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1 강훈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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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ss11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5일 (토) 14:1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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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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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에 지정된 사적지인 이경석선생묘를 대상으로 파노라마 및 스틸컷을 촬영하여 파빌리온을 구성하고 관련 지식정보와 스토리를 제공하는 온라인 콘텐츠를 소개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제작 과정은 파노라마 촬영 시점과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에 따라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지며, 관련 지식정보를 재료로 하여 네트워크 그래프를 구성하고 파생되는 스토리를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파빌리온 1차 구성

  • 초기 단계에서 파빌리온의 기획 의도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안팎의 자연환경을 선보인다는 것이었다. 강의에서 예제로 사용된 파빌리온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요 건축물을 대상으로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것이었으므로 해당 파빌리온에서 보여주지 못한 요소들, 즉 건축물 사이 또는 외곽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경치와 풍광을 항공 시점에서 볼 수 있도록 파노라마를 촬영하고 스틸컷을 배치하려는 취지였다.
  • 이러한 기획은 파노라마로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 중 시각적 요소에 치중하여 인상적인 자연환경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주안을 둔 것이었으나, 파빌리온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지식정보와 스토리텔링이 배제된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그런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 1차 촬영 대상으로 선정한 장소는 학의정, 시습재, 중앙 공터, 동편 연못, 운중저수지 총 다섯 곳이다.

학의정


시습재


중앙 공터


동편 연못


운중저수지


파빌리온 2차 구성

  • 중간 단계에서 기존의 기획이 시각적으로는 좋은 콘텐츠를 내놓을 수는 있어도 특정한 지식정보와 스토리텔링을 수반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본 과제가 파노라마를 제작하는 기술적 방법론을 배우는 취지에 그칠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던 결과였다.
  • 따라서 기존의 촬영을 무의미하게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주제를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를 찾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인문학적 지식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적을 물색하였다.
  • 2차 촬영 대상으로 선정한 장소는 이경석선생묘, 장서각, 이효백묘 총 세 곳이다.

이경석선생묘


장서각


이효백묘


파생 스토리텔링

수이강(壽而康) 사건

  •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옛 사례를 물으니, 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중략)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壽而康]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7일 임술 2번째 기사
  • "(전략)……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크게 노하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았다. 손적(孫覿)에 빗대어 이경석을 모욕한 것은 이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찬양하는 말이 많아서 청의에 기롱을 받은 까닭이었다. 송시열이 조그만 일로 너무나 각박하게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4월 14일 병자 3번째 기사

이경석(李景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로 조선이 청에 굴복한 일에 관한 기록을 담은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작성한 당사자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이경석이 74세에 이르렀을 때 궤장(机杖)[1] 등을 하사받아 영예를 입었는데[2] 송시열은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에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화에서 따 온 수이강(壽而康)이라는 글을 적어주었으나, 이는 호의로 적은 것이 아니라 이경석을 은밀히 비난하는 문구였다. 본래 이경석은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인지[3] 별달리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궤장 하사가 있은 다음날 송시열은 다른 일을 이유로 조정을 떠났다.[4]

상단에서 인용한 실록의 평에서 보이듯 이경석 대신 공분하는 여론은 있었던 듯하지만, 사건의 두 당사자들은 이 이상 일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자기변명을 시도하지 않았던 이경석과는 달리 그의 후손은 적극적으로 이경석의 변호와 복권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송시열의 영향을 받은 노론계 문인들과 갈등을 빚으며 새로운 논쟁의 장을 열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후술한다.

후손 세대의 노소 분쟁

  • "신의 선조가 지은 글 가운데 첫머리에 내세운, ‘바람에 추택(秋籜)이 날리고, 화로불에 기러기털을 태우듯 쉬웠다.’는 등의 귀절은 다 부견(苻堅)이 진(晋)나라를 침략할 때 스스로 과장(誇張)하던 말입니다. 오로지 이 몇 귀절에 가탁(假託)한 뜻이 매우 은미하니, 참으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있다면 마땅히 시상(時象)을 묵상(默想)하여 그 심사(心事)를 헤아려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이에 이미 지나간 자취를 주워모아 망극한 말을 얽어서 조금도 돌아보아 생각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심사(心事)입니까." - 숙종실록 54권, 숙종 39년 8월 6일 신사 1번째 기사

