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숙을 기린협으로 보내며
白永叔을 麒麟峽으로 보내며 (贈白永叔入麒麟峽序)
박지원 작
김승우 역
영숙은 명문거족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 있음을 지금도 아는 이들은 이를 슬퍼한다. 영숙은 서예에 능하고, 전거가 되는 관례에도 정통했다. 어렸을 때, 말타기·활쏘기를 잘했지만 그런 굳센 행동에도 과불급이 없었다. 비록 시운이 따르지 않아 높은 벼슬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큰 뜻은 마땅히 조상들의 충렬을 이음으로써 세상의 누구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아아, 영숙은 어찌하여 두메산골에 묻혀 사는 신세가 되었는가
영숙은 일찍부터 나와 더불어 금천 연암협에서 살았었다. 산이 깊고 길이 험하여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영숙은 나와 같이 갈대밭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가리키며 「저기다 화전을 일구고 뽕나무를 심어 울을 치면 조, 천석은 거두리」 하며, 부시를 쳐서 불을 질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세로 번지자, 놀란 꿩이 꺽꺽거리며 날아가고, 작은 노루 한 마리가 눈앞에서 불쑥 튀어나와 허겁지겁 달아났다. 영숙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동떨어진 계곡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오며, 얼굴을 찡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백년도 못 되는 인생, 어찌 산골에서 꿩·토끼와 시들 것이랴」하고 껄껄 웃었다.
영숙은 이제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기린협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것을 키워서 밭을 같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소금도 구할 수 없어 풀명자나무를 짓찧어 장을 담궈 먹는다. 그 외지고 험함을 어찌 연암협에 비할 것이랴. 영숙은 갈림길에 서서 나를 돌아보며 차마 거취를 정하기 어려운 듯 마냥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의 가는 길을 막으랴. 나는 영숙의 뜻을 장하게 생각하고, 그의 가난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