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1 강훈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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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ss11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5일 (토) 13: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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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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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내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에 지정된 사적지인 이경석선생묘를 대상으로 파노라마 및 스틸컷을 촬영하여 파빌리온을 구성하고 관련 지식정보와 스토리를 제공하는 온라인 콘텐츠를 소개할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제작 과정은 파노라마 촬영 시점과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에 따라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지며, 관련 지식정보를 재료로 하여 네트워크 그래프를 구성하고 파생되는 스토리를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파빌리온 1차 구성

  • 초기 단계에서 파빌리온의 기획 의도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안팎의 자연환경을 선보인다는 것이었다. 강의에서 예제로 사용된 파빌리온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요 건축물을 대상으로 외관과 내부를 촬영한 것이었으므로 해당 파빌리온에서 보여주지 못한 요소들, 즉 건축물 사이 또는 외곽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경치와 풍광을 항공 시점에서 볼 수 있도록 파노라마를 촬영하고 스틸컷을 배치하려는 취지였다.
  • 이러한 기획은 파노라마로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 중 시각적 요소에 치중하여 인상적인 자연환경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주안을 둔 것이었으나, 파빌리온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지식정보와 스토리텔링이 배제된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는 그런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 1차 촬영 대상으로 선정한 장소는 학의정, 시습재, 중앙 공터, 동편 연못, 운중저수지 총 다섯 곳이다.

학의정


시습재


중앙 공터


동편 연못


운중저수지


파빌리온 2차 구성

  • 중간 단계에서 기존의 기획이 시각적으로는 좋은 콘텐츠를 내놓을 수는 있어도 특정한 지식정보와 스토리텔링을 수반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본 과제가 파노라마를 제작하는 기술적 방법론을 배우는 취지에 그칠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던 결과였다.
  • 따라서 기존의 촬영을 무의미하게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주제를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를 찾는 작업이 필요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인문학적 지식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사적을 물색하였다.
  • 2차 촬영 대상으로 선정한 장소는 이경석선생묘, 장서각, 이효백묘 총 세 곳이다.

이경석선생묘


장서각


이효백묘


파생 스토리텔링

수이강(壽而康) 사건

  •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옛 사례를 물으니, 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중략)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壽而康]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9년 11월 27일 임술 2번째 기사
  • "(전략)……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크게 노하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았다. 손적(孫覿)에 빗대어 이경석을 모욕한 것은 이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찬양하는 말이 많아서 청의에 기롱을 받은 까닭이었다. 송시열이 조그만 일로 너무나 각박하게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 현종실록 16권, 현종 10년 4월 14일 병자 3번째 기사

이경석(李景奭)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결과로 조선이 청에 굴복한 일에 관한 기록을 담은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작성한 당사자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이경석이 74세에 이르렀을 때 궤장(机杖)[1] 등을 하사받아 영예를 입었는데[2] 송시열은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에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화에서 따 온 수이강(壽而康)이라는 글을 적어주었으나, 이는 호의로 적은 것이 아니라 이경석을 은밀히 비난하는 문구였다. 본래 이경석은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인지[3] 별달리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궤장 하사가 있은 다음날 송시열은 다른 일을 이유로 조정을 떠났다.[4]

상단에서 인용한 실록의 평에서 보이듯 이경석 대신 공분하는 여론은 있었던 듯하지만, 사건의 두 당사자들은 이 이상 일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자기변명을 시도하지 않았던 이경석과는 달리 그의 후손은 적극적으로 이경석의 변호와 복권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송시열의 영향을 받은 노론계 문인들과 갈등을 빚으며 새로운 논쟁의 장을 열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후술한다.

후손 세대의 노소 분쟁

  • "신의 선조가 지은 글 가운데 첫머리에 내세운, ‘바람에 추택(秋籜)이 날리고, 화로불에 기러기털을 태우듯 쉬웠다.’는 등의 귀절은 다 부견(苻堅)이 진(晋)나라를 침략할 때 스스로 과장(誇張)하던 말입니다. 오로지 이 몇 귀절에 가탁(假託)한 뜻이 매우 은미하니, 참으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있다면 마땅히 시상(時象)을 묵상(默想)하여 그 심사(心事)를 헤아려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이에 이미 지나간 자취를 주워모아 망극한 말을 얽어서 조금도 돌아보아 생각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심사(心事)입니까." - 숙종실록 54권, 숙종 39년 8월 6일 신사 1번째 기사

이경석의 증손 이진망은 이경석과 삼전도비 비문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하여 논박하는 상소인 변무소(辨誣疏)를 작성하여 비문을 쓰게 된 경위, 당시 국내외적 상황과 비문작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열거하여 증조부가 잘못이 없음을 변론하였다.[5] 그가 문제삼은 비판자들인 홍계적(洪啓迪), 김진규(金鎭圭) 등은 모두 송시열의 영향을 받은 노론 인사들이었다. 이진망의 상소에 숙종이 비교적 호의적으로 답하자 김진규는 즉시 상소를 작성하여 반론에 나섰다. 선대인 이경석과 송시열 등은 간접적인 갈등 단계에 머물렀으나 후손 세대에 이르러 그들의 대립은 이처럼 표면화된 논쟁의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헌데 이 이진망과 그의 형제 이진양(李眞養)이 간행하고자 한 『백헌집(白軒集)』에 조력한 인물로 최석정(崔錫鼎)이란 인물이 눈에 띈다. 『백헌집』은 이경석의 시문과 산문을 모아 엮은 문집으로 본래 손자 이우성(李羽成)이 최석정과 힘을 모아 간행하고자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에 이우성의 아들들인 이진망과 이진양이 일을 이어받음으로써 『백헌집』은 숙종 26년(1700)에 세상에 나왔다.[6] 최석정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를 주장한 대신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본래는 송시열과 대립한 윤휴(尹鑴)를 비판하고 송시열과 그 문인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으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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