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오경
메타데이터
- 타입 : 문헌
- 한글명 : 사서오경
- 한자명 : 四書五經
- 영문명 : Confucious Bibles
- 편자 : 한국학대학원 인문정보학 이사범
내 용
- 유가(儒家)의 경전.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일컫고, 오경(五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의 삼경(三經)과 춘추(春秋), 예기(禮記)를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서 오경 [四書五經]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상식, 2007.2.20, (주)신원문화사)
관련내용
사서(四書)
- 논어(論語)
《논어》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자하(子夏) 등 64제자설(六四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 ·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논어 [論語] (두산백과)
- 맹자(孟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맹자의 저술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저작물에 ‘맹자’라고 한 점 등을 들어 맹자의 자작(自作)이 아님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맹자가 죽은 뒤 그의 문인들이 그 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어쨌든 수미일관(首尾一貫)한 논조와 설득력 있는 논리의 전개, 박력 있는 문장은 맹자라는 한 인물의 경륜과 인품을 전해주기에 손색이 없다.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보완·확장하였다. 공자의 인(仁)에 의(義)를 덧붙여 인의를 강조했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말했으며, 민의에 의한 정치적 혁명을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는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가 깔려 있다. 사람의 천성은 선하며, 이 착한 본성을 지키고 가다듬는 것이 도덕적 책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맹자 [孟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학(大學)
중국에서 유교가 국교로 채택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이 기본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송대에 주희(朱熹)가 당시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性理學)의 체계를 세우면서 ≪예기≫에서 ≪중용≫과 ≪대학≫의 두 편을 독립시켜 사서 중심의 체재를 확립하였다.
49편으로 구성된 ≪예기≫ 중 제42편이 ≪대학≫에 해당한다. 주희는 ≪대학≫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 : 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중용≫과 ≪대학≫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학 [大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중용(中庸)
≪중용≫을 흔히 유교의 철학 개론서라 일컫는데, 그것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장(首章) 첫머리에서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은 유교 철학의 출발점과 그 지향처를 제시하고 있다.
≪중용≫은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반부·후반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중용 또는 중화 사상(中和思想)을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성(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 정자(程子)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不偏]을 중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不易]을 용이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용 [中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경(五經)
- 시경(詩經)
고대 중국의 시가를 모아 엮은 오경(五經)의 하나로, 본래는 3,000여 편이었다고 전하나 공자에 의해 305편으로 간추려졌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311편을 가려냈다 하나 이 중 여섯 편은 제목만 전한다.
공자는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 육경(六經) 중에서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그 만한 전범(典範)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시 300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라고 하였고, 아들 백어(伯魚)에게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시 공부를 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경 [詩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경(書經)
고대에도 제도상으로 사관(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변동·문물 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서(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王朝)의 이름을 위에 얹어 우서(虞書)·하서(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시(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 과정으로 삼았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서경≫은 이른바 이제삼왕수제치평(二帝三王修齊治平)의 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숭하는 요(堯)·순(舜) 이제에 우(禹)·탕(湯)·문무(文王·武王) 삼 왕을 합해 이들이 몸을 닦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 덕을 더욱 펼쳐서 나라를 다스리고 결국 온 천하에 평화를 이룩한, 그러한 도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경 [書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역경(易經)
불경을 번역하는 일. 역경에는 강설(講說)과 강석(講釋)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말만의 번역과, 그 말을 문자로 다시 옮겨 책으로 펴내는 일이 있다. 이 역경에 종사하는 승려를 역경삼장(譯經三藏)이라고 하는데, 중국에는 수많은 역경삼장들이 인도어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중국 역경의 기원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서역에서 온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낙양에서 ≪사십이장경 四十二藏經≫ 등 5부를 번역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한 한역의 시초로는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중국에서 활동한 안세고(安世高)와 지참(支讖)을 들고 있다.
중국의 역경이 큰 의의를 갖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문자가 한문이라는 점과 연관된다. 중국에서 새로운 경전이 들어와 역경이 되면 곧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해져 새로운 불교사상을 꽃피게 하였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경 [譯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춘추(春秋)
경문(經文)이 1,800여 조(條), 1만 6500자(字)로 이루어진 최초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로서, 춘추 시대 노(魯)나라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 12공(公) 242 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본래는 단행본이었지만 지금은 주석서인 춘추삼전(春秋三傳 : 公羊傳·穀梁傳·左氏傳)의 부속 형태로 전하고 있다.
‘춘추’라는 말은 시간의 추이(推移)를 상징한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약어로서 ‘일 년간(一年間)’이라는 뜻인데, 본래는 주 왕조(周王朝) 치하 각 제후국의 독자적인 편년사를 가리키는 통칭이었으며, ≪오월춘추 吳越春秋≫·≪여씨춘추 呂氏春秋≫·≪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등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춘추≫는 본래 노나라의 사관(史官)이인기록한 궁정 연대기(宮廷年代記)였는데, 여기에 공자(孔子)가 독자적인 역사 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필삭(筆削)을 가함으로써 단순한 궁정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추 [春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예기(禮記)
예경(禮經)이라 하지 않고 ≪예기≫라고 한 것은 예(禮)에 대한 기록 또는 주석(註釋)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그 설이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공자는 삼대(三代 : 夏·殷·周) 이래의 문물 제도와 의례(儀禮)·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스스로의 책무로 삼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예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공자 사후 각 국으로 흩어져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한 제자들에 의해 예에 대한 기록이 쌓여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생전의 스승에게서 들은 이야기, 학설, 스승과 나눈 대화 등을 문자로 정착시켰고,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기도 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자의 제자, 또는 그 문류(門流) 후학들에 의해 기록된 예설(禮說)들이 늘어나서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200여 편이나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기 [禮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문헌
See also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