경석을 모욕한 것은 이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찬양하는 말이 많아서 청의에 기롱을 받은 까닭이었다. 송시열이 조그만 일로 너무나 각박하게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4월 14일 병자 3번째 기사

이경석(李景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로 조선이 청에 굴복한 일에 관한 기록을 담은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작성한 당사자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이경석이 74세에 이르렀을 때 궤장(机杖)[1] 등을 하사받아 영예를 입었는데[2] 송시열은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에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화에서 따 온 수이강(壽而康)이라는 글을 적어주었으나, 이는 호의로 적은 것이 아니라 이경석을 은밀히 비난하는 문구였다. 본래 이경석은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인지[3] 별달리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궤장 하사가 있은 다음날 송시열은 다른 일을 이유로 조정을 떠났다.[4]

상단에서 인용한 실록의 평에서 보이듯 이경석 대신 공분하는 여론은 있었던 듯하지만, 사건의 두 당사자들은 이 이상 일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자기변명을 시도하지 않았던 이경석과는 달리 그의 후손은 적극적으로 이경석의 변호와 복권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송시열의 영향을 받은 노론계 문인들과 갈등을 빚으며 새로운 논쟁의 장을 열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후술한다.

후손 세대의 노소 분쟁

  • "신의 선조가 지은 글 가운데 첫머리에 내세운, ‘바람에 추택(秋籜)이 날리고, 화로불에 기러기털을 태우듯 쉬웠다.’는 등의 귀절은 다 부견(苻堅)이 진(晋)나라를 침략할 때 스스로 과장(誇張)하던 말입니다. 오로지 이 몇 귀절에 가탁(假託)한 뜻이 매우 은미하니, 참으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있다면 마땅히 시상(時象)을 묵상(默想)하여 그 심사(心事)를 헤아려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이에 이미 지나간 자취를 주워모아 망극한 말을 얽어서 조금도 돌아보아 생각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심사(心事)입니까." - 숙종실록 54권, 숙종 39년 8월 6일 신사 1번째 기사

이경석의 증손 이진망은 이경석과 삼전도비 비문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하여 논박하는 상소인 변무소(辨誣疏)를 작성하여 비문을 쓰게 된 경위, 당시 국내외적 상황과 비문작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열거하여 증조부가 잘못이 없음을 변론하였다.[5] 그가 문제삼은 비판자들인 홍계적(洪啓迪), 김진규(金鎭圭) 등은 모두 송시열의 영향을 받은 노론 인사들이었다. 이진망의 상소에 숙종이 비교적 호의적으로 답하자 김진규는 즉시 상소를 작성하여 반론에 나섰다. 선대인 이경석과 송시열 등은 간접적인 갈등 단계에 머물렀으나 후손 세대에 이르러 그들의 대립은 이처럼 표면화된 논쟁의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헌데 이 이진망과 그의 형제 이진양(李眞養)이 간행하고자 한 『백헌집(白軒集)』에 조력한 인물로 최석정(崔錫鼎)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백헌집』은 이경석의 시문과 산문을 모아 엮은 문집으로 본래 손자 이우성(李羽成)이 최석정과 힘을 모아 간행하고자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에 이우성의 아들들인 이진망과 이진양이 일을 이어받음으로써 『백헌집』은 숙종 26년(1700)에 세상에 나왔다.[6] 최석정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를 주장한 대신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본래는 송시열과 대립한 윤휴(尹鑴)를 비판하고 송시열과 그의 문인인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으나[7] 노소 분쟁이 격화되자 송시열과 갈등을 빚은 윤증(尹拯)을 비호하며 한때 자신이 직접 옹호했던 김수항을 공격하기도 하고,[8] 윤선거(尹宣擧)와 나양좌(羅良佐) 등을 변호하다 비판을 샀다.[9] 최석정이 지은 『예기(禮記)』의 주석서 『예기유편(禮記類編)』은 '신엄(宸嚴)을 간범하는' 서적이라 하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최석정은 과거 그가 송시열을 위해 논박했던 윤휴와 엉뚱하게도 한 배를 탄 것처럼 묶여 주자와 이이 등을 모욕했다는 악명까지 얻었다.[10] 이경석 및 그의 후손들과 비슷한 정치적 역정을 거쳐온 셈이다.

