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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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esa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4월 2일 (월) 19: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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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1]

읍성 내의 건물 [2]

고창객사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의 모양은 예로부터 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이라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8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내아

동헌은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내아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7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89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고창동헌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현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이라 하였다. 건물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동헌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7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88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 또는 원옥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옥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3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풍화루

이 건물은 고창읍성 연못옆에 세운 2층 누각이다. 문헌에는 성내의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풍화루는 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공북루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 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북문)와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등 3개소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담)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공북루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에는 순치 3년 (인조 24년 : 1646) 병술 12월에 공북루를 소건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향청/장청/관청

향청 :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서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렸다. 향청의 설치목적은 지방의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3년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장청 :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 · 현을 지키는 속오군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군교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관청 : 관청은 관주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의 접대와 각종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사무를 관장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2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지석묘/척화비

지석묘 :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 속하는 청동기시대(BC 4~5세기경)의 무덤형식 가운데 하나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고창군에는 2000여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창읍 죽림리 지역에만 각종 형식의 지석묘 447기가 분포되어 있어 1994년에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 391호)로 지정되고 2000년 12월 2일에 세계문화유산 (977호)으로 지정 되었다. 이 지석묘는 죽림리 일대의 지석묘가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결정된 기념으로 제 25회 모양성제 (1998. 10.28)날에 강호상공고 재학생 200여명이 지석묘 축조과정을 재현하면서 만든 것이다.

척화비 :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 (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의 개방을 요구하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섭정의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길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운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관련 풍속

1973년부터 고창읍성에서는 매년 음력 9월9일 중양절을 전후로 고창모양성제를 진행하고 있다. 사단법인 고창모양성보존회의 주관으로 답성놀이, 전통혼례식, 원님부임행차재연, 수문장재현식, 각종 전시회 및 축하공연 등을 선보인다. 그 중 답성놀이는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과거의 풍습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 ‘한 바퀴를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 한다’는 속설 이 있어 부녀자들이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돈 뒤 성 입구에 다시 돌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읍성을 쌓고 나서 성을 더 튼튼하게 하고자 이러한 속설을 퍼뜨린 것으로 짐작된다. 윤달과 엿새날에 저승문이 열린다고 믿어 이때에 답성놀이가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및 도면

사진

도면

관련 사이트

참고문헌

  • 2013 『고창읍성 정밀실측 보고서』 (고창군, 2013)

출처

  1. 출처 : 문화재청 '고창읍성'
  2. 출처 : 고창군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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