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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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 Project: 종묘
- Label: 참여자
- 항목명: 김만흥
- 한자: 金萬興
- Writer: 이한나
내용
- 생몰: 1905.10.15 ~ 1969
- 1964년 12월 7일, 종묘제례악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될 당시
- 보유종별: 해금(奚琴)
- 학력 및 경력: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졸업 / 국립국악원 전임악사
- 이왕직(李王職) 아악부원양성소에서 해금을 배워 1926년 제2기로 졸업하였고, 곧 이왕직아악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해금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30년대 전반기 이왕직아악부 시절 가곡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과 "봉황음"(鳳凰吟) 등 여러 조선아악 및 해금독주·해금반주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32년 11월 4일 이습회(肄習會)의 제2회 공연 때 "평조회상"(平調會相)의 "본영산"(本靈山)을 합주했고, "기수영창지곡"(其壽永昌之曲)을 독주한 이후 1941년 2월 6일 제100회 공연 때까지 꾸준히 공연활동에 출연하였다. 1947년 12월에 창단된 조선음악회(朝鮮音樂會)에서 김보남·김영윤·봉해룡 등과 함께 방송활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문교부 편수국의 장사훈 및 서울중앙방송국의 이혜구·이계원·이덕근·송영호의 도움으로 구왕궁아악부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전속조선음악회(專屬朝鮮音樂會) 소속으로 방송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6·25 사변 당시 육군 군예대(軍藝隊)의 대원. 육군 군예대 대장 성경린, 대원 김보남·김천흥·봉해룡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1년 4월 9일 부산에서 이주환이 국립국악원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이병성·박영복·김보남·김영윤·김기수·김성진·이덕환·김준현·홍원기·김태섭·이창배·김상기와 함께 예술사(藝術士)로 임명됐고, 국립국악원 장악과 예술사(1951~1955)·국악사(1955~1969)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