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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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 Data
- 타입: 인물
- 한글명 : 송시열
- 한자명 : 宋時烈
- 영문명 : Song Si-yŏl
- 생년 : 1607
- 몰년 : 1689
- 역할 : 학자, 관료
- 편자: 김사현
내용
-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
-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
-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은둔생활을 함.
-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1]
관련항목
- 문화유산
- 인물
- 문헌
- 사건
- 개념
웹자원
바깥고리
- ↑ {{#invoke:citation/CS1|citation |CitationClass=we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