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직물산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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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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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공업은 실을 원료로 하여 직물을 제조하는 산업으로 우리나라의 직물공업은 1960년 중반부터 방직공업과 더불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로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그 규모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며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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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직물업의 생산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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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養蠶(누에 기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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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乾繭(고치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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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選繭(고치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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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煮繭(고치삶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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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繰絲(실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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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揚返(되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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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束裝(타래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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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製織(직포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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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染織(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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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잠업을 통해 누에고치를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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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업자: 누에고치로 생사를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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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직물업자:  생사를 직조해 견직물을 만든다.
  
 
=='''강화 직물산업'''==
 
=='''강화 직물산업'''==
==='''국문 개관'''===
 
1933년 [[강화도]]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직물공장]]으로 폐업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2018년 보수공사 끝에 카페,전시실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공장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살리고 기계들을 비롯한 1970년대 일상 소품부터 수입 장식품들을 곳곳에 배치해서 부지 전체가 거대한 설치 미술품처럼 운영되고 있다. 여러 방송매체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입소문을 타고 현재는 강화도 최고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건물 외관은 1958년 폐업된 당시의 원형 그대로 두고 내부를 카페, 전시실, 작업공간으로 리모델링하였다. 보일러실은 주문 및 음료제조 공간으로, 가장 큰 건물인 공장 내부에는 양쪽으로 의자를 배치해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의 콘크리트 구조물뿐 아니라 기계를 들어낸 곳에 길을 만들고  인조 직물을 생산하던 방직기계 지지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ref>[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770, 홍인희, "[세상읽기] 조양방직과 도시재생", 『인천투데이』, 2019년 3월 25일]</ref>
 
  
==='''영문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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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 강화도의 직물공업은 주로 가내수공업으로 주로 면직물을 생산하여 일주일에 한번씩 서는 장날에 판매하는 수준이었다. 일제 말 조양방직과 같은 근대적 직물공장이 세워지면서 이후  인견직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주요 공장으로 오늘날 조양방직으로 잘 알려진 조양견직주식회사가 있었으며, 십자당직물, 강화산업조합 등이 있었다. 이들 공장은 100명 이하의 종업원과 8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었고, 직조기는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었다. 규모면에서 많은 생산량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나 기존의 직물공장에 심도직물등이 합세하여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Cho Yang Bangjik is the first textile factory established in the Ganghwa Island area in 1933. It had been left unattended since its closure, but was reborn as a cafe and exhibition room space after renovation in 2018. The entire site is run like a giant installation art, keeping the structure of the factory building intact and placing imported ornaments from machines and other everyday items in the 1970s. Ganghwa Island is now a top tourist attraction, as many media outlets and media outlets are 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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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terior of the building was remodeled into a cafe, exhibition room, and work space, leaving the interior intact from the time it was closed in 1958. Boiler rooms are used as ordering and beverage manufacturing spaces, while chairs are placed on both sides inside the factory, the largest building, to serve as tablespaces for customers visiting cafes. In addition to the concrete structure of the time, the textile supports that used to make roads and produce artificial fabrics were p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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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기:  50~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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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공장: 남화직물, 심도직물, 상호직물, 평화직물, 동광직물, 무림직물, 삼화직물, 상호직물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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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강화도 직물공업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다가  60년대 이루어 절정을 이루었다. 전후 필품에 대한 수요 급증으로 직물공장들이 호황을 누린 까닭이었다. 전국적으로 강화의 인조견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고 수요량이 공급량을 항상 초과하는 부흥기를 이끌었다. 직물 공업의 활성화에 힘입어 50년대 들어서 직물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가 특히 인격직을생산하는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나 30여개에 달하였다. 때분에 4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직물공장들은 수요의 대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당시 교통조건이 열악해 강화도와 육지를 잇는 수단은 하루에 한번 오가는 나룻배뿐이었다. 동란 이후 급성장을 보이기 시작한 근대적 직기를 갖춘 군소 공장들의 수가 50년에 비해 배에 달했다. 60년대 중반에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업체간 과잉경쟁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후 수출정책에 따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일대 등 타지방으로 직물공업의 주도권이 넘어게 되었다. 강화도에서는 면직(천연섬유), 인견직(인조 섬유)을 생산하는 반면 대구 등 타지방에서는 합성 섬유의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한 것도 타격의 원인이었다. 60년대 강화에서 생산된 면직, 인견직은 주로 옷감, 이불감등으로 사용되었다.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웽블리 넥타이가 쏟아져 나오고, 무명천이 '강화소창'이란 이름을 달고 퍼져나갔다. <ref>  『RE:ID 인천의 재발견: RE:INCHEON DISCOVER 』,인천시, 바이에듀, 2019. 127쪽.</ref>
* 영업시간 : AM 11:00 ~ PM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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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락처 : 032-933-2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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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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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 : 인근 대형주차장 운영(비포장), 주차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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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 : 990 ㎡(약 300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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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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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기: 70년대'''===
조양방직 카페[[신문리 미술관]]의 설립자 [[이용철]] 대표는 지인의 소개로 폐공장을 방문, 리모델링을 결심하고 1년여간 폐공장 부지를 임대하여 2017년 7월 2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쓰레기 치우는 것만 몇 달 걸렸다고. 대표는 "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이곳이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조양방직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설치 미술작품으로 인식하고, '신문리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2018년 7월 새롭게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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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공장: 동광직물, 경도직물, 풍농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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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생산품 수송이 용이해지게 되었으나 강화의 직물공업은 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며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임금상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6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공장들이 좁은 내수 시장에서 과다 경쟁을 벌인데다가 석유 파동 후 그 어려움이 가중되어 73년과 74년에 걸쳐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된다. 폐업을 하지 않은은 공장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60년대 인견직 생산에만 의존하던 생산체제를 폴리에스테르 등 화학 섬유 생산체제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때 생산되었던 제품들을 살펴보면 커텐지, 카바지, 양장지 등이다.  
  
