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學第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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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ya0902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17일 (수) 00: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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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學第二十

주돈이의 통서 제 20장의 원문 및 朱注이다.


「聖可學乎?」 曰:「可。」 曰:「有要乎?」 曰:「有。」 「請聞焉。」 曰:「一為要。一者,無欲也,無欲則靜虛、動直,靜虛則明,明則通;動直則公,公則溥。明通公溥,庶矣乎!」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습니까?” 답했다. “가능하다.” 물었다. “요체가 있습니까?” 말했다. “있다.” “청컨대 듣고자 합니다.”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은 사욕이 없는 것(無欲)이니, [1] [2] [3] 욕이 없어지면 [마음이] 고요할 땐 텅 비게 되고 [마음이] 움직일 땐 올곧게 된다. [4] 고요할 때 텅 비워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하게 되며, 움직일 때 올곧으면 고르게 되고 고르게 되면 넓어진다. 밝고 통하며 고르고 넓어지면 [성인에] 가까워질 것이다!”[5] [6]
此章之指,最為要切。然其辭義明白,不煩訓解。學者能深玩而力行之,則有以知無極之真,兩儀四象之本,皆不外乎此心,而日用間自無別用力處矣。
이 장의 요지가 가장 핵심이 된다. 그러나 그 문장의 뜻이 명백하므로 번잡하게 주해를 달지 않았다. 배우는 자들이 깊이 완미하고 탐구해서 능히 힘써 실천한다면 무극의 진실됨과 양의와 사상의 근본이 모두 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아 일상 안에서 자연스레 별도로 힘쓰지 않아도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周敦頤集』 “孟子曰, 養心莫善於寡欲。予謂養心不止於寡而存耳, 蓋寡焉以至於無, 無則誠立明通。誠立, 賢也。明通, 聖也。” “맹자는 ‘마음을 기르는 것에 있어서 사욕을 적게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다음과 마음을 기르는 것은 (사욕을) 적게 하여 보존해 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단지 (사욕을) 적게 하여서 없는 것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없으면 誠이 확립되고 明이 통하게 된다. 誠이 확립한 것은 賢이며 밝게 통하면 聖이다.”:『朱子語類』 卷94, 「周子之書」 “直卿曰:「通者明之極,溥者公之極。」曰:「亦是。如後所謂『誠立明通』,意又別。彼處以『明』字為重。立,如『三十而立』。通,則『不惑,知天命,耳順』也。」” 이후 이른바 ‘誠이 확립되고 明이 통하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경우에는 의미가 또한 다르다. 저 곳에서는 ‘明’이라는 글자를 (더욱) 중시하여 주어로 보았다. 立은 ‘삼십 세에 확립된다’는 것과 같다. 通은 ‘유혹되지 않고, 천명을 알며, 듣는 것에 거슬림이 없다’는 것이다.
