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관왕묘 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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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ss11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0일 (토) 15:4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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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그래프


개요

관왕묘는 본래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측의 영향을 받아 건설되어 조선의 국왕이 제사를 지내도록 강요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우와 관왕묘에 우호적으로 변해간 국왕들의 태도와 민간의 관우신앙 등이 겹쳐 적잖은 인식의 변천을 겪었다. 근대에는 관성교(關聖敎)라는 민간 종교단체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인 관왕묘 중 하나였던 동묘가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유적 및 문화관광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 큐레이션은 국내에 건립된 관왕묘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을 정리하고, 이에 얽힌 인물 및 문헌 자료들을 일괄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위키 페이지에 관왕묘 인식의 변천사를 간략히 작성하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만들어 관왕묘와 그 주변에 얽힌 개체 정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시각화 자료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했다. 관왕묘에 얽힌 역사적, 문화적 지식의 습득을 희망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초보적인 디지털 큐레이션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관왕묘의 건립 배경

조선에 관왕묘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시기였다. 참전을 위해 조선 경내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들은 무운을 빌기 위해 자비를 들여 관우의 사당을 건립하였고, 조선 조정에 직접 인력과 물자를 들여 관왕묘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관우는 무인의 표상 같은 존재로 여겨져 숭배됐을 뿐 아니라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산 정치가들의 의미 부여로 왕호와 제호까지 수여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관우를 역사 속의 일개 무장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관우 숭배를 접하고 다소 당혹해하곤 했다. 류성룡이 남긴 기록을 보자.


  • "내가 왕년에 연도(燕都)에 갈 때, 요동으로부터 연경까지 수천 리에 이르는 사이에 유명한 성이나 큰 읍과 여염이 번성한 곳에는 모두 묘우(廟宇)를 세워 한의 장군 수정후(壽亭侯) 관공(關公)을 제사하고 인가에도 사사로 화상을 설치하여 벽에 걸어 두고 향을 피우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제사하는 것이었다. 무릇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고, 새로 부임하는 관리는 목욕재계하고 관왕묘에 나가 알현하는데 심히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어떤 사람에게 물었더니, 북방뿐 아니라 곳곳마다 이같이 하니 천하가 다 똑같다고 하였다."[1]


조선에서는 이상히 여겨질 법했던 관우 숭배가 중국에서는 '천하가 다 똑같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화·일상화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무장들은 민간 신앙에 필적할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관우를 중요시했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그들에게 군신의 보호와 영험이 그만큼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한 사례로 명나라 장수 진인은 전투 도중 왜병의 탄환에 맞았으나 살아남아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이때 관왕묘를 건립할 마음을 먹었던 듯하다.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한 취지와 그 이후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의식적으로 연결하여 기술하고 그 신묘함에 감탄하는 기록을 남겼다.[2] 사행 당시 관우 숭배를 당혹해하던 모습과 대조되는 그의 변화는 마치 조선의 관우와 관왕묘에 대한 인식의 변천을 그대로 축약해놓은 것 같아 재미있다.

관왕묘가 조선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여론이 좋지 않았다. 상술하였듯 관우가 신앙의 대상이라는 개념부터가 조선에는 낯선 것이었고, 사당을 건축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많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과 장수들이 자금을 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양측의 관계상 조선이 재정적인 부담을 떠안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헌부는 관왕묘의 건립 과정과 재정 부담을 비판하는 계를 올리기도 했다.[3] 그러나 선조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 또한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로 직접 관우에게 친제를 올리기까지 했으니[4] 개인적인 감정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으나 명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친제 직전에 비변사에서 올린 계에는 당시 조정의 난감하고 당혹한 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 "관왕묘(關王廟)에 행례(行禮)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 전에는 이런 예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행례하는 것은 너무 급박하니, 중국 장수가 말한 대로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경리·제독이 먼저 도착하여 주상(主上)을 청할 경우에는 난처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전의(奠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예절을 강정(講定)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또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계로 감히 경솔히 관왕묘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답변하소서. ……만약 중국 장수들이 굳이 청한다면 다시 거절할 만한 말이 없으니 매우 구간(苟簡)스러운 줄은 압니다만 형편이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은 위에서 친림할 필요가 없으니 특별히 중신(重臣)을 차견하여 예식을 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또 관원을 보내어 거행하면 중국 장수들이 틀림없이 등존(等尊)한다 하여 노여워 할 것이니, 이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5]

관왕묘 제의와 인식 변화

고종 시대의 관왕묘와 관왕묘의식(關王廟儀式)

현대 관왕묘 문화유적

관왕묘의 위치

참고문헌

주석

  1. 서애선생문집 16권, 잡저(雜著), 기관왕묘(記關王廟), 한국고전종합DB.
  2. 위의 책, 한국고전종합DB.
  3.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7일 임진 1번째 기사.
  4.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4일 무술 2번째 기사.
  5.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2일 병신 6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