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을사년(1665) 유수 조복양(趙復陽)의 상량문(上樑文)
원문
○ 현종 을사년(1665)에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지은 상량문(上樑文)은 다음과 같다.
“요새를 지켜서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막중한 임무를 맡은 유수의 소임이다. 옛 건물을 새롭게 꾸며 마침내 정사를 보는 집을 건립하였으니, 산과 들판은 광채를 더하였고, 고을 부로(父老)들은 경관이 바뀐 것이라 하였다. 돌아보건대 오직 이 강화만이 천연의 요새라 불렸다. 그 이유는 긴 강과 큰 물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어 못이 되었고, 길게 늘어선 높고 험한 봉우리는 반공에 우뚝 솟아 있어 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화는 황해도·경기도 하류의 문호에 있으면서 여섯 갈래 길이 모이는 해안의 요충지로서 고려의 왕이 오랑캐를 피해 궁궐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강화의 지난 사적을 기록해 본다면,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오래된 제단이 아직 있으며 임진난 때는 서쪽 요새로 파천하였으니 나라의 운명은 이로써 걱정이 없었다. 정묘년에 이르러서는 북방 오랑캐의 창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임금이 이곳에 잠시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 참람된 일이 생겼으니, 병자년에 나라가 다시 도탄에 빠졌지만 강화의 형승은 바뀌지 않아, 전과 다름없이 안팎으로 요새를 지켰지만, 평범하고 용렬하게 대응하여 더렵혀졌고 안전을 한낱 명주실에 맡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렇지만 조 유수의 거친 식견으로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고, 또한 주시에서 말한 지도가 무엇인지 듣기는 하였으나 재주는 거칠고 계략은 얕아서 비록 한 가지 장점이라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해도, 정성과 지혜를 다하였다. 대개 백가지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도 모두 참여해서 오직 관아 중건을 보고자 했다. 일찍이 지난 번 난리 초에 보면, 넓고 드높은 관아와 동헌이 있었지만 관부의 체제는 완성되지 않았었다. 작은 뜰과 깊게 박혀있는 작은 건물은 관민들이 일을 보러 오고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옛날 구양주가 활주서의 동헌을 새롭게 꾸미지는 않았고, 소장공의 부풍당 북쪽은 마땅히 증축되고 고쳐져야 했을 것이다. 저 남쪽 꼭대기에 있는 굽은 정자를 보라. 또 그 전면에 있는 이리저리 얽혀있는 옆면을 보라. 그 다음에는 점차 백성들의 집이 헐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심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말하듯이 지맥이 쇠절한 까닭인 것이니 하물며 전란 후에 반드시 돌아갈 땅임에랴. 마땅히 근신하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애 해악을 물리고 안정을 얻을 것이니 어찌 회필할 수 있겠는가. 철거할 것은 철거하고 세울 것은 세워 거주하는데 마땅함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무와 돌들을 주고받으면서 공역에 참여한 사람들의 뜻은 일 자체를 넘어 섰다. 작업 도구를 나란히 하고 장인들의 손놀림은 서로 다투었으니, 드디어 가운데 구역의 넓은 터를 열기에 이르렀다. 옛 수령 관아 중 동헌을 이곳에 옮기니 그로 인해 승지가 될 것이다. 어찌 마음을 다하여 계획을 세우고 기초를 닦지 않겠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어 눈앞에 우뚝 솟아있고 섬돌 아래는 상쾌하게 돋아져있다. 긴 회랑과 빗장 문은 멋지게 돌아있고 갖가지 꽃과 대나무는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굽이굽이 담장은 돌계단으로 받쳐지고 언덕 모양으로 둘러져 있는데, 동네 우물은 눈앞에 있고 성안에 부는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들여 마시기도 한다. 이곳에서 산하를 바라다보니 요새처럼 되어 있는 섬전체를 관할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에 이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길이길이 상서롭도록 길한 이름을 걸자. 아득하게 멀리 가고 아득하게 무사하도록. 이 집이 앞으로 좁게 느껴지고 전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사치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도록 지어야 한다. 그래 야만 진실로 이 강화부의 규모가 완성된다 할 것이다. 이 집에서는 사람들의 화목을 마땅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보통 사람들과 같이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군비를 잘 계산해서 증강시키는데 주의하면 사나운 외적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비록 풍속이 바뀐다고 해도 임금의 교화가 있으면 그 명령이 잘 시행될 것이다. 