상술하였듯 최석정과 인연이 있는 윤휴, 윤선거, 윤증 등은 노소 분당 및 다양한 정치투쟁에 깊숙이 관여하거나 연관된 인물들로서 이러한 관계도를 확장해나간다면 조선 후기의 정치적 상황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맨틱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또 하나의 연관 인물인 김수항에 주목할 경우 다른 방향으로도 네트워크 그래프를 엮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의 장서각과 그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가 김수항을 매개로 하여 또 다른 정치적 사건을 연결해볼 수 있는 까닭이다.

경신환국과 보사공신, 그리고 보사공신녹훈후

앞서 올린 장서각 파노라마와 그 안에 배치된 이미지는 국보 제335호에 지정된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라는 문화재를 묘사한 현수막으로, 최근까지 장서각 외벽에 걸려있던 것이다. 조선 후기 공신 및 그 자손들과 회맹제를 거행한 것에 관한 문서로써 숙종 대의 정치적 동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어 2021년 2월 17일 국보로 지정되었고,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던 장서각에서 대형 현수막을 걸어 이를 알린 것이다. 숙종 대의 환국들과 관련 공신들의 녹훈과 삭훈 및 복훈의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써 의의가 있다.

보사공신이란 숙종 6년(1680)에 발생한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관련하여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은 이들이 받은 공신호인데, 이 가운데 일등공신 중 하나인 김석주(金錫胄)라는 인물이 주목된다. 그는 이전부터 송시열과 그의 문인들에게 호의적인 편이었고[11] 경신환국의 결과 허적(許積)과 윤휴 등 남인 세력이 일소당하면서 일약 강대한 힘과 권위를 가진 정치적 거물로 떠올랐다. 그가 송시열에게 호의적이었음을 기억한 문인 김수항 역시 김석주와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12]

헌데 이 보사공신은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인 숙종 15년(1689)에 발생한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역으로 송시열과 김수항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복권된 결과로 말미암아 일시 삭훈되었고, 이 시점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김석주는 공신호를 잃었다. 그러나 또 몇 년 지나지 않아 숙종 20년(1694)에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에서 남인이 밀려나면서 보사공신의 삭훈은 취소되어 복훈되었다. 이처럼 15년 동안 녹훈과 삭훈, 복훈을 복잡하게 반복한 보사공신에 관련하여 그 과정 및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게끔 돕는 문서인 보사공신녹훈후는 매우 가치 있는 문화재인 셈이다.

장서각에 소장된 문화재로서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관련된 노드인 것은 물론, 보사공신호의 시대적·정치적 변천을 감안하여 숙종 대에 발생한 다양한 환국들과 관련 인물들을 광범위하게 네트워크 그래프에 포괄시킬 수 있는 노드라는 점에서 시맨틱 데이터를 설계하는 이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문화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본 과제에서는 본래 주제에 충실하기 위하여 이경석과 송시열,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잇는 매개 중 하나로서의 역할에만 머무르고 있으며 관련 노드와 관계성 또한 경신환국과 보사공신 및 관련 인사만을 제한적으로 작성하였다. 만일 조선 후기의 정치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과제를 구상할 경우 또 다른 형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종친 이효백

부록 삼아 소개하는 셈이 되겠지만, 이효백(李孝伯)은 이경석, 송시열 등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조선 세조(世祖)와 예종(睿宗), 성종(成宗) 대에 활동한 종친이다. 주목할 만한 이력이나 업적은 없는 인물이나 활을 매우 잘 다룬 것으로 유명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그 궁술을 선보였다.

