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관왕묘 큐레이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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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의 건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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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건립 초기의 관왕묘는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하고 유지해야 하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종전 후 국왕의 친제가 끊기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대리하게 한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6001_002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54권, 광해 4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ref> 이때 예조가 관왕묘의 파손 상태 및 잡인들의 출입 여부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관리가 썩 잘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듯하다. 관우라는 인물을 특별히 존숭할 필요가 없었던 조선의 분위기와, 전시의 정치적·재정적 압박이 된 건립 배경 등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관왕묘는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한동안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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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건립 초기의 관왕묘는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하고 유지해야 하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종전 후 국왕의 친제가 끊기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대리하게 한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oa_10406001_002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54권, 광해 4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ref> 이때 예조가 관왕묘의 파손 상태 및 잡인들의 출입 여부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관리가 썩 잘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듯하다. 관우라는 인물을 특별히 존숭할 필요가 없었던 조선의 분위기와, 전시의 정치적·재정적 압박이 된 건립 배경 등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관왕묘는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한동안 방치되었다.
  
 
==관왕묘 제의와 인식 변화==
 
==관왕묘 제의와 인식 변화==

2020년 6월 20일 (토) 22:44 판

네트워크 그래프


개요

관왕묘는 본래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측의 영향을 받아 건설되어 조선의 국왕이 제사를 지내도록 강요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우와 관왕묘에 우호적으로 변해간 국왕들의 태도와 민간의 관우신앙 등이 겹쳐 적잖은 인식의 변천을 겪었다. 근대에는 관성교(關聖敎)라는 민간 종교단체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표적인 관왕묘 중 하나였던 동묘가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어 유적 및 문화관광지로 보존되고 있다.

이 큐레이션은 국내에 건립된 관왕묘의 역사적 배경과 변천을 정리하고, 이에 얽힌 인물 및 문헌 자료들을 일괄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위키 페이지에 관왕묘 인식의 변천사를 간략히 작성하고, 네트워크 그래프를 만들어 관왕묘와 그 주변에 얽힌 개체 정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시각화 자료로 만드는 작업을 시도했다. 관왕묘에 얽힌 역사적, 문화적 지식의 습득을 희망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는 초보적인 디지털 큐레이션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관왕묘의 건립 배경

조선에 관왕묘가 들어온 것은 선조 대 임진왜란 시기였다. 참전을 위해 조선 경내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들은 무운을 빌기 위해 자비를 들여 관우의 사당을 건립하였고, 조선 조정에 직접 인력과 물자를 들여 관왕묘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관우는 무인의 표상 같은 존재로 여겨져 숭배됐을 뿐 아니라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산 정치가들의 의미 부여로 왕호와 제호까지 수여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관우를 역사 속의 일개 무장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관우 숭배를 접하고 다소 당혹해하곤 했다. 류성룡이 남긴 기록을 보자.


  • "내가 왕년에 연도(燕都)에 갈 때, 요동으로부터 연경까지 수천 리에 이르는 사이에 유명한 성이나 큰 읍과 여염이 번성한 곳에는 모두 묘우(廟宇)를 세워 한의 장군 수정후(壽亭侯) 관공(關公)을 제사하고 인가에도 사사로 화상을 설치하여 벽에 걸어 두고 향을 피우며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제사하는 것이었다. 무릇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기도하고, 새로 부임하는 관리는 목욕재계하고 관왕묘에 나가 알현하는데 심히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어떤 사람에게 물었더니, 북방뿐 아니라 곳곳마다 이같이 하니 천하가 다 똑같다고 하였다."[1]


조선에서는 이상히 여겨질 법했던 관우 숭배가 중국에서는 '천하가 다 똑같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화·일상화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무장들은 민간 신앙에 필적할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관우를 중요시했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그들에게 군신의 보호와 영험이 그만큼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한 사례로 명나라 장수 진인은 전투 도중 왜병의 탄환에 맞았으나 살아남아 후방으로 후송되었고, 이때 관왕묘를 건립할 마음을 먹었던 듯하다.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한 취지와 그 이후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의식적으로 연결하여 기술하고 그 신묘함에 감탄하는 기록을 남겼다.[2] 사행 당시 관우 숭배를 당혹해하던 모습과 대조되는 그의 변화는 마치 조선의 관우와 관왕묘에 대한 인식의 변천을 그대로 축약해놓은 것 같아 재미있다.

