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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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타입 : 인물
한글항목명 : 희빈 장씨
한자항목명 : 禧嬪張氏
편자 : 자운서원팀 김소희



내용

  • 요약 : 조선 19대왕 숙종의 빈이며 20대왕 경종의 생모이다.
출생~사망 1659~1701
본관 안동
본명 장옥정(張玉貞)
별칭 장희빈, 옥산부대빈
국적 조선

본관은 안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은 1722년(경종 2)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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