  2. 『朱子語類』 卷 94, 「周子之書」 問:「伊川云:『為士必志於聖人。』周子乃云:『一為要,一者,無欲也。』何如?」曰:「若注釋古聖賢之書,恐認當時聖賢之意不親切,或有誤處。此書乃周子自著,不應有差。『一者,無欲』,一便是無欲。今試看無欲之時,心豈不一?」又問:「比主一之敬如何?」曰:「無欲之與敬,二字分明。要之,持敬頗似費力,不如無欲撇脫。人只為有欲,此心便千頭萬緒。此章之言,甚為緊切,學者不可不知。」 물었다. “이천께서 ‘선비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인이 되는 것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염계선생께서는 ‘하나가 핵심이니, 그 하나는 사욕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말씀하셨다. “옛 성현의 책을 주석하는 경우에 아마도 당시 성현의 뜻이 불친절하여 혹 잘못된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주렴계가 스스로 쓰신 책이라 마땅히 어긋남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하나는 無欲이다’라고 하신 것에서 그 하나는 바로 사욕을 없애는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 사욕이 없는 때를 시험 삼아 살펴보면, 마음이 어찌 하나가 되지 아니겠는가?” 또한 물었다. “한 곳에 집중한다는[主一] 뜻의 敬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말씀하셨다. “無欲은 敬과 비교해 볼 때, 그 두 글자가 매우 분명하다. 요컨대, 敬을 유지하는 것은 자못 힘이 많이 드는 것 같지만, 무욕하여 맑고 간결해지는 것만 못하다. 사람이 다만 사욕을 갖게 되면, 이 마음은 반드시 천 가지 만 가지로 번잡할 것이다. 이 장의 말은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이니, 배우는 자들은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3. 『朱子語類』 卷 12 「學六·持守」 “今說此話,卻似險,難說。故周先生只說「一者,無欲也」。然這話頭高,卒急難湊泊。尋常人如何便得無欲!故伊川只說箇「敬」字,教人只就這「敬」字上捱去,庶幾執捉得定,有箇下手處。縱不得,亦不至失。要之,皆只要人於此心上見得分明,自然有得爾。”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이 도리어 위험한 것과 같으니,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염계선생이 다만 ‘하나는 사욕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고원하여 촉박하게 이루기에는 어렵다. 보통 사람이 어떻게 사욕을 없앨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천선생이 다만 ‘경’이라는 글자를 말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이 ‘경’을 취하여 나아가서 거의 안정적으로 붙잡아두며 착수처가 있게 하였다. 설령 얻지 못하더라도 잘못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두 분) 모두 사람이 이러한 마음 상에서 분명히 깨달아서 저절로 얻는 바가 있음을 바라셨던 것이다.
  4. 『近思錄集校集注集評』, 上海古籍出版社, 452-453쪽, “張解: 靜而未發之時, 渾然在中, 邪不能入而虛內, 一故也. 動而將發之傾, 惟理是循, 物不能撓而直外, 一故也.” 마음이 아직 움직이지 않아서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천리와] 혼연히 하나가 되어 중(中)의 상태에 있어서 사특함이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서 텅 비어 있으니 마음이 전일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여서 장차 움직이게 될 때엔 오직 이치만을 따를 뿐 외물이 동요시킬 수 없어서 외면이 올곧으니 이 역시 마음이 전일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5. 『朱子語類』 卷 94 問:「『聖學』章,一者,是表裏俱一,純徹無二。少有纖毫私欲,便二矣。內一則靜虛,外一則動直,而明通公溥,則又無時不一也。一者,此心渾然太極之體;無欲者,心體粹然無極之真;靜虛者,體之未發,豁然絕無一物之累,陰之性也;動直者,用之流行,坦然由中道而出,陽之情也。明屬火,通屬木,公屬金,溥屬水。明通則靜極而動,陰生陽也;公溥則動極而靜,陽生陰也。而無欲者,又所以貫動靜明通公溥而統於一,則終始表裏一太極也。不審是否?」曰:「只四象分得未是。此界兩邊說,明屬靜邊,通屬動邊,公屬動邊,溥屬靜邊。明是貞,屬水;通是元,屬木;公是亨,屬火;溥是利,屬金。只恁地循環去。明是萬物收斂醒定在這裏,通是萬物初發達,公是萬物齊盛,溥是秋來萬物溥遍成遂,各自分去,所謂『各正性命』。」曰:「在人言之,則如何?」曰:「明是曉得事物,通是透徹無窒礙,公是正無偏陂,溥是溥遍萬事,便各有箇理去。」直卿曰:「通者明之極,溥者公之極。」