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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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명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23일 (화) 11: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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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추사 김정희 선생(秋史 金正喜, 1786~1856)은 조선 후기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실학자·서화가이다. 서귀포 김정희 유적지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어 생활하였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약 9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를 그려내었다. 대정읍성의 동문 안쪽에 자리한 이곳은 원래 제주 사람 강도순의 집이었는데, 1948년에 불탔다가 1984년에 복원된 뒤 여러 차례 고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유적지에는 새로 지은 초가집 4채와 전시관 1채 등이 들어서 있으며, 추모비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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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생애[1]

출생-24세(1786-1809): 명문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 봉사손

김정희는 조선 후기에 권력을 가진 유명한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씨 집안 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고 이로써 경주이씨는 따로 가문을 열었다.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에서 1786년 (정조10)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경 아들이 없었던 큰아버지인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양된다.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808년 그의 나이 23세 때 자제군관으로 동지사였던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갔다.

24세-25세(1809-1810): 감격의 연경 60일

김정희는 연경에서 스승 박제가와 친했던 조강(曹江,?)을 만났고 그를 통해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완원(阮元, 1764-1849)를 만나 고증학과 금석학을 배웠다. 이후 추사는 이 두 사람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추사는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자신의 아호를 완당(阮堂)이라고 했다.

25-34세 (1810-1819년): 학예의 연찬

연경에서 귀국한 뒤에도 옹방강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에는 경전을 정밀하게 논증한 고증학적 탐구가 많았다. 옹방강의 아들인 옹수곤과도 깊은 친교를 맺었는데, 옹수곤에게 조선의 금석 탁본을 보내기도 하였다. 1816년 31세의 추사는 북한산 비봉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탁본하여 68자를 읽어내어 고증하였다. 추사는 서른 나이에 이미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얻었다. 많은 사람이 추사의 글씨를 구했고 그에게 글을 지어 받기를 원하였다. 서예가로서 추사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글로는 추사가 31세 때 쓴 남한산성의 <이위정기(以威亭記)>, 32세 때 쓴 <송석원(松石園)> 암각 글씨, 33세에 쓴 <가야산 해인사 중량건 상량문>이 있다. 추사 장년 문장은 화려하고 대단히 자신만만하며 현학적이다.

35-45세(1819-30): 출세와 가화(家禍)

1819년 추사는 과거시험 대과에 합격했다. 38세에 규장각 대교로 출발해,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내려갔다. 42세에 예조참의, 44세 때는 규장각의 검교대교 겸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보덕이었다. 추사는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계속 유지하였다. 추사는 다산 정약용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는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어 배움을 구하며 자신의 학문 세계를 넓혀갔다. 추사가 45세이던 1830년(순조 30)에 부친 김노경이 윤상도(尹尙度, 1768-1840) 옥사 윤상도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정(子精). 양주 출생. 1807년(순조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부사과에 올랐다. 1830년 호조판서 박종훈(朴宗薰)과 전에 유수를 지낸 신위(申緯), 그리고 어영대장 유상량(柳相亮) 등을 탐관오리로 탄핵하다가,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楸子島)에 유배되어 가시 울타리 안에 가두어졌다. 1840년(헌종 6) 유배지로부터 의금부에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아들 윤한모(尹翰模)와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부친이 귀양살이하는 동안 추사는 줄곧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임금의 행차 길에 꽹과리를 치며 순조에게 직접 3차례 호소하기도 하였다.

45-55세(1830-1840):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동지사, 진하사, 주청사의 일로 연경으로 가는 사절과 역관들은 추사의 소개장을 받아 갔다. 그들은 추사가 연경의 학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탁본, 종이, 인삼 등을 전해주고, 돌아올 때는 또 그들이 보내는 책, 서화 등을 추사에게 전해주었다. 추사의 제자 중 역관 김검, 이상적 등이 있다. 부친 김노경은 3년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1833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김노경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한동안 추사 부자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추사는 성균과 대사성에 제수되었지만, 1837년 부친은 세상을 떠난다. 50대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대가의 위치에 있었다. 추사의 50대 글씨에 이르면 우리가 추사체의 참멋이라고 생각하는 획의 굳셈과 부드러움의 조화가 능숙히 구사됨을 알 수 있다. 추사의 중년 난초 그림으로는 『난맹첩(蘭盟帖)』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난초들의 잎이 꺼칠하고 길게 꺽이거나 짧게 잘리고 굽어 휘기도 해서 고졸하면서 조야한 멋을 풍긴다.

