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의 묘(南延君―墓)"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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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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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1822)의 묘이다.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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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 묘의 주인인 남연군 (南延君, 1788~1836)의 이름은 이채중(李寀重)이다. 그는 인조(仁祖)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5대손 병원(秉源)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인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 진(禛)에게 후손이 없어 순조(純祖) 때 이채중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며 이름을 구(救)로 고치고 남연군의 칭호가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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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던 남연군 묘는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되고 1845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옮겨졌다가 1846년 3월18일에 지금의 위치로 완전히 이장되게 된다. 그리고 이 묘를 이장하며 이용된 남은들 상여가 아직도 전해진다.  그런데 남연군은 그 아들과 손자 때문에 더 유명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이며 손자는 조선 26대 왕 고종(高宗,1852-1919)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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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서양 제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조선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하고 부딪히고 있었고 그 가운데 이하응이 국내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조선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서양인들은 그 모습을 다양하게 책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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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저자와 저서로는 여행가이자 화가이면서 1895년『고요한 아침의 나라 - 조선(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을 간행한 A. H. 새비지-랜도어(Arnold HenrySavage-Landor, 1865-1924),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은자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을 출간한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 1843-1948),『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저술한 메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책들이 19세기 조선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남연군 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인물과 저서는 E.J.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1832-1903)의『금단의 나라 조선(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이다. 왜냐하면 그가 남연군 묘의 도굴을 시도함으로써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서양과의 관계를 제한하고 서양을 물리치는 정책[鎖國攘夷政策]보다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19세기말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을 살펴보며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통해 남연군 묘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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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 - 1866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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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순조(純祖)의 장자(長子)였던 익종(翼宗)이 대리청정 4년만에 죽고 그의 아내 조대비(趙大妃)는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올라 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1857년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된 조대비(趙大妃)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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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의 묘와 흥선대원군'''==
1863년 12월 8일 철종(哲宗)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아들 명복(命福)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한다. 하지만 당시 12세였던 명복은 정사를 바로 맡아 볼 수 없었고 조대비(趙大妃)는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나랏일이 많고 어려우며 새로운 왕은 어려 대원군에게 명하여 정사를 섭행(攝行)하도록 하였다. 고종 즉위 후 10년간 흥선대원군은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국태공(國太公)’, ‘대로(大老)’  등으로 불리며 정치에 중심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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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오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한 정치질서 붕괴, 삼정(三政)의 문란에 의한 전국적 규모의 농민 봉기, 천주교와 동학(東學)의 유행, 자본주의 열강들의 국제적 통상 요구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여기서는 천주교의 유행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통상 요구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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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남하와 천주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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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부터 그 다음해인 1865년까지 러시아는 네 차례나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한반도 침략위협에 대한 방어대책 수립이 당면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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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지도자였던 홍봉주(洪鳳周), 김면호(金冕浩), 이유일(李惟一), 남종삼(南鍾三)등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으로 러시아세력을 막아줌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최선이라 결론 내리고 대원군과 교섭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당초 프랑스 세력만 끌어들이려 했으나, 애로호사건 때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침공을 벌인 사실을 감안, 영국세력까지 끌어들인 <한․영․불 3국 동맹안>을 바탕으로 <방아책 건의문>을 작성,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의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흥선대원군은 이 방아책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여흥부대부인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의 격려를 받은 남종삼은 <새 건의문>을 가지고 대원군을 만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내어 베르뇌, 