==='''90년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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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퇴기: 80년대 이후'''===
* "우리 박물관이 물건에 대한 시선을 달리해보는 체험학습장이 되면 좋겠어요. 트랙터나 경운기로 테이블을 만든 것도 그런 의도가 있거든요. [..] 하찮다고 낙인찍은 사물의 품격이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특히 어린이들이 느낄 있으면 해요." <ref>[http://www.gang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26, 김세라,"조양방직은 세월이 다듬은 최고의 예술작품입니다.", 『강화뉴스』,  2018년 7월 24일]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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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강화 인견'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강화도의 직물 공업이 현재는 쇠퇴 일로를 걷고 있다. 앞에서 역사적으로 살펴본 결과 석유 파동 후 임금 상승 압박과 국내 시장내 업체간 과잉 경쟁, 또한 화학 섬유처럼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점이 그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70년대 초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 되고 또 설비가 기계화됨에 따라 종업원수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강화도 전체 인구수의 변화를 보더라도 직물 공업의 성장 쇠퇴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을 있다. 즉 직물 공업이 번창하던 시기에는 인구도 증가 일로에 있었으며 70년대를 거쳐 80년대 들어서는 직물 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인구도감소 일로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서너 개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하며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73년의 석유 파동 후 화학 섬유 생산 체제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과거 수십여개에 달하던 직물 공장들이 미도직물, 동진직물, 남화직물, (주)두울 등 4개의 법인 기업체와 소규모의 개인 기업이 있을 따름이다. 현재 이들 업체들은 국내 대기업의 하청을 받거나 수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 "과거 조양방직이 강화읍의 부흥을 이끌었듯, 현재 조양방직이 재탄생해 다시 강화읍으로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해 이곳에서 결혼식도 하고 국제회의도 열 수 있게 하는 게 꿈" <ref> 김서진 외4명, 「강화도의 직물공업 」, 『綠友硏究論集 』30권, 梨花女子大學校 師範大學 社會生活科,1988, 94-109(16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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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한상욱,「60년대 강화 직물노조사건과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인천학연구』 23권,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5, 127-173(4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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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류중현, 『강화직물 비단 내력 소고 』, 강화문화 제 호, 강화문화원 , 2009. </ref>
  
=='''강화의 직물산업'''==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였다.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그 규모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며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 '''관련 이야기 : 심도직물 굴뚝'''===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국내 굴지의 섬유회사이다. 1960-1970년대에는 직원이 약 1천 200여 명 정도로 번성했으며 현재는 공장터에 굴뚝의 일부가 남아있다. 근처에 철종의 고향인 [[용흥궁]] 공원이 조성되자 심도직물을 기억하는 강화읍 주민들이 이를 기념하는 표지서와 함께 2008년에 세워둔 것이다.
 