스스로 강화부에서 어떤 정책을 꾸민다 해도 관아 밖으로 새 나가지만 않는다면 우스운 얘깃거리라 해도 조용하게 이곳 안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이 관아 일대 지역을 잘 다스리면 그 어떤 근심이 있더라도 편하게 쉴 수가 있을 것이고 앉아서도 멀리 일어나는 풍파를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이름이 가진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들보를 잘 닦아 세우면 좋은 정치를 온전히 베풀 것이다. 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으로 던져라. 한강 서쪽은 바다에 접하여 통해있고 정성스런 마음은 매일 밤 조수를 따라 임금 계신 서울을 왕복하니 지척간이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으로 던져라. 포구 끝은 보이질 않아도 기운은 쌓여 가고 만 가지 곡식은 큰 배 실려 오고가는데 붉은 밤과 산삼만은 곧장 서울로 가는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마니산에서 곧장 가니 북쪽은 산이 가지런하여 산 앞에 늘어선 섬들이 마치 바둑판 위 돌 같은데 고기잡이 집들은 고기 잡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으로 던져라. 고려산의 맥은 송도에 있는데 도읍 옮긴 날 전 왕조를 생각하니 백만 오랑캐 군대는 얻지 못할 것을 엿보았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위로 던져라. 하얀 달빛 아래 먼데서 부는 바람은 허공에 떠있고 맑은 향이 나는 그림의 창끝은 한가로이 종이 한장을 거느릴 뿐. 아침에 부는 맑은 기운은 다시 새롭게 맛을 낸다.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로 던져라. 마음 속 사무쳐 홀로 노래 부르지만 대답하는 사람 없구나. 내 한 가지 소원은 늘 만물이 따뜻하게 있는 것이었는데, 내 추위를 가리고 어찌 드넓은 집을 얻으리오. 엎드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는 군민이 평안하고 화목하여 바다와 육지가 모두 맑은 기운으로 나라의 근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푸른 바다를 지키며 이어온 우리 조정은 관방을 굳건히 하여 태산과 같은 네 가지 근본이 있었으므로 해마다 풍년이 드는 낙토가 되어 오랫동안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기를 바란다. 또 여유가 있으면 화당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술이라도 서로 나누기를 바란다. 뽕나무 밭이 아무리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이 정해당만은 어그러짐이 없기를 바란다. 을사년 중춘에 쓰다.”
번역
○ 현종 을사년(1665)에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지은 상량문(上樑文)은 다음과 같다.
“요새를 지켜서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막중한 임무를 맡은 유수의 소임이다. 옛 건물을 새롭게 꾸며 마침내 정사를 보는 집을 건립하였으니, 산과 들판은 광채를 더하였고, 고을 부로(父老)들은 경관이 바뀐 것이라 하였다. 돌아보건대 오직 이 강화만이 천연의 요새라 불렸다. 그 이유는 긴 강과 큰 물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어 못이 되었고, 길게 늘어선 높고 험한 봉우리는 반공에 우뚝 솟아 있어 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화는 황해도·경기도 하류의 문호에 있으면서 여섯 갈래 길이 모이는 해안의 요충지로서 고려의 왕이 오랑캐를 피해 궁궐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강화의 지난 사적을 기록해 본다면,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오래된 제단이 아직 있으며 임진난 때는 서쪽 요새로 파천하였으니 나라의 운명은 이로써 걱정이 없었다. 정묘년에 이르러서는 북방 오랑캐의 창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임금이 이곳에 잠시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 참람된 일이 생겼으니, 병자년에 나라가 다시 도탄에 빠졌지만 강화의 형승은 바뀌지 않아, 전과 다름없이 안팎으로 요새를 지켰지만, 평범하고 용렬하게 대응하여 더렵혀졌고 안전을 한낱 명주실에 맡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렇지만 조 유수의 거친 식견으로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고, 또한 주시에서 말한 지도가 무엇인지 듣기는 하였으나 재주는 거칠고 계략은 얕아서 비록 한 가지 장점이라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해도, 정성과 지혜를 다하였다. 대개 백가지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도 모두 참여해서 오직 관아 중건을 보고자 했다. 일찍이 지난 번 난리 초에 보면, 넓고 드높은 관아와 동헌이 있었지만 관부의 체제는 완성되지 않았었다. 작은 뜰과 깊게 박혀있는 작은 건물은 관민들이 일을 보러 오고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옛날 구양주가 활주서의 동헌을 새롭게 꾸미지는 않았고, 소장공의 부풍당 북쪽은 마땅히 증축되고 고쳐져야 했을 것이다. 저 남쪽 꼭대기에 있는 굽은 정자를 보라. 