관왕묘가 조선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여론이 좋지 않았다. 상술하였듯 관우가 신앙의 대상이라는 개념부터가 조선에는 낯선 것이었고, 사당을 건축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많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조정과 장수들이 자금을 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양측의 관계상 조선이 재정적인 부담을 떠안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헌부는 관왕묘의 건립 과정과 재정 부담을 비판하는 계를 올리기도 했다.[3] 그러나 선조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 또한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로 직접 관우에게 친제를 올리기까지 했으니[4] 개인적인 감정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으나 명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친제 직전에 비변사에서 올린 계에는 당시 조정의 난감하고 당혹한 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 "관왕묘(關王廟)에 행례(行禮)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에 전에는 이런 예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행례하는 것은 너무 급박하니, 중국 장수가 말한 대로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경리·제독이 먼저 도착하여 주상(主上)을 청할 경우에는 난처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전의(奠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예절을 강정(講定)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또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계로 감히 경솔히 관왕묘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답변하소서. ……만약 중국 장수들이 굳이 청한다면 다시 거절할 만한 말이 없으니 매우 구간(苟簡)스러운 줄은 압니다만 형편이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은 위에서 친림할 필요가 없으니 특별히 중신(重臣)을 차견하여 예식을 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상께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또 관원을 보내어 거행하면 중국 장수들이 틀림없이 등존(等尊)한다 하여 노여워 할 것이니, 이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5]


즉 건립 초기의 관왕묘는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치하고 유지해야 하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종전 후 국왕의 친제가 끊기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대리하게 한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6] 이때 예조가 관왕묘의 파손 상태 및 잡인들의 출입 여부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관리가 썩 잘 이루어지지도 않았던 듯하다. 관우라는 인물을 특별히 존숭할 필요가 없었던 조선의 분위기와, 전시의 정치적·재정적 압박이 된 건립 배경 등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결과 관왕묘는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한동안 방치되었다.

관왕묘 제의와 인식 변화

  • "아! 무안왕(武安王)의 충의는 참으로 천고에 드문 것이다. 이제 한번 들러서 유상(遺像)을 본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끼는 뜻에서 나왔고, 또한 무사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니, 본디 한때의 유관(游觀)을 쾌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아아, 너희 장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몸받아 충의를 더욱 면려(勉勵)하여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것이다. 또 동쪽과 남쪽에 관왕묘가 파손된 곳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한결같이 고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되, 제문 가운데에 내가 멀리 생각하고 경탄하는 뜻을 갖추도록 하라."[7]


관왕묘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발생한 시점은 숙종 대였다. 이전의 국왕들이 관왕묘의 제사를 담당 관원으로 하여금 대리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숙종은 직접 방문하여 친제하고, 관우의 충의를 기리거나 제사에 신경쓸 것을 명하는 등 큰 관심을 내비쳤다. 강진의 관왕묘에 진린과 이순신을 함께 향사하는 절차에 관한 논의도 숙종 대에 이루어졌다.[8] 관우에 대한 관심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숙종은 오랜 재위기간에 걸쳐 관왕묘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정립해나갔다.