  
=='''주요 연혁'''==
 
   
 
    · 1933년 : 강화지주였던 [[홍재묵]], [[홍재용]] 형제가 조양방직 주식회사 설립
 
              - 자본금 50만원(불입자본금 12만 5,000원)으로 시작
 
              - 건축 연면적 700여평, 일본 나고야, 오사카 등지에서 기계 50대를 수입
 
              - 주로 인조견 생산
 
    · 1942년 : 홍씨 형제는 경영이 어려워지자 일본기업 미쓰이(三井:[[삼정물산]]) 출신 [[이세현]]이 인수
 
    · 1958년 : [[조양방직]] 폐업
 
    · 2017년 : 현 대표 [[이용철]]이 인수, 7월 2일 공사 시작
 
    · 2018년 :「신문리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7월 24일 개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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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직물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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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조양방직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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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조양방직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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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조양방직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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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조양방직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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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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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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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잠업-제사업-견직물업의 구조에서 양잠에 집중되어 있었다. 1910-20년대 일본의 생사수출액은 일본의 총수출액에서 약 40%를 차지하며 미국시장에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일본대제사자본에게 안정적으로 원료를 제공하기 위해 조선의 잠업을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잠업령’을 통해 조선에서 생산하는 누에고치의 품종을 통일화시키고, 1925년에는 ‘산견100만석증식계획’을 수립하여 누에고치생산량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곧이어 1926년에 ‘조선잠업령’을 개정하여 누에고치의 판매는 수의계약에 의한 특매제로 하도록 강제하였다.  도시의 조선인 중소제사업은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견직물공정에서 자견-제직과정을 담당하는 독특한 수직적 분업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양잠-제사-견직 통제정책의 특징과 생사생산방식, 그리고 지역적 특징에 의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20년대에 양잠만을 통제하였으나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제사업에 대한 통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935년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의 제사업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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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생산의 증대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수출을 위해 기계제사로 재편한 일본의 중소제사업과 달리 조선의 중소제사업은 좌조 족답제사에 의해 생사를 생산하였다.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추신호에 의해 금춘사라는 견면교직물이 발명되어, 대구의 중소제사업은 대구산업조합을 유통구조로 하여 발전하였다. <ref>1930년대 조선인 중소공업의 수직적 분업구조와 식민지적 특징-제사업(製絲業)과 온유비(鰮油肥)제조업을 중심으로- </ref>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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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NetworkGraph | title= 조양방직.l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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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사가 견매매업자를 허가하는 견특매 조치는 일본대제사자본을 위해 안정적인 원료를 공급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1920년대부터 편창제사와 같이 일본의 대제사자본이 조선에 직접적으로 진출하여 우량의 누에고치를 확보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었다.위의 누에고치 특매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가 존재한다. 누에고치특매제로 인해 건견과 선견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기사이다. 누에고치특매제가 제사생산공정인 건견과 선견에 관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제사업자가 농촌의 건견장에 사용료를 지불하여 건견을 맡기거나 농민들이 제사공정의 일부인 건견과 선견을 직접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잠업과 더불어 제사업까지 통제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본의 생사수출시장인 미국은 보호주의를 표방하였다. 미국의 보호주의로 인해 생사시장이 축소됨과 동시에 1930년에 생사공황이 발생하면서 생사가격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 또다시 발생한 생사공황은 제사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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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위기를 가져왔다. 제사업의 위기 속에서 조선총독부는 8월과 10월에 ‘조선제사업령’과 ‘조선제사업령 시행세칙’(이하 시행세칙)을 공포하고, 같은 해 11월 1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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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시행하였다. 제사업자에 대한 인가를 핵심으로 하는 ‘조선제사업령' 조선의 제사업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를 의미했다. 하지만 제사업에 대한 통제는 다른 산업과 달리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업자와 생사생산량의 증가를 저지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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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7.7467662, 126.4780853[[강화 조양방직/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589-23]]
+
<ref> 김서진 외 4명,「강화도의 직물공업」, 綠友硏究論集 30호, 梨花女子大學校 師範大學 社會生活科, 94-109(16쪽),1988년 </ref>
  
</googlemap>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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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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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문화원, 『강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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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섬유산업 연합회, 『섬유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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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군청, 「강화통계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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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방직협회, 『방협 20년사』, 1977
  