또 그 전면에 있는 이리저리 얽혀있는 옆면을 보라. 그 다음에는 점차 백성들의 집이 헐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심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말하듯이 지맥이 쇠절한 까닭인 것이니 하물며 전란 후에 반드시 돌아갈 땅임에랴. 마땅히 근신하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애 해악을 물리고 안정을 얻을 것이니 어찌 회필할 수 있겠는가. 철거할 것은 철거하고 세울 것은 세워 거주하는데 마땅함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무와 돌들을 주고받으면서 공역에 참여한 사람들의 뜻은 일 자체를 넘어 섰다. 작업 도구를 나란히 하고 장인들의 손놀림은 서로 다투었으니, 드디어 가운데 구역의 넓은 터를 열기에 이르렀다. 옛 수령 관아 중 동헌을 이곳에 옮기니 그로 인해 승지가 될 것이다. 어찌 마음을 다하여 계획을 세우고 기초를 닦지 않겠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어 눈앞에 우뚝 솟아있고 섬돌 아래는 상쾌하게 돋아져있다. 긴 회랑과 빗장 문은 멋지게 돌아있고 갖가지 꽃과 대나무는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굽이굽이 담장은 돌계단으로 받쳐지고 언덕 모양으로 둘러져 있는데, 동네 우물은 눈앞에 있고 성안에 부는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들여 마시기도 한다. 이곳에서 산하를 바라다보니 요새처럼 되어 있는 섬전체를 관할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에 이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길이길이 상서롭도록 길한 이름을 걸자. 아득하게 멀리 가고 아득하게 무사하도록. 이 집이 앞으로 좁게 느껴지고 전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사치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도록 지어야 한다. 그래 야만 진실로 이 강화부의 규모가 완성된다 할 것이다. 이 집에서는 사람들의 화목을 마땅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보통 사람들과 같이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군비를 잘 계산해서 증강시키는데 주의하면 사나운 외적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비록 풍속이 바뀐다고 해도 임금의 교화가 있으면 그 명령이 잘 시행될 것이다. 스스로 강화부에서 어떤 정책을 꾸민다 해도 관아 밖으로 새 나가지만 않는다면 우스운 얘깃거리라 해도 조용하게 이곳 안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이 관아 일대 지역을 잘 다스리면 그 어떤 근심이 있더라도 편하게 쉴 수가 있을 것이고 앉아서도 멀리 일어나는 풍파를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이름이 가진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들보를 잘 닦아 세우면 좋은 정치를 온전히 베풀 것이다. 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으로 던져라. 한강 서쪽은 바다에 접하여 통해있고 정성스런 마음은 매일 밤 조수를 따라 임금 계신 서울을 왕복하니 지척간이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으로 던져라. 포구 끝은 보이질 않아도 기운은 쌓여 가고 만 가지 곡식은 큰 배 실려 오고가는데 붉은 밤과 산삼만은 곧장 서울로 가는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마니산에서 곧장 가니 북쪽은 산이 가지런하여 산 앞에 늘어선 섬들이 마치 바둑판 위 돌 같은데 고기잡이 집들은 고기 잡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으로 던져라. 고려산의 맥은 송도에 있는데 도읍 옮긴 날 전 왕조를 생각하니 백만 오랑캐 군대는 얻지 못할 것을 엿보았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위로 던져라. 하얀 달빛 아래 먼데서 부는 바람은 허공에 떠있고 맑은 향이 나는 그림의 창끝은 한가로이 종이 한장을 거느릴 뿐. 아침에 부는 맑은 기운은 다시 새롭게 맛을 낸다.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로 던져라. 마음 속 사무쳐 홀로 노래 부르지만 대답하는 사람 없구나. 내 한 가지 소원은 늘 만물이 따뜻하게 있는 것이었는데, 내 추위를 가리고 어찌 드넓은 집을 얻으리오. 엎드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는 군민이 평안하고 화목하여 바다와 육지가 모두 맑은 기운으로 나라의 근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푸른 바다를 지키며 이어온 우리 조정은 관방을 굳건히 하여 태산과 같은 네 가지 근본이 있었으므로 해마다 풍년이 드는 낙토가 되어 오랫동안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기를 바란다. 또 여유가 있으면 화당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술이라도 서로 나누기를 바란다. 뽕나무 밭이 아무리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이 정해당만은 어그러짐이 없기를 바란다. 을사년 중춘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