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을 노래하다. 세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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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fs최찬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16일 (일) 00: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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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음악감상실 세시봉

1963년에 서울 무교동에 자리 잡은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이후 한국의 통기타 음악 역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음악 인프라였다.
상호인 세시봉은 프랑스어인 C'est Si Bon(영어로 it's so good)에서 따온 것인데
영어만 사용해도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분위기를 연출하던 당시
프랑스어를 상호로 사용한다는 자체가 한걸음 더 앞서는 문화를 향유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른 음악감상실과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음악만 들려준 것이 아니라 당시 젊은이들이 갖고 있었던
음악 이외의 문화를 적극 이끌어내는 차별적인 프로그램들을 요일별로 신설했기 때문.

음악을 감상하는 태도는 감상이라기보다 체질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의 몸에는 음악이 배어있다. 여럿이 있는 곳에서 듣는 음악이어야 건강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집에서 혼자 듣는 음악은 어떤 점은 소아마비적인 것 같을 때가 있지만 음악감상실에서는 한 번도 음악이 싫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 -'태양이 있는 지하실 음악감상실의 생태'/ 주간한국 65.6.13


위의 글은 청년문화세대가 함께 모여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중요한 공동체의식과 문화적 정체성을 획득해 나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세시봉의 OOO

세시봉의 사람들

세시봉에서 운영했던 많은 프로그램들은 현 대한민국 음악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 많은 아티스트를 배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상벽이 진행했던 대학생의 밤[2]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각지의 대학생들이 모여 자신의 끼를 뽐내는 시간이었는데, 이 무대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조영남,윤형주,이장희,송창식,김세환 등이 데뷔하였고, 이 때 세시봉에서 이루어진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이상벽윤여정등이 활동 했다. 이 7명을 아울러 세시봉 7인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외에도 한대수,김민기, 전유성, 정강자 등 한국 문화의 각 분야에서 영향을 끼친 수많은 인물들이 세시봉을 거쳐갔다.

세시봉의 음악

세시봉과 유신정권

세시봉이 활동하던 당시는 유신정권, 즉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와 맞물리는데, 이러한 사회적인 영향이 그들의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금지곡. 당시에는 별의 별 이유를 다 붙여서 대중문화를 탄압하곤 했는데, 세시봉 인물들의 몇몇 노래도 같은 맥락에서 금지곡에 지정된 것들이 많았다. 또, 통행금지, 즉 12시가 넘으면 밖을 돌아다닐 수 없는 제도가 있던 시절이었기에 그들은 늦게까지 노래를 부르다 세시봉에서 자주 자기도 했다. 윤형주가 진행하던 라디오박정희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의 엽서가 오자 긴급대책회의가 열리고 청와대에 연락을 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방송, 라디오 등에 대한 탄압이 매우 심해서, 각 방송사마다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조정관이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방송을 듣다 위험한 멘트가 나오면 이를 심의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다 "제비가 박씨를 물고 갔다"는 표현만 해도 "왜 박씨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번은 같은 라디오 방송에서 개그맨 전유성이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부부싸움을 뭐라 부를까요?" "육박전이죠!"라고 자문자답을 했고, 그 뒤 석 달간 그는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다.[3] [4]

세시봉의 문화적 가치와 의미

문화적 시도

  • 다양한 프로그램의 운영

월요일에는 '성점(星占) 감상실'로 수용자들이 신보를 듣고 곡에 별의 숫자로 등급을 매기는 수용자 비평 마당이었다.
수요일에는 '시인만세'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시인을 불러서 자작시를 낭송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요일에는 '대학생의 밤'이 마련되어 대학생들의 라이브 노래 마당이 펼쳐졌다.
이 무대에는 각 대학의 통기타 마니아들이 모여들어 첨단 유행인 통기타 음악을 들려줬는데 하나같이 기존 관행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지닌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세시봉은 나와 송창식이 데뷔한 무대인 '대학생의 밤'부터 '성점(星點) 감상실', '명사초대석', '삼행시 백일장' 등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일종의 별점 매기기였던 '성점 감상실'이 인기가 많았다. 당시 TBC 프로듀서였던 이백천씨와 주간한국 정홍택 기자의 합작품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음악을 들려준 뒤 세시봉을 찾은 젊은이들이 별점을 매겼다. 결과는 매주 주간한국에 실렸다. 패티 김·윤복희·최희준 같은 당시 유명 가수들의 곡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신곡합평회'도 열렸다. 음반을 녹음하기 전에 관객 반응을 보는 시간이었다. 김강섭 전 KBS 악단장이나 김용선 전 TBC악단 피아니스트의 반주에 현미·김상희·정훈희·김상국·남일해 등 기성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평가를 받았다..[5]