 
=='''출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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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편집 || 이수민 || 인문정보학
 
|2019.4.||편집 || 이수민 || 인문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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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봄 답사 자료집]]
 

2019년 5월 15일 (수) 00:16 기준 최신판

직물산업

직물공업은 실을 원료로 하여 직물을 제조하는 산업으로 우리나라의 직물공업은 1960년 중반부터 방직공업과 더불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로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그 규모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며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견직물업의 생산공정

① 養蠶(누에 기르기) ② 乾繭(고치 말리기) ③ 選繭(고치 고르기) ④ 煮繭(고치삶기), ⑤ 繰絲(실켜기) ⑥ 揚返(되올리기) ⑦ 束裝(타래정리) ⑧ 製織(직포제조) ⑨ 染織(가공)

* 농민: 잠업을 통해 누에고치를 기름.
* 제사업자: 누에고치로 생사를 만듦.
* 견직물업자:  생사를 직조해 견직물을 만든다.

강화 직물산업

해방전 강화도의 직물공업은 주로 가내수공업으로 주로 면직물을 생산하여 일주일에 한번씩 서는 장날에 판매하는 수준이었다. 일제 말 조양방직과 같은 근대적 직물공장이 세워지면서 이후 인견직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주요 공장으로 오늘날 조양방직으로 잘 알려진 조양견직주식회사가 있었으며, 십자당직물, 강화산업조합 등이 있었다. 이들 공장은 100명 이하의 종업원과 8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었고, 직조기는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었다. 규모면에서 많은 생산량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나 기존의 직물공장에 심도직물등이 합세하여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부흥기: 50~60년대

주요 공장: 남화직물, 심도직물, 상호직물, 평화직물, 동광직물, 무림직물, 삼화직물, 상호직물

50년대 강화도 직물공업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다가 60년대 이루어 절정을 이루었다. 전후 필품에 대한 수요 급증으로 직물공장들이 호황을 누린 까닭이었다. 전국적으로 강화의 인조견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고 수요량이 공급량을 항상 초과하는 부흥기를 이끌었다. 직물 공업의 활성화에 힘입어 50년대 들어서 직물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가 특히 인격직을생산하는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나 30여개에 달하였다. 때분에 4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직물공장들은 수요의 대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당시 교통조건이 열악해 강화도와 육지를 잇는 수단은 하루에 한번 오가는 나룻배뿐이었다. 동란 이후 급성장을 보이기 시작한 근대적 직기를 갖춘 군소 공장들의 수가 50년에 비해 배에 달했다. 60년대 중반에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업체간 과잉경쟁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후 수출정책에 따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일대 등 타지방으로 직물공업의 주도권이 넘어게 되었다. 강화도에서는 면직(천연섬유), 인견직(인조 섬유)을 생산하는 반면 대구 등 타지방에서는 합성 섬유의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한 것도 타격의 원인이었다. 60년대 강화에서 생산된 면직, 인견직은 주로 옷감, 이불감등으로 사용되었다.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웽블리 넥타이가 쏟아져 나오고, 무명천이 '강화소창'이란 이름을 달고 퍼져나갔다. [1]

정체기: 70년대

주요공장: 동광직물, 경도직물, 풍농직물 이 시기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생산품 수송이 용이해지게 되었으나 강화의 직물공업은 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며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임금상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6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공장들이 좁은 내수 시장에서 과다 경쟁을 벌인데다가 석유 파동 후 그 어려움이 가중되어 73년과 74년에 걸쳐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된다. 폐업을 하지 않은은 공장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60년대 인견직 생산에만 의존하던 생산체제를 폴리에스테르 등 화학 섬유 생산체제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때 생산되었던 제품들을 살펴보면 커텐지, 카바지, 양장지 등이다.