  •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니, 왕세자(王世子) 및 종친(宗親)·재추(宰樞)가 어가(御駕)를 수행(隨行)하였다. 임금이 종친(宗親)·재추(宰樞)·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로 하여금 사후(射侯)하도록 했는데, 신종정(新宗正) 이효백(李孝伯)과 최적(崔適)이 활을 잘 쏘았으므로 각기 1계급을 승진시켰다." - 세조실록 17권, 세조 5년 9월 29일 무신 1번째 기사
  • "모화관(慕華館) 대문(大門)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사종(射宗)과 제장(諸將)·겸사복(兼司僕) 등으로 하여금 사후(射侯)하게 하여 그 맞춘 수(數)를 교계(較計)하게 하니,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이 첫째를 차지하여 아마(兒馬) 1필을 내려 주었다." -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 5월 5일 갑자 1번째 기사
  • "열무정(閱武亭)에 이어(移御)하여,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제천군(堤川君) 이온(李蒕)과 겸사복(兼司僕)·선전관(宣傳官) 등을 불러서 준갑(蹲甲)291) 을 쏘게 하였더니, 효백(孝伯)이 홀로 그 미늘[札]을 꿰뚫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품계(品階)를 더하게 하였다." -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18일 갑진 1번째 기사
  • "효백의 자(字)는 희삼(希參)이고, 덕천군(德川君) 이후생(李厚生)의 아들이다. 효백이 과녁을 잘 맞히어 하루 종일 쏘아도 정곡(正鵠)에 벗어나지 않았다. 기묘년에 세조(世祖)가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였을 적에 최적(崔迪)과 짝이 되어 각각 화살 30개를 가지고 과녁을 쏘라고 명하였다. 효백이 연하여 29시(矢)를 맞히니, 세조가 크게 칭찬하고 명하여 당상(堂上)에 승진시켰으며, 조금 뒤에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승진시켰다. 정해년에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하였을 적에는 세조가 친정(親征)하고자 하여 효백을 선봉장(先鋒將)으로 삼았다." - 성종실록 201권, 성종 18년 3월 13일 계축 1번째 기사, 신종군 이효백 졸기

시대적 배경은 물론 특기라 할 만한 분야나 실적 측면에서 이경석과는 별 접점이 없어보이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묘역은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해있는데, 그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조상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에 있다. 상술한 졸기에서 나타나듯 이효백은 덕천군 이후생의 아들로, 이후생은 조선 2대 임금 정종(定宗)의 서자이다. 헌데 이경석 또한 그 선조가 같다.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 바로 이경석이 된다. 이경석의 아들 이철영과 증손 이진양의 묘 역시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후생을 위시한 정종의 후손 일부가 이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네트워크 그래프


결언

상단의 파노라마와 관련 지식정보들, 스토리들을 한데 엮어내어 네트워크 그래프로 그려보면 이러한 모양이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연환경에서 출발하여 특별히 추출할 만한 데이터를 찾지 못했지만, 인접한 지점에 위치한 사적인 이경석선생묘에서 이경석이라는 인물을 확보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인물들과 사건들,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과 연관한 문화재와 그것이 주목하게 만든 정치적 사건과 인사를 한데 모아 녹여낼 수 있었다.

이경석이라는 인물과 그가 잠든 묘역으로부터 출발하여 관련 인물들을 검토하고, 해당 인물들이 경험하거나 참여한 정치적 사건들을 엮어 내려감으로써 숙종 대에 이르는 조선의 정치 분쟁으로 이어갈 수 있음이 확인된다. 이경석 개인은 경신환국이 발생하기 이전인 1671년경 사망했으나 그가 남긴 삼전도비 비문과 송시열과의 갈등 양상은 후손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며 적지 않은 정치적 사건에 파장을 일으켰다.