  • 정강자의 누드 퍼포먼스
정강자.jpg

1968년 5월 30일 서울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정강자라고 하는 홍익대 미대생의 '기행'[6]이 벌어졌다.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여성의 옷을 남자들이 칼로 찢고, 상반신에 투명한 풍선을 붙여댄다. 그리고 풍선을 터뜨리자 여성의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내 첫 누드 퍼포먼스로 기록된 ‘투명 풍선과 누드’였다.[7]


세시봉은 단순한 음악감상실이 아니었다. 통기타 음악의 산실 역할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청년문화의 최초 집결지가 세시봉이었다. 전유성은 무대에 정장 차림으로 올라가 가위로 넥타이를 자르곤 아무 말 없이 인사만 하고 내려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시사만화 '두꺼비'로 유명했던 만화가 안의섭(중략)이 청년들과 토론했다. 서정주·박목월·박재삼 시인 등 문단의 거장들이 시를 낭송하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대학생이 주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문화공간이 세시봉이었다.[8]


문화적 선도

송창식윤형주가 1968년 한국 최초의 통기타 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하면서 세시봉은 한국 사회에서 통기타 음악의 문을 연 장소가 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세시봉이란 업소명은 현재에 통기타 음악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 클럽문화의 시초

방송 관계자들은 '쓸 만한' 물건을 헌팅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 이곳을 드나들었으며, 이들의 측면 지원에 의해 세시봉의 스타들은 이후 1970년대 새로 등장한 통기타 음악의 스타로 가요계를 석권한다. 1960년대 중반의 음악감상실은 한국의 클럽 문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이곳을 토양으로 통기타 음악은 새로운 음악 문화로 피어오르게 된다.[9]

세시봉의 쇠퇴, 그리고 오비스캐빈

세시봉은 1969년 5월 전세 계약 만료 이후 새집을 구하지 못하고 폐업한다.

주석

  1.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 음악과 함께 한 다방의 역사- 음악감상실 세시봉
  2. 시작은 대학생 위주로 했지만, 점점 프로 연주자나 명사들의 참여가 많아졌다. 박목월 시인이 와서 좌담회도 열고, 패티김도 대담에 참여하고 그랬으니까요. MBC가 ‘대학가요제’ 만들 때, ‘대학생의 밤’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3. 이후 박정희 대통령 전용 비행기 승무원이 비행기에서 '육박전' 이야기를 꺼냈다. 박정희 대통령도, 육영수 여사도 박장대소했다고.
  4.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8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부부싸움 하면? 육박전(陸朴戰)이죠
  5.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3 한국 초유 누드 퍼포먼스 하던 날… 관객들 입이 떡, 박수도 잊어 : 청년문화 집결소 세시봉
  6. 당시로서는 퍼포먼스가 예술이 아닌 기행으로 인식되었다
  7. 서울신문 ‘벗은 몸’ 낙인 작가 여성 넘어 인간 해방 꿈꾸다(2018.02.05작성기사)
  8. 윤형주 칼럼,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3 한국 초유 누드 퍼포먼스 하던 날… 관객들 입이 떡, 박수도 잊어 : 청년문화 집결소 세시봉
  9.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4> 음악과 함께 한 다방의 역사- 음악감상실 세시봉

참고문헌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윤형주 조선일보 칼럼
다음블로그
국제일보, 김형찬의 대중음악 이야기

이미지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