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불러 오게 하였으나 베르뇌 주교는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소극적 반응을 보여 대원군의 격노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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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져 고종 3년(1866) 초부터 천주교 금압령이 내려져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한국인 천주교도 8,000명이 죽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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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사옥의 발생은 프랑스 선교사의 정치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주교와의 만남까지 허용했음에도 주교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여 대원이은 선교사들이 단순히 포교만이 아니라 정치적 불안을 조성하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당시 상해(上海) 프랑스 영사도 선교사의 조선 정치간여를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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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사옥의 화를 면한 리델(Felix-Clair Ridel, 1830~1884)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이것이 곧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이다. 이 사건은 같은 해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함께 조선의 대외정책에 있어 분수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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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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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한 리델신부로부터 조선에서의 프랑스 선교사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Claude M.Henri de Bellone, ?~1881)는 청의 공친왕(1833~1898)에게 서한을 보내, 가까운 시일 내에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원정할 것임을 공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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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지관이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한편으로는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알려 달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조선의 소왕국에서 저지른 무시무시한 폭행을 전하에게 공식적으로 알려드림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프랑스 황제는 이렇게 잔인한 폭행이 처벌되지 않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의 국왕이 우리의 불행한 동포들을 체포한 바로 그 날은 그가 통치하는 최후의 날이며, 조선 국왕은 그의 멸망을 스스로 선언하였다고 본인은 오늘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며칠 후 우리의 군대는 조선을 정복하러 진군할 것이며 우리의 존엄한 (프랑스) 황제만이 이제 조선과 주인 없는 공석의 왕위를 규정할 권리와 권한을 갖습니다. 중국정부는 조선에 대해 권한도 권리도 없음을 본인에게 수차 선언한 바 있으니,…이제 조선왕국에 대한 중국 정부의 아무런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1866년 7월 13일자=음 6월3일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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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벨로네는 로즈의 조선 출병을 명하였고, 청나라는 천명하며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계획을 조선 정부에 통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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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로즈 제독은 공사가 현지 사령관인 자신과 상의 없이 내린 대조선 선전포고와 조선국왕폐립선언은 월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청국이 이미 대조선 종주국포기로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다는 것, 조선은 프랑스와 미수교국이라는 것, 그러므로 조선원정은 공사주도가 아니라 현지 사령관인 자신의 주관하에 수행되어야 한다고 해군부에 보고하면서 조선원정 훈령을 요청했고, 이에 해군부는 1866년 9월(양력)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한 조선원정을 로즈 사령관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병인양요가 시작되기 직전 조선은 강화도 근처까지 접근해 있던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격문을 띄우고 회답을 받으며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하며 약 40여일간의 공방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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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 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였으나 조선은 통상·교역은 국법에 절대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와 중군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지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나중에 이 사건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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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한 내용은 고종 3년 10월 15일 이양선 문제로 일본에 보낸 편지에서 그 경과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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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참의(禮曹參議) 임면호(任冕鎬)가 일본국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또 이러한 때에 ①서양 배 1척이 서해로부터 평양부(平壤府) 양각도(羊角島)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해하고 가축들을 죽였다. 그래서 도신(道臣)이 화공(火攻) 전술을 써서 모두 무찔렀다. ②8월 16일에 2척의 서양 배가 남쪽 바다에서 곧바로 경강(京江)에 들어와 사흘 밤을 묵고 돌아갔는데....9월 6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 30여 척이 또 경기 일대에 도착하여 혹 부평부(富平府) 앞바다에 정박하기도 하고 혹은 강화부의 갑곶진(甲串津)으로 곧바로 향하여 망루(望樓)를 파괴하고 공해(公廨)를 불태워 버리고 백성들을 살해하고 소와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사고(史庫)에 있는 책들을 배로 모두 약탈하여 실어갔다. 우리는....저들에게 격문을 보내 싸움을 청하고 약속한 날짜에 보니, 적들은 그 무리를 모두 모아서 포구에 집결해 있으면서 서로 맞붙어 싸움할 생각은 없이 우리 연해와 포구의 배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간간이 혹은 몰래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 여러 성을 습격하였는데 번번이 성을 지키는 장수들에 의해 격퇴당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무기와 의장(儀狀)들을 수리하고 벼리기도 하고 전선(戰船)을 수리하였으며, 또 삼로(三路)의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공격하게 하였는데 10월 12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들은 이어 즉시 무리를 거두어 외양(外洋)을 향해 물러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적의 침입을 받은 대략적인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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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프랑스와 미국의 충돌은 조선정부의 배외(排外) 감정만을 고조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배외(排外) 