숙종이 관우에게 큰 관심을 쏟은 이유를 설명하는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관우가 상징하는 충의의 가치를 신하들에게 강조하고 그것을 토대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관왕묘를 활용했다는 견해이다. 숙종 대는 여러 차례의 예송을 거치며 붕당의 대립이 심각해지고, 숙종 자신이 환국을 발생시켜 정치 구도의 전환을 꾀하는 등 파란이 많은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이 의도적으로 관우의 충의를 강조함으로써 신하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독려했다고 보는 견해이다.[9] 두 번째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이다. 1662년 남명(南明)의 멸망과 함께 중국은 청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명을 기억하고 현창하는 작업을 다수 수행했다. 관왕묘는 명이 남긴 문화적 영향을 상징하는 가장 구체적인 실체로써 숙종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 논지이다.[10] 그것은 효종이 북벌을 논하고 추진하는 행위에서 기대한 가치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진상이야 어쨌든 관왕묘에 대한 왕실의 관심과 존중은 영조를 거쳐 정조 대까지 이어졌다. 정조는 몸소 친제를 행하는 것은 물론 별다른 용건 없이도 관왕묘를 방문하곤 했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가 친제 등의 특수한 이유 없이 관왕묘를 들른 횟수는 14회에 이르며[11] 숙종, 영조, 장조(사도세자), 그리고 자신의 어제(御製)[12]와 어필비(御筆碑)[13]를 관왕묘 안에 세우기도 했다.[14] 이는 숙종 대부터 이어진 왕실 차원의 관우 숭배를 강조하는 동시에 사도세자의 정치적 정통성을 은연중에 격상시키는 정조 나름의 목적이 있었던 듯싶다.

정조는 직접 관왕묘의 제사에 쓸 악장(樂章)을 작성하기도 했다.[15] 정조가 지은 악장은 3성(成)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본래 3성은 제후국에서 아악 제례를 행할 때 적용되는 것이나 속악(俗樂) 제례인 관왕묘에 3성을 따른 것은 아악을 지향하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무안왕묘 악가>는 전조의 관우에 대한 송시(頌詩)들과 아악 제례에서 사용하는 3성의 양식을 고려하여 영신(迎神), 전폐(奠幣), 송신(送神)[16] 각 1편씩 제작되었다.[17]

고종 시대의 관왕묘와 관왕묘의식(關王廟儀式)

현대 관왕묘 문화유적

관왕묘의 위치

참고문헌

주석

  1. 서애선생문집 16권, 잡저(雜著), 기관왕묘(記關王廟), 한국고전종합DB.
  2. 위의 책, 한국고전종합DB.
  3.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40권, 선조 34년 8월 27일 임진 1번째 기사.
  4.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4일 무술 2번째 기사.
  5.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2일 병신 6번째 기사.
  6.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54권, 광해 4년 6월 1일 갑자 2번째 기사.
  7.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23권, 숙종 17년 2월 27일 계미 1번째 기사.
  8.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49권, 숙종 36년 12월 17일 정축 2번째 기사.
  9. 남호현, 〈조선시대 關王廟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 의미〉,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강대학교 대학원, 2016, 23~24쪽 참조.
  10. 이성형, 〈대명의리론의 추이와 조선관왕묘: 숙종연간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53권, 한국한문학회, 2014, 370~373쪽 참조.
  11. 정조 4년 4월 13일, 정조 5년 4월 9일, 정조 6년 4월 10일, 정조 7년 4월 5일, 정조 10년 4월 1일, 정조 12년 4월 4일, 정조 14년 2월 12일, 정조 16년 9월 10일, 정조 17년 1월 12일, 정조 17년 9월 4일, 정조 18년 1월 12일, 정조 21년 1월 29일, 정조 21년 8월 15일, 정조 23년 8월 19일.
  12. 임금이 지은 글.
  13. 임금이 친히 쓴 글을 새긴 비.
  14.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권, 정조대왕 행장.
  15.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21권, 정조 10년 2월 2일 병자 1번째 기사.
  16. 영신은 제의에서 신을 맞아들이는 단계이고, 전폐는 폐백을 올리는 단계이며, 송신은 신을 돌려보내는 단계를 의미한다.
  17. 김명준, 〈관왕묘(關王廟) 악장의 형성과 개찬의 의미: 정조와 고종대를 중심으로〉, 《어문논집》 77권, 민족어문학회, 2016, 15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