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반동 반계선생유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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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선생 유적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의 유적이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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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磻溪隨錄)』26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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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형원은 1622년 3월 2일(음력 1월 21일) 세종 때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8대손으로, 증조부는 현령을 지낸 유위(詣)이고, 할아버지는 정랑을 지낸 유성민이었다. 외가인 한성 소정릉동(지금의 서울 정동)에서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유흠의 아들이자 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북인(北人) 대북(大北)계열이었으나 남인(南人) 계열에 영향을 주었다.[4] 그는 자신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던 이상의의 생전에 태어나 그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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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에게는 6촌 형이 되나 나이차이는 59세 연차가 난다. 이는 그의 외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는 15세에 장남 이지완(李志完)을 얻고, 아들 이지선(李志宣), 이지굉(李志宏), 이지정(李志定), 이지인(李志寅), 이지유(李志裕)를 얻은 뒤에 40세가 넘은 나이에 일곱째 아들 이지안(李志安)을 얻었다. 성호 이익은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李夏鎭)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63세의 고령에 얻었다. 한편 그의 증손 유발이 1683년생으로 성호 이익과 비슷한 연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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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은 동인(東人)의 초대 당수인 김효원(金孝元)의 손자였다. 김세렴의 사위는 이가우(李嘉雨)로 그는 남인 계열의 문신이자 서인(西人) 공격에 앞장선 송곡 이서우의 둘째 형이었다. 이가우의 외할아버지는 이경유이고 외종조부 이경록과 외당숙 이서도 서인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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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종조부 이지안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정언옹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지안의 동문은 허목으로 후일 그가 허목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는 데는, 외종조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아버지 유흠과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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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3일 (화) 01:12 판

개관

반계 선생 유적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의 유적이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의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유형원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磻溪隨錄)』26권을 펴냈다.

선생의 학문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선생의 주된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펴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반계서당 현판
반계정

유형원의 일생

반계 유형원은 1622년 3월 2일(음력 1월 21일) 세종 때 의정부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8대손으로, 증조부는 현령을 지낸 유위(詣)이고, 할아버지는 정랑을 지낸 유성민이었다. 외가인 한성 소정릉동(지금의 서울 정동)에서 예문관검열을 지낸 문신 유흠의 아들이자 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북인(北人) 대북(大北)계열이었으나 남인(南人) 계열에 영향을 주었다.[4] 그는 자신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던 이상의의 생전에 태어나 그를 볼 수 있었다.

성호 이익에게는 6촌 형이 되나 나이차이는 59세 연차가 난다. 이는 그의 외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좌찬성을 지냈는데 그는 15세에 장남 이지완(李志完)을 얻고, 아들 이지선(李志宣), 이지굉(李志宏), 이지정(李志定), 이지인(李志寅), 이지유(李志裕)를 얻은 뒤에 40세가 넘은 나이에 일곱째 아들 이지안(李志安)을 얻었다. 성호 이익은 이지안의 장남 이하진(李夏鎭)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63세의 고령에 얻었다. 한편 그의 증손 유발이 1683년생으로 성호 이익과 비슷한 연배였다.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은 동인(東人)의 초대 당수인 김효원(金孝元)의 손자였다. 김세렴의 사위는 이가우(李嘉雨)로 그는 남인 계열의 문신이자 서인(西人) 공격에 앞장선 송곡 이서우의 둘째 형이었다. 이가우의 외할아버지는 이경유이고 외종조부 이경록과 외당숙 이서도 서인 가문이었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정언옹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지안의 동문은 허목으로 후일 그가 허목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는 데는, 외종조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아버지 유흠과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북인이었다.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안승수·이남석, 『공산성 백제추정왕궁지 발굴보고서』 (공주 : 공주대학교 박물관, 1987)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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