감정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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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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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1868년 남연군 묘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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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4월 독일인 오페르트(Oppert, Ernst Jacob, 1832~1903)는 대원군의 선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도주한 사건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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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의 조선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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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프트의 저서『금단의 나라 조선』에 따르면 오페르트는 처음에 닷새간의 일정으로 로나호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조선 정부와 조선의 교역 개방 및 친선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예비 접촉을 갖고자 하였다. 상해를 출발한 지 이틀만에 흑산도를 지나 아산만에 도착한 그는 일대를 탐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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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1일 이양선(異樣船)이 평신진(平薪鎭)의 조도(鳥島) 앞에까지 와서 떠다니다가 12일에는 해미현(海美縣)의 조금진(調琴津)으로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평신 첨사(平薪僉使) 김영준(金泳駿), 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응집(金膺集), 서산 군수(瑞山郡守) 정재기(鄭在箕) 등이 보낸 첩보(牒報) 안에 그 사정을 물으며 필담(筆談)한 것들이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배는 영국(英國) 배로 【배의 이름은 로나〔羅那〕이고, 선주(船主)는 영국 런던의 상인(商人)으로 이름은 오페르트〔戴拔:Oppert, Ernest Jacob〕이었고...「우리 상인들은 오로지 외국(外國)을 위하여 귀국(貴國)과 무역을 요청하니, 만약 허락을 받을 수만 있다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마는,....배의 체류기간을 물으니, 답하기를, 「동양(東洋)의 일본(日本)으로 빨리 가려고 하니 오래 머물 수가 없다.」하였습니다. 아마도 청나라 사람들이 영국 상인들을 소개하는 것은 통상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듯한데, 이미 국법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법으로 타일러서 속히 물러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는 표류선(漂流船)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음식물을 베풀어 주는 일에 대해서는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문정 역관(問情譯官)을 내려 보내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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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은 일정으로 떠나는 오페르트는 아산만의 방문에서 만난 조선 주민들을 우호적인 시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엠퍼러호를 타고 두 번째로 조선에 방한하게 된다. 처음에 짧은 일정으로 인해 조선에 방한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오페르트는 반드시 조선의 수도로 이르는 강을 찾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아산만을 거쳐 덕적도를 지나 강화도에 입성하게 된다. 강화도에 입성한 오페르트는 그곳에서 통상관계를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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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월곶진(月串津)에 정박하고 있는 영국 상선에 가서 다시 내막을 물어보니, 지난번에 해미현(海美縣)을 통과해서 온 배와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상인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와 선주 젬스〔詹仕〕가 그 가운데에 있었으며, 그들은 오직 두 나라 간에 교역(交易)할 것을 청하였습니다....문정 역관(問情譯官)으로 하여금 물러가도록 효유(曉諭)하게 하시고, 식량과 반찬 등속은 되도록 후하게 제급(除給)하여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안무(按撫)하는 뜻을 보여주심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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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특사 방우서(方禹敍)와 면담하며 조선과의 통상이 힘들것을 알게 된 오페르트는 다시 조선을 떠난다. 하지만 두 번째 방한에서도 조선 주민들에 대한 인상은 우호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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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차 방한과 남연 묘 도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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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4월 오페르트는 2번의 조선 방한을 실패하고 3차 조선 방한을 준비한다. 이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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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의 저술에 따르면 그의 3차 방한은 2차 조선 방한때 인연을 맺은 리델 신부와 조선 교구장이었던 페롱신부와 관계가 있다. 특히 페롱 신부는 조선 사람들은 유품을 보전함으로써 자신과 가문이 번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원군이 보존하고 있는 유품들을 수중에 넣으면 대원군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하고 오페르트는 제안을 받아 들여 남연군 묘를 도굴할 계획을 진행했지만 실패한다. 그 후 그는 영종도에 정박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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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永宗)에 정박해 있는 서양 배에서 보낸 편지에, 【겉봉에 대원군(大院君) 좌하에게 전하게 할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大官) 1원(員)을 차송(差送)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년 월 일 아리망(亞里莽, allemand) 수군 제독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하였다. 회답 편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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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 첨사의 명의로 회답 편지를 써서 보냈다.】"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각하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 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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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대원군의 배외(排外)정책을 공고히 하는 기폭제가 된다. 박제형(朴齊炯,?-?)의『근세조선정감은』과 그리피스(Griffis, William Elliot, 1843~1928)의 『은둔의 나라 한국』은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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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오페르트 사건)에 이르러 서교에 대한 금지령은 더욱 엄중해졌다. 여러 고을에 령을 내려 무릇 서교 신자는 (기존의 상황과는 다르게) 믿음을 버리겠는가 하는 심문도 하지 않고 즉각 모두 베어 죽였다. 포도청의 관리로서 옷을 바꿔 입고 은밀히 수사하는 자가 국내에 좍 깔려 있었다. 