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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정보
 
{{문화유산정보
|대표명칭 = 남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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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남연군의 묘(南延君―墓)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지정명칭 = 남연군묘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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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명칭 = 남연군의 묘(南延君―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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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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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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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ref>남연군의묘,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800000,34&flag=Y [문화재청 문화재검색: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800000,34&flag=Y]
  
 
=='''남연군의 묘와 흥선대원군'''==
 
=='''남연군의 묘와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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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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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ref>남연군 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ref>
  
  

2016년 4월 15일 (금) 22:49 판


개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1822)의 묘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인용 오류: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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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명종 고문헌관리학
편집 김지선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