이경석의 증손 이진망은 이경석과 삼전도비 비문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하여 논박하는 상소인 변무소(辨誣疏)를 작성하여 비문을 쓰게 된 경위, 당시 국내외적 상황과 비문작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열거하여 증조부가 잘못이 없음을 변론하였다.[5] 그가 문제삼은 비판자들인 홍계적(洪啓迪), 김진규(金鎭圭) 등은 모두 송시열의 영향을 받은 노론 인사들이었다. 이진망의 상소에 숙종이 비교적 호의적으로 답하자 김진규는 즉시 상소를 작성하여 반론에 나섰다. 선대인 이경석과 송시열 등은 간접적인 갈등 단계에 머물렀으나 후손 세대에 이르러 그들의 대립은 이처럼 표면화된 논쟁의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헌데 이 이진망과 그의 형제 이진양(李眞養)이 간행하고자 한 『백헌집(白軒集)』에 조력한 인물로 최석정(崔錫鼎)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백헌집』은 이경석의 시문과 산문을 모아 엮은 문집으로 본래 손자 이우성(李羽成)이 최석정과 힘을 모아 간행하고자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에 이우성의 아들들인 이진망과 이진양이 일을 이어받음으로써 『백헌집』은 숙종 26년(1700)에 세상에 나왔다.[6] 최석정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를 주장한 대신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본래는 송시열과 대립한 윤휴(尹鑴)를 비판하고 송시열과 그의 문인인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으나[7] 노소 분쟁이 격화되자 송시열과 갈등을 빚은 윤증(尹拯)을 비호하며 한때 자신이 직접 옹호했던 김수항을 공격하기도 하고,[8] 윤선거(尹宣擧)와 나양좌(羅良佐) 등을 변호하다 비판을 샀다.[9] 최석정이 지은 『예기(禮記)』의 주석서 『예기유편(禮記類編)』은 '신엄(宸嚴)을 간범하는' 서적이라 하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 최석정은 과거 그가 송시열을 위해 논박했던 윤휴와 엉뚱하게도 한 배를 탄 것처럼 묶여 주자와 이이 등을 모욕했다는 악명까지 얻었다.[10] 이경석 및 그의 후손들과 비슷한 정치적 역정을 거쳐온 셈이다.

상술하였듯 최석정과 인연이 있는 윤휴, 윤선거, 윤증 등은 노소 분당 및 다양한 정치투쟁에 깊숙이 관여하거나 연관된 인물들로서 이러한 관계도를 확장해나간다면 조선 후기의 정치적 상황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시맨틱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또 하나의 연관 인물인 김수항에 주목할 경우 다른 방향으로도 네트워크 그래프를 엮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의 장서각과 그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가 김수항을 매개로 하여 또 다른 정치적 사건을 연결해볼 수 있는 까닭이다.

경신환국과 보사공신

종친 이효백

이효백(李孝伯)은 이경석, 송시열 등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조선 세조(世祖)와 예종(睿宗), 성종(成宗) 대에 활동한 종실이다. 주목할 만한 이력이나 업적은 없는 인물이나 활을 매우 잘 다룬 것으로 유명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그 궁술을 선보였다.

  •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니, 왕세자(王世子) 및 종친(宗親)·재추(宰樞)가 어가(御駕)를 수행(隨行)하였다. 임금이 종친(宗親)·재추(宰樞)·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로 하여금 사후(射侯)하도록 했는데, 신종정(新宗正) 이효백(李孝伯)과 최적(崔適)이 활을 잘 쏘았으므로 각기 1계급을 승진시켰다." - 세조실록 17권, 세조 5년 9월 29일 무신 1번째 기사
  • "모화관(慕華館) 대문(大門)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사종(射宗)과 제장(諸將)·겸사복(兼司僕) 등으로 하여금 사후(射侯)하게 하여 그 맞춘 수(數)를 교계(較計)하게 하니,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이 첫째를 차지하여 아마(兒馬) 1필을 내려 주었다." -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 5월 5일 갑자 1번째 기사
  • "열무정(閱武亭)에 이어(移御)하여,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제천군(堤川君) 이온(李蒕)과 겸사복(兼司僕)·선전관(宣傳官) 등을 불러서 준갑(蹲甲)291) 을 쏘게 하였더니, 효백(孝伯)이 홀로 그 미늘[札]을 꿰뚫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품계(品階)를 더하게 하였다." -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18일 갑진 1번째 기사
  • "효백의 자(字)는 희삼(希參)이고, 덕천군(德川君) 이후생(李厚生)의 아들이다. 효백이 과녁을 잘 맞히어 하루 종일 쏘아도 정곡(正鵠)에 벗어나지 않았다. 기묘면216) 에 세조(世祖)가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였을 적에 최적(崔迪)과 짝이 되어 각각 화살 30개를 가지고 과녁을 쏘라고 명하였다. 효백이 연하여 29시(矢)를 맞히니, 세조가 크게 칭찬하고 명하여 당상(堂上)에 승진시켰으며, 조금 뒤에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승진시켰다. 정해년에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하였을 적에는 세조가 친정(親征)하고자 하여 효백을 선봉장(先鋒將)으로 삼았다." - 성종실록 201권, 성종 18년 3월 13일 계축 1번째 기사, 신종군 이효백 졸기