<세외선향(世外仙香)>

1840년 대사헌이 된 안동 김씨 김홍근이 윤상도의 옥사를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사건이 커졌다. 이로 인해 죽은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의 관직은 추탈되고 김정희는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게 된다.

55세-59세(1840-44년): 세한도를 그리며

1840년 9월 4일 추사는 가장 멀고도 살기 힘든 제주도에서 가시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싼 집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해졌다. 그는 육지를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진 항구로 들어가 다시 80리 떨어진 대정현까지 가야 했다. 유배길에는 의금부 관리인이 대정까지, 집에서는 머슴 봉이가 완도까지 따라왔다. 처음 유배처로 삼은 곳은 대정읍성 송계순의 집이었다. 그러나 무슨 사연에서인지 거처를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유배가 끝날 무렵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계곡이 있는 대정현 창천리로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는 유배 시절에 편지, 옷, 음식 등의 물품을 추사 집안 하인들이 부리나케 오가며 전달했다. 그는 홀로 끊임없는 질병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뱃사람 양봉신이 선뜻 추사의 귀양살이를 돕겠다고 나섰고, 제자들이 유배지로 찾아오기도 하고 나중에는 장인식이라는 지인이 제주목사로 오면서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들 덕택에 추사는 제주도에서도 여전히 연경 학계의 신간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59세 되던 1844년 제주도에 온 후 5년이 되던 해에 <세한도(歲寒圖)>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지중추부사, 온양군수 등을 역임한 역관.문인이었다. 정조·순조·헌종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여행했다.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과 친구관계를 맺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7년(헌종 13)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했다. 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온 일은 유명하다. 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준 것이다. 추사의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이 그림은 격조와 文氣, 화제 세글자와 낙관이 그림 구도에 주는 무게와 안정감,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 발문이 어우러져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으로 꼽힌다.

<세한도(歲寒圖)>

59-64세(1844-1849) 수선화를 노래하다.

추사가 제주에 온 지 6년째 되는 1845년에 제주도에 이양선이 출현했다. 영국 군함 사마랑호로 해심 측정을 목적으로 우도에 정박한 것이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벗 권돈인이 추사에게 어쩐 일인지 문의해왔는데 추사는 서양 열강이 중국에 밀려드는 상황을 설명하며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추사는 여전히 청나라가 문명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것이 추사 인식의 한계였다. 추사는 제주 사람들이 우둔하고 무지하고 그들이 읽은 것은 『통감』 『맹자』 두 종류의 책에 불과하다며 동생에게 연락해서 필요한 책을 구해주면서 성심껏 제자들을 가르쳤다. 추사는 평소 국화를 좋아했지만, 제주도에서는 국화꽃이 아주 드물었다. 대신 제주에서 지천에 널려 있었던 수선화를 좋아하게 되어 수선화를 노래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추사는 한차례 제주읍을 답사했고 또 한라산도 등반했다. 그는 점점 제주의 자연과 서정에 젖어들면서 자신의 당호를 귤중옥(橘中屋)이라고 짓기도 하였다.

64-71세(1849-1856)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 강상(현재 용산)에 자리 잡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추사체 작품이 구사되기 시작했다. 그중 추사체의 멋과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이 아래의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이다.

추사체의 특질은 괴이하다는 평을 받았다. 추사는 괴(怪)의 가치를 구양순도 괴하다는 평을 받았다며 괴이함을 옹호했다. 그는 훗날 흥선대원군이 된 이하응에게 선물과 편지를 받기도 했다. 추사는 이하응에게 5촌 아저씨이다. 추사는 이하응에게 『난보』를 보내주며 난초를 그리는 자세에 대해 가르침을 내렸다. 1851년(철종2)에 추사는 북청 유배 명을 받는다. 북청 유배 시절에도 그곳의 수많은 문사와 만나 학문과 예술을 교류하며 지냈다. 또한, 금속학자 고고학자답게 답사를 다니며 유물을 살피고 논증했다. 1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과천에 돌아와서 생의 마지막 4년을 조용히 보내면서 스님들과 교유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많은 명작을 남긴다.

<일독이호색삼음주(一讀二好色三飮酒)>


사진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유홍준, 『추사 김정희 지음』 (파주: 창비, 2018)


출처

  1. 출처: 유홍준, 『추사 김정희 지음』 (파주: 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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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소연 고전번역학
편집 최여명 한국문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