쇠퇴기: 80년대 이후

50,60년대 '강화 인견'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강화도의 직물 공업이 현재는 쇠퇴 일로를 걷고 있다. 앞에서 역사적으로 살펴본 결과 석유 파동 후 임금 상승 압박과 국내 시장내 업체간 과잉 경쟁, 또한 화학 섬유처럼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점이 그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70년대 초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 되고 또 설비가 기계화됨에 따라 종업원수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강화도 전체 인구수의 변화를 보더라도 직물 공업의 성장 쇠퇴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직물 공업이 번창하던 시기에는 인구도 증가 일로에 있었으며 70년대를 거쳐 80년대 들어서는 직물 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인구도감소 일로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서너 개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하며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73년의 석유 파동 후 화학 섬유 생산 체제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과거 수십여개에 달하던 직물 공장들이 미도직물, 동진직물, 남화직물, (주)두울 등 4개의 법인 기업체와 소규모의 개인 기업이 있을 따름이다. 현재 이들 업체들은 국내 대기업의 하청을 받거나 수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2] [3]



일제강점기 직물공업

1910-20년대

기본적으로 1910-20년대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잠업-제사업-견직물업의 구조에서 양잠에 집중되어 있었다. 1910-20년대 일본의 생사수출액은 일본의 총수출액에서 약 40%를 차지하며 미국시장에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일본대제사자본에게 안정적으로 원료를 제공하기 위해 조선의 잠업을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잠업령’을 통해 조선에서 생산하는 누에고치의 품종을 통일화시키고, 1925년에는 ‘산견100만석증식계획’을 수립하여 누에고치생산량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곧이어 1926년에 ‘조선잠업령’을 개정하여 누에고치의 판매는 수의계약에 의한 특매제로 하도록 강제하였다. 도시의 조선인 중소제사업은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견직물공정에서 자견-제직과정을 담당하는 독특한 수직적 분업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양잠-제사-견직 통제정책의 특징과 생사생산방식, 그리고 지역적 특징에 의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20년대에 양잠만을 통제하였으나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제사업에 대한 통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935년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의 제사업 통 제는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생산의 증대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수출을 위해 기계제사로 재편한 일본의 중소제사업과 달리 조선의 중소제사업은 좌조 족답제사에 의해 생사를 생산하였다.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추신호에 의해 금춘사라는 견면교직물이 발명되어, 대구의 중소제사업은 대구산업조합을 유통구조로 하여 발전하였다. [4]

1930년대

도지사가 견매매업자를 허가하는 견특매 조치는 일본대제사자본을 위해 안정적인 원료를 공급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1920년대부터 편창제사와 같이 일본의 대제사자본이 조선에 직접적으로 진출하여 우량의 누에고치를 확보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었다.위의 누에고치 특매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가 존재한다. 누에고치특매제로 인해 건견과 선견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기사이다. 누에고치특매제가 제사생산공정인 건견과 선견에 관련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제사업자가 농촌의 건견장에 사용료를 지불하여 건견을 맡기거나 농민들이 제사공정의 일부인 건견과 선견을 직접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잠업과 더불어 제사업까지 통제하는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일본의 생사수출시장인 미국은 보호주의를 표방하였다. 미국의 보호주의로 인해 생사시장이 축소됨과 동시에 1930년에 생사공황이 발생하면서 생사가격은 급격히 하락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 또다시 발생한 생사공황은 제사업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제사업의 위기 속에서 조선총독부는 8월과 10월에 ‘조선제사업령’과 ‘조선제사업령 시행세칙’(이하 시행세칙)을 공포하고, 같은 해 11월 1일 에 시행하였다. 제사업자에 대한 인가를 핵심으로 하는 ‘조선제사업령' 조선의 제사업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를 의미했다. 하지만 제사업에 대한 통제는 다른 산업과 달리 신디케이트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업자와 생사생산량의 증가를 저지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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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강화문화원, 『강화사』
  • 한국섬유산업 연합회, 『섬유연감』
  • 강화군청, 「강화통계연보」
  • 대한방직협회, 『방협 20년사』, 1977

출처

  1. 『RE:ID 인천의 재발견: RE:INCHEON DISCOVER 』,인천시, 바이에듀, 2019. 127쪽.
  2. 한상욱,「60년대 강화 직물노조사건과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인천학연구』 23권,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5, 127-173(47쪽)
  3. 류중현, 『강화직물 비단 내력 소고 』, 강화문화 제 호, 강화문화원 , 2009.
  4. 1930년대 조선인 중소공업의 수직적 분업구조와 식민지적 특징-제사업(製絲業)과 온유비(鰮油肥)제조업을 중심으로-
  5. 김서진 외 4명,「강화도의 직물공업」, 綠友硏究論集 30호, 梨花女子大學校 師範大學 社會生活科, 94-109(16쪽),1988년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편집 이수민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