본 과제에서는 이경석에 집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제한을 두었지만, 만약 범위에 구애받지 않고 그래프를 더욱 확장해나간다면 보사공신의 삭훈과 복훈에 관계된 갑술환국(甲戌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 등 다른 환국들, 혹은 노소 갈등의 또 다른 주요 사건인 회니시비(懷尼是非)를 최석정의 윤증(尹拯) 변호와 맥락 지어 노드를 추가하고 거기에서 파생하는 관련 인사들을 추가로 엮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탐색의 과정과 관련 지식정보 및 인물 관계는 본래 과제 주제로써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외의 경관이라는 일차적인 주제에서 새롭게 뻗어나갈 뿌리를 찾기 위해 관련 노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이야기들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내부의 장서각과 외부의 이경석선생묘를 주목한 결과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정치투쟁의 과정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네트워크 그래프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의 의지와 의향에 따라 더욱 확장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즉 디지털 큐레이션은 잠정 이용자에게 제공될 지식정보와 시각 콘텐츠를 가공한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 이상으로 큐레이션을 구성해나가는 연구자 겸 제작자가 스스로 확장적인 탐구를 해나갈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본 과제를 수행하기 이전까지 필자는 이경석, 송시열, 이진망, 최석정 등의 인물이나 관련 사건에 관해 단편적인 정보만을 인식하고 있거나, 일부 노드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헌데 그러한 정보들에서 연관성을 찾아내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만들어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했던 정보는 물론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보들조차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디지털 큐레이션의 제작 과정은 훗날 그것을 열람할 이용자 이상으로 제작 당사자 본인의 자발적인 학습과 창작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지적 자극은 의식적으로 정해놓은 한계를 벗어날 마음을 먹을 때 더욱 가속화된다. 전술하였듯 본 과제는 노드와 관계성의 추가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시간적 한계로 인하여 일정 부분 제한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약 추가적인 연구의 계기가 주어진다면, 또는 다른 누군가가 제작한 시맨틱 데이터와 유의미한 접점을 찾아 연계의 가능성이 발생한다면 연구주제의 탐구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후속 이용자들의 편의와 이용 의의에도 더욱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바로 그 후속 이용자의 손에 의해서도 새로운 창작이 가능할 수 있다. 디지털 인문학의 의의 중 하나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장벽을 낮추고 일반 이용자도 지식정보에 접근하여 그것을 단순히 열람하는 것을 넘어 직접 편집하고 탐구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게끔 자극하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쟁과 노소 갈등의 스토리에 주목하여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정보와 노드 및 관계성을 확대하고자 할 경우, 기존의 연구자료를 추가로 수집하고 분석하여 네트워크 그래프의 뿌리를 늘려나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분산된 정보를 인용으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연계성을 매개로 통합하여 하나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자 시도할 수 있다.

지금 시점에서 본 과제의 의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연환경과 인근의 사적을 대상으로 촬영한 파노라마와 네트워크 그래프에 한하지만, 관련 정보를 웹 사이트 문서의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 직접 시맨틱 데이터베이스와 플랫폼을 구축하여 연구자와 이용자의 양방향 접근을 더욱 원활히 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연구주제의 추가적인 확장을 통해 잠재 이용자 계층을 늘리고 그들이 직접 정보를 편집하거나 추가하는 협업과 소통의 장으로 기능할 가능성 역시 갖추고 있다. 만약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최초의 발안이었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연환경’이라는 요소는 대부분 희석되거나 아예 소멸할 수도 있겠지만, 이차적인 연구주제를 발견하기 위한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의미 없는 발안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주석

