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강화도방어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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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방어체계_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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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시간 | 1636년 12월 1일 |
사건 종료 시간 | 1637년 1월 30일 |
한글표기 | 병자호란 |
한자표기 | 丙子胡亂 |
영문표기 | |
사건 종류 | 외세침략 |
관련 방어시설 | 갑곶돈대 |
목차
내용
병자호란의 배경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하였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1]
-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리고, 인렬왕후의 문상(問喪)을 위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이들은 조선에 군신의 의를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이들은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면서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써 후금은 조선의 후금에 대한 반감을 알게 되었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2]
병자호란 발발
- 청 태종은 1636년 12월 1일에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다. 청군이 평양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는 사이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은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도를 수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인조도 그날 밤 숭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길을 막아 결국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3]
굴욕적인 전쟁의 결과
-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할 즈음 각 도의 관찰사와 병사가 거느리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 결국 강화도마저 점령 당하여 인조는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서문으로 출성해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으로 예를 행한 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4]
강화도 방어체계 관련
제물진 소속 갑곶돈대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조선 인조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피난할 때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왕자와 비빈(妃嬪)들이 피난할 때도 이곳을 통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방어전에서 이 지역이 청군과 조선군의 주요 싸움터였다. 당시 청군은 갑곶나루로 진격했는데 이곳이 바로 갑곶돈대가 세워진 지역이다. 주요 싸움은 갑곶돈대 앞 바다에서 청군과 조선수군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2차는 갑곶나루 지역에서 청군 상륙전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