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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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5일 (수) 19: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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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明倫堂重修錄≫曰 "前縣監石敎授之珩來守學宮之任. 西距五十步許 創建居第 移舊講堂亦以連造講堂. 齋內無講堂而適有聖殿退瓦材? 聖殿?畢仍擧工匠 講堂舊전 옛터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齋任)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은 다음과 같다.

전현감 교수 석지형(石之珩)167)이 부임하여 학궁(學宮)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서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집을 짓고 예전의 강당을 이전하여 연이어 강당을 축조하였다. 재내(齋內) 에는 강당이 없고 마침 성전(聖殿) 안에 물린 기와와 자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준공되었다. 공장(工匠)을 동원하니 강당의 옛터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齋任)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읍 향교의 위전은 고을의 크기, 농지의 수가 법전에 수록되어 있다. 강도(江都)의 학교 위전(位田)은 만력 20년(1592) 임진왜란 이후에 전복(典僕)의 무리들이 훔쳐 팔았다. 또 고려가 강도로 들어와 병화(兵火)를 피한 39년에 볼음도(甫音島)로 학교의 위전을 옮겼으니 5결은 본도에 있으며 도행장(導行帳, 농지세에 관한 장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 큰 난리를 겪은 후에 이 섬의 백성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 등이 여러 번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담장 밖에 빼앗긴 전지를 환수하고, 다음으로 볼음도에 점유된 위전을 환수하기로 하였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 도유사 등 35인이 유상(留相)민공(閔公)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학교를 세우면 반드시 위지(位地)가 있어야 하고 위지가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반드시 위답(位畓)이 있으며, 위답이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예모(禮貌)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본부의 문묘(文廟)는 담장 아래로 4면이 모두 경작지로 옛날부터 노비 등이 대를 이어 전해서 자기의 소유물과 동일시하여 농사지어 선비를 양성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병화(兵禍)가 잇따르고 계축년·갑인년에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노비를 담당한 관리들이 헐값으로 팔아치워 여러 해가 지난데다가, 팔고 되팔고 하여 문서가 이뤄지고 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그렇게 내려오던 폐단들 하루아침에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명륜당(明倫堂)을 짓고서도 구차하게 좁은 땅을 빌리자니 뜰에서는 생도(生徒)가 예를 행할 수 없고 문에서는 똑바로 갈 수가 없어서 사람들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도 고쳐보고자 하지만 힘이 부칩니다. 지금의 문묘는 개축하고 길을 남쪽으로 곧게 내어 담장 밖의 빼앗긴 경작지를 학교의 위전으로 환원하여 소 속시키고 사방을 터서 정면을 바르게 하며 명륜당을 개축하여 시선을 높이는 것은 비단 여러 선비들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역시 국가에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묘의 터전과 위전의 규모는 모두 법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영원히 행해질 정사를 펴시기 바랍니다. 전후로 이뤄진 소송이나 문건 등을 살피고 판단하여 먼저 곧은 길을 내고 그러한 뒤에 명륜당을 개축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삼가 몸가짐을 바로해서 아룁니다.”

답변서는 다음과 같다.

“설령 학교의 위전이 백성들에게 잘못 편입되었더라도 경작지의 일은 이미 60년 전의 일이라서 지금에 와서 반환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전지로 바꾸는 것이 ʻ공사(公私)가 모두 편하다ʼ라고 하는 것이다. 살펴서 시행하라.”

번역

○≪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은 다음과 같다.

전현감 교수 석지형(石之珩)167)이 부임하여 학궁(學宮)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서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집을 짓고 예전의 강당을 이전하여 연이어 강당을 축조하였다. 재내(齋內) 에는 강당이 없고 마침 성전(聖殿) 안에 물린 기와와 자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준공되었다. 공장(工匠)을 동원하니 강당의 옛터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齋任)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읍 향교의 위전은 고을의 크기, 농지의 수가 법전에 수록되어 있다. 강도(江都)의 학교 위전(位田)은 만력 20년(1592) 임진왜란 이후에 전복(典僕)의 무리들이 훔쳐 팔았다. 또 고려가 강도로 들어와 병화(兵火)를 피한 39년에 볼음도(甫音島)로 학교의 위전을 옮겼으니 5결은 본도에 있으며 도행장(導行帳, 농지세에 관한 장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 큰 난리를 겪은 후에 이 섬의 백성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 등이 여러 번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담장 밖에 빼앗긴 전지를 환수하고, 다음으로 볼음도에 점유된 위전을 환수하기로 하였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 도유사 등 35인이 유상(留相)민공(閔公)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학교를 세우면 반드시 위지(位地)가 있어야 하고 위지가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반드시 위답(位畓)이 있으며, 위답이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예모(禮貌)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본부의 문묘(文廟)는 담장 아래로 4면이 모두 경작지로 옛날부터 노비 등이 대를 이어 전해서 자기의 소유물과 동일시하여 농사지어 선비를 양성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병화(兵禍)가 잇따르고 계축년·갑인년에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노비를 담당한 관리들이 헐값으로 팔아치워 여러 해가 지난데다가, 팔고 되팔고 하여 문서가 이뤄지고 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그렇게 내려오던 폐단들 하루아침에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명륜당(明倫堂)을 짓고서도 구차하게 좁은 땅을 빌리자니 뜰에서는 생도(生徒)가 예를 행할 수 없고 문에서는 똑바로 갈 수가 없어서 사람들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도 고쳐보고자 하지만 힘이 부칩니다. 지금의 문묘는 개축하고 길을 남쪽으로 곧게 내어 담장 밖의 빼앗긴 경작지를 학교의 위전으로 환원하여 소 속시키고 사방을 터서 정면을 바르게 하며 명륜당을 개축하여 시선을 높이는 것은 비단 여러 선비들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역시 국가에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묘의 터전과 위전의 규모는 모두 법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영원히 행해질 정사를 펴시기 바랍니다. 전후로 이뤄진 소송이나 문건 등을 살피고 판단하여 먼저 곧은 길을 내고 그러한 뒤에 명륜당을 개축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삼가 몸가짐을 바로해서 아룁니다.”

답변서는 다음과 같다.

“설령 학교의 위전이 백성들에게 잘못 편입되었더라도 경작지의 일은 이미 60년 전의 일이라서 지금에 와서 반환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전지로 바꾸는 것이 ʻ공사(公私)가 모두 편하다ʼ라고 하는 것이다. 살펴서 시행하라.”

주석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