曰:「亦是(…후략…)」 물었다. “‘성학’장의 하나는 표리가 모두 하나여서 순일하여 둘이 없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털끝의 사욕이 있게 되면 곧 바로 둘이 됩니다. 안이 하나가 되면 고요함에 텅 비게 되고, 바깥이 하나가 되면 움직임에 올곧게 되며, 밝고 통하며 고르고 넓으면 또한 어느 때건 하나가 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하나’(一)라는 것은 이 마음이 혼연하여 태극의 본체가 되고, 사욕이 없다는 것(無欲)은 心體가 순수하여 무극의 진실함이 되고, ‘고요할 때 텅 빈 것’은 본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활연히 한 사물의 얽매임조차도 절대 없는 상태이자 陰의 性이며, ‘움직일 때 올곧은 것’은 작용의 유행으로 평탄히 中道로부터 나오니, 陽의 情입니다. ‘밝음’은 불에 속하고, ‘통함’은 나무에 속하며 ‘고름’은 금에 속하고 ‘넓음’은 물에 속합니다. 밝고 통하면 고요함이 극에 달하여 움직이게 되니, 음에서 양이 생겨나는 것이며, 고르고 넓으면 움직임이 극에 달하여 고요하게 되니, 양이 음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무욕’이라는 것이 또한 움직임과 고요함, 밝고 통함, 고르고 넓음을 꿰뚫어 하나로 모이게 하는 것이라면 시작과 끝 그리고 안과 밖이 하나의 태극일 것입니다.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맞을까요?”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다만 사상을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이 경계를 두 부분으로 말하면 ‘밝음’은 고요함 쪽에 속하고 ‘통함’은 움직임 쪽에 속하며, ‘고름’은 움직임에 속하고 ‘넓음’은 고요함에 속한다. ‘밝음’은 貞이니 물에 속하고, ‘통함’은 元이니 나무에 속하며, ‘고름’은 亨이니 불에 속하며, ‘넓음’은 利이니 금에 속한다. 단지 이와 같이 순환해 나간다. ‘밝음’은 만물이 여기에서 수렴되어 맑게 안정되며, ‘통함’은 만물이 처음으로 왕성하게 되는 것이고 ‘고름’은 만물이 가지런하게 이루어진 것이고, ‘넓음’은 가을이 와서 만물이 두루 결실을 이룬 것으로 각각 저절로 나누어지니, 이른바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었다. “사람을 가지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밝음’은 사물을 분명히 깨달은 것이고, ‘통함’은 투철하여 막힘이 없는 것이며, ‘고름’은 올바르기에 치우침이 없는 것이고, 넓음은 만사에 넓게 미치는 것이니, 즉 각각 이치가 있게 된다." 황직경이 말했다. "‘통함’이란 ‘밝음’의 지극함이고 ‘넓음’이란 ‘고른 것’의 지극함입니다." 주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또한 맞는 말이다."
  6. 『朱子語類』 卷 94 問:「一是純一靜虛,是此心如明鑑止水,無一毫私欲填於其中。故其動也,無非從天理流出,無一毫私欲撓之。靜虛是體,動直是用。」曰:「也是如此。靜虛易看,動直難看。靜虛,只是伊川云:『中有主則虛,虛則邪不能入』,是也。若物來奪之,則實;實則暗,暗則塞。動直,只是其動也更無所礙。若少有私欲,便礙便曲。要恁地做,又不要恁地做,便自有窒礙,便不是直。曲則私,私則狹。」물었다. “(「성학장」에서) 하나라는 것은 純一하고 虛靜한 것이며, 이 마음 마치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과 같아서 아주 조금의 사욕도 심중을 메우지 않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움직일 때에 天理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털끝만큼도 사욕이 마음을 분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요할 때 텅 비워진 것은 體이고 움직일 때 곧은 것은 用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또한 이와 같다. 고요할 때 텅 비워진 것은 알기 쉽고 움직일 때 곧은 것은 알기 어렵다. ‘靜虛’는 정이천이 ‘마음속에 주재함이 있으면 텅 비워지고 텅 비워지면 사특한 것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한 말이 이것이다. 만약 사물이 와서 침탈하면 마음이 꽉 차고, (마음속이) 꽉 차면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면 막힌다. ‘動直’은 다만 움직일 때 별 다른 막힘이 없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으면 바로 막히고 굽게 된다. 이처럼 해야 하는데 또한 이처럼 하지 않으려고 하니, 곧 저절로 막히는 바가 있게 되고 곧지 않게 된다. 굽으면 사사롭게 되고, 사사로우면 편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