  1. 해당 궤장과 이경석이 이를 하사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보물 제930호에 지정된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링크
  2.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7일 임술 1번째 기사,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에게 궤장(机杖)·선교(宣敎)·선온(宣醞)·일등사악(一等賜樂)을 모두 예의(禮儀)와 같이 하사하였다. 경석은 인조조의 대신이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일흔 넷이었다. 비록 산반(散班)에 있었지만 문안하는 행사에 언제나 참석하였는데 근력이 미치지 못하여 걸음걸이가 심히 어려웠다. 식자들이 그의 성의는 아껴주었으나 물러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3.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7월 19일 병인 1번째 기사,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사직을 청한) 송준길을 간절히 만류하고 송시열을 소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 가서 유시하게 하였으나, 시열 역시 오지 않았다."
  4.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8일 계해 1번째 기사, " 우의정 송시열이 소를 올리고 돌아갔다. 새로 관직을 제수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정원에게 하교하였다. '지금 우상의 상소를 보니 내 마음이 놀라워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직접 대하여 하유하겠다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 전달하라.'"
  5. 해당 상소의 전문은 이진망의 문집인 『도운유집(陶雲遺集)』에 실려있다. 한국고전종합DB 도운유집 책2, 소, 변무소
  6.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의하면 『백헌집』의 편차와 산정을 맡은 최석정이 서문까지 작성했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백헌집』의 서문이 없다고 적혀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제공하고 있는 『백헌집』 데이터에도 발문은 실려있으나 서문은 실려있지 않다.
  7.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윤3월 8일 무신 1번째 기사, "(전략)……오늘날의 논자(論者)들은 송시열(宋時烈)이 군부(軍父)를 폄박(貶薄)하였다고 죄안(罪案)을 만들고, 김수항(金壽恒)이 골육(骨肉)을 이간(離間)하였다고 죄안을 만들고 있습니다마는, 대저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天地)의 강상(綱常)이니, 신하로써 임금을 폄척(貶斥)함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효묘(孝廟)에게 비상한 은우(恩遇)를 입은 송시열과 같은 임하(林下)의 한 한사(寒士)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현(大賢)을 대우하는 예의(禮義)로 대우하면 군신(君臣)의 정(情)이 부자(父子)와 같아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만배(萬倍)를 더할 것인데 이들에게 죄목(罪目)을 더하였으니, 천하의 지극한 원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김수항은 바로 선조(先祖)의 고명(顧命)을 받은 신하입니다. 봉장(封章)을 올려 논주(論奏)하니, 언사(言辭)가 개절(剴切)하고 여러 신료의 잘못된 일의 허물을 깊이 진술하였습니다. 윤휴(尹鑴)의 패리(悖理)한 말을 통렬히 배척하니, 국가를 근심하고 인군을 사랑하는 적심(赤心)이 교연(皦然)한데 편안하게 궁구하도록 내려주지 않으시고, 갑자기 차마 듣지 못할 교시를 내리었으며, 좌우(左右)의 신하들은 법망(法網)으로 종용(慫慂)하였습니다……."
  8.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2월 9일 기해 2번째 기사,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소를 올려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면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침해하여 배척하였다."
  9.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3월 20일 무술 3번째 기사,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나양좌(羅良佐)를 구원하려고 상소하기를, '대로(大老)의 상소의 말이 절박하게 윤선거(尹宣擧)를 몰아세웠으니, 문생(門生)들의 마음에 몹시 박절하게 여겨 한 번 변명해 보려고 함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말을 해가는 사이에 실로 화평한 면은 없고 거의 과격한 말이 많았으니 진실로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서히 따져보지 않고 무거운 율(律)을 내리어 위엄과 노심(怒心)의 진동이 겹치게 되면 몰골이 수참(愁慘)하게 됩니다. 오도일(吳道一)에게 있어서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奏達)하는 일을 한 것인데 죄를 주었으니, 이 이후로는 비록 지나친 일이 있으시더라도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합니다.'"
  10. 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2월 16일 무오 1번째 기사, "우리 주 부자(朱夫子)가 천 년이나 추락(墜落)했던 통서(統緖)를 이어받고 뭇 성현들의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사도(斯道)의 오묘(奧妙)한 뜻을 천명(闡明)하되, 집주(集註)와 장구(章句)를 확정하고 저술하여 만세에 교훈을 남겨 놓았으니, 이는 바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날에 난적(亂賊) 윤휴(尹鑴)가 선현(先賢)을 가볍게 보고서 《중용(中庸)》의 장구를 멋대로 고쳤었으니, 윤휴의 종말에 창궐(猖獗)하게 된 것이 실지는 이에서 비롯하게 된 것인데,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이 또한 뒤따라 일어나게 되고, 이번에는 최석정(崔錫鼎)이 또한 그가 만든 《예기유편》이란 것으로 신엄(宸嚴)을 간범하고 있습니다……(중략) 이는 주자를 모함하는 것도 부족하여 아울러 이이까지 모함하는 짓을 한 것입니다."
  11. 숙종실록 2권, 숙종 1년 1월 13일 임신 2번째 기사,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이때에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는 전에 예(禮)를 의논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하여 성밖에 나가 있었는데, 허적(許積)이 특별히 면유(勉諭)하여 들어오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가서 하유(下諭)하도록 명하고 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다시 우상(右相) 김수항(金壽恒)에게 하유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석주(金錫胄)가 송시열(宋時烈)을 귀양보내는 것이 너무 지나침을 아뢰어 조금 너그러이 줄여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으며, 김석주가 여러번 아뢰어 청하였는데, 허적이 또 곁에서 막아 어지럽혔다."
  12.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11월 22일 정축 1번째 기사, "빈청(賓廳)에서 공신의 훈공을 등록하는데 다만 영의정 김수항이 원훈(元勳)인 이조 판서 김석주(金錫胄)와 더불어 상의해서 감정하였고, 그 밖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모두 불참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