시대적 배경은 물론 특기라 할 만한 분야나 실적 측면에서 이경석과는 별 접점이 없어보이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묘역은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해있는데, 그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조상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에 있다. 상술한 졸기에서 나타나듯 이효백은 덕천군 이후생의 아들로, 이후생은 조선 2대 임금 정종(定宗)의 서자이다. 헌데 이경석 또한 그 선조가 같다.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 바로 이경석이 된다. 이경석의 아들 이철영과 증손 이진양의 묘 역시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이후생을 위시한 정종의 후손 일부가 이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해당 궤장과 이경석이 이를 하사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보물 제930호에 지정된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링크
  2.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7일 임술 1번째 기사,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에게 궤장(机杖)·선교(宣敎)·선온(宣醞)·일등사악(一等賜樂)을 모두 예의(禮儀)와 같이 하사하였다. 경석은 인조조의 대신이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일흔 넷이었다. 비록 산반(散班)에 있었지만 문안하는 행사에 언제나 참석하였는데 근력이 미치지 못하여 걸음걸이가 심히 어려웠다. 식자들이 그의 성의는 아껴주었으나 물러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3.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7월 19일 병인 1번째 기사,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사직을 청한) 송준길을 간절히 만류하고 송시열을 소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 가서 유시하게 하였으나, 시열 역시 오지 않았다."
  4.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8일 계해 1번째 기사, " 우의정 송시열이 소를 올리고 돌아갔다. 새로 관직을 제수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정원에게 하교하였다. '지금 우상의 상소를 보니 내 마음이 놀라워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직접 대하여 하유하겠다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 전달하라.'"
  5. 해당 상소의 전문은 이진망의 문집인 『도운유집(陶雲遺集)』에 실려있다. 한국고전종합DB 도운유집 책2, 소, 변무소
  6.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 의하면 『백헌집』의 편차와 산정을 맡은 최석정이 서문까지 작성했다고 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백헌집』의 서문이 없다고 적혀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제공하고 있는 『백헌집』 데이터에도 발문은 실려있으나 서문은 실려있지 않다.
  7.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윤3월 8일 무신 1번째 기사, "(전략)……오늘날의 논자(論者)들은 송시열(宋時烈)이 군부(軍父)를 폄박(貶薄)하였다고 죄안(罪案)을 만들고, 김수항(金壽恒)이 골육(骨肉)을 이간(離間)하였다고 죄안을 만들고 있습니다마는, 대저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天地)의 강상(綱常)이니, 신하로써 임금을 폄척(貶斥)함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효묘(孝廟)에게 비상한 은우(恩遇)를 입은 송시열과 같은 임하(林下)의 한 한사(寒士)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현(大賢)을 대우하는 예의(禮義)로 대우하면 군신(君臣)의 정(情)이 부자(父子)와 같아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만배(萬倍)를 더할 것인데 이들에게 죄목(罪目)을 더하였으니, 천하의 지극한 원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김수항은 바로 선조(先祖)의 고명(顧命)을 받은 신하입니다. 봉장(封章)을 올려 논주(論奏)하니, 언사(言辭)가 개절(剴切)하고 여러 신료의 잘못된 일의 허물을 깊이 진술하였습니다. 윤휴(尹鑴)의 패리(悖理)한 말을 통렬히 배척하니, 국가를 근심하고 인군을 사랑하는 적심(赤心)이 교연(皦然)한데 편안하게 궁구하도록 내려주지 않으시고, 갑자기 차마 듣지 못할 교시를 내리었으며, 좌우(左右)의 신하들은 법망(法網)으로 종용(慫慂)하였습니다……."
  8.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2월 9일 기해 2번째 기사,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소를 올려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면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침해하여 배척하였다."
  9.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3월 20일 무술 3번째 기사,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나양좌(羅良佐)를 구원하려고 상소하기를, '대로(大老)의 상소의 말이 절박하게 윤선거(尹宣擧)를 몰아세웠으니, 문생(門生)들의 마음에 몹시 박절하게 여겨 한 번 변명해 보려고 함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말을 해가는 사이에 실로 화평한 면은 없고 거의 과격한 말이 많았으니 진실로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서히 따져보지 않고 무거운 율(律)을 내리어 위엄과 노심(怒心)의 진동이 겹치게 되면 몰골이 수참(愁慘)하게 됩니다. 오도일(吳道一)에게 있어서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奏達)하는 일을 한 것인데 죄를 주었으니, 이 이후로는 비록 지나친 일이 있으시더라도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합니다.'"
  10. 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2월 16일 무오 1번째 기사, "우리 주 부자(朱夫子)가 천 년이나 추락(墜落)했던 통서(統緖)를 이어받고 뭇 성현들의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사도(斯道)의 오묘(奧妙)한 뜻을 천명(闡明)하되, 집주(集註)와 장구(章句)를 확정하고 저술하여 만세에 교훈을 남겨 놓았으니, 이는 바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날에 난적(亂賊) 윤휴(尹鑴)가 선현(先賢)을 가볍게 보고서 《중용(中庸)》의 장구를 멋대로 고쳤었으니, 윤휴의 종말에 창궐(猖獗)하게 된 것이 실지는 이에서 비롯하게 된 것인데, 박세당(朴世堂)의 《사변록》이 또한 뒤따라 일어나게 되고, 이번에는 최석정(崔錫鼎)이 또한 그가 만든 《예기유편》이란 것으로 신엄(宸嚴)을 간범하고 있습니다……(중략) 이는 주자를 모함하는 것도 부족하여 아울러 이이까지 모함하는 짓을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