교도들 중에는 깊은 산 속에다 집을 짓고 그 교를 익히는 이도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서는 거의 다 잡히다시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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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이번 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들이 무덤이 파헤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싸이게 된 것은 분명하다. 외국인들이 입국하는 주된 목적은 시체를 파헤치고 인간의 가장 성스러운 본능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의혹이 엄연한 사실로 입증 되었음을 그들은 목격한 것이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서양인들은 야만족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도둑이라고 조선 사람들은 확신하게 되었다. 1871년 미국의 선박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와 같은 눈길로 함대와 성조기를 바라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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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1864년부터 1868년 남연군 묘 도굴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서양과의 마찰은 1871년 신미양요로 이어지며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척화비(斥和碑, 1871)를 세우게 하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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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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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과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살펴보았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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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1864년부터 이어져온 러시아의 통상요구와 1866년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 남연군 묘 도굴 사건등은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 교역 요구와 종교문제가 국내외적으로 미묘하게 엮인 일련의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복잡 다단한 문제들은 당시 조선의 권력의 한 중심에 서 있던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배외(排外) 감정을 공고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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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은 당시 권력자뿐만 아니라 조선 백성들에게까지 서양 세력을 멀리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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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오페르트의 저작에 담긴 그의 주장은 남연군 묘 도굴의 명분은 도굴품을 통해 조선의 통상 교역 및 종교의 자유를 이끌어 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그의 저작에 대해 기존의 연구는 오페르트의 저술 목적이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대한 변호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오페르트의 저서는 도굴사건이 일어나고 재만이 끝난 12년 뒤인 1880년에 출간되어 재판결과를 염두에 둔 출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명예회복을 위한 의미로 영문판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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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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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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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중, 답사 후 서술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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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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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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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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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7권, 탐구당,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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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신도비(南延君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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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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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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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정신문화연구』30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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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 「오페르트의 조선 인식」,『역사와 실학』55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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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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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저/김태웅 역해, 『한국통사』,아카넷,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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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 「역사적 스테레오타입 사례연구」,『한․독사회과학논총』17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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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지음, 신복룡, 장우영 역주,『금단의 나라 조선』, 집문당, 2000.
+
*이주천/김진환, 「병인양요의 재조명」,『열린정신 인문학연구』8집, 2007.
+
*장영훈, 『대원군과 2대 천자지지 남연군 묘』, 대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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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黃玹),『매천야록(梅泉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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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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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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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5일 (금) 22:37 판

틀:답사저자

1. 개관


개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1822)의 묘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남연군의 묘와 흥선대원군

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지관이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한편으로는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알려 달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