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정구대회
정구
정의
중앙에 네트를 두고 라켓으로 연식 공을 양쪽에서 치고 받는 운동경기.
해설
테니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테니스가 단단한 경식 공을 사용하는 데 대하여 연식정구라고도 한다. 경기장의 크기는 10.97×23.77m의 장방형이며, 네트의 높이는 1.06m이다. 공은 백색 고무제품으로 말랑말랑하며 지름 6.6㎝, 무게 30∼31g으로 규정하고 있다. 라켓은 프레임과 자루는 목제로 하고 거트를 치며 무게는 285g 내외, 전장은 69㎝가 표준이다. 테니스 라켓과 비슷하나 더 가볍고 목부분이 가늘다.
경기방법은 토스에 의하여 서브권이나 코트를 결정한 뒤 서브를 넣음으로써 시작되며, 한 게임 또는 두 팀의 게임 스코어의 합이 홀수일 때 코트를 바꾼다. 한 게임의 승패는 4점을 선취하여야 하며, 다만 양 팀이 3점씩을 얻어 3:3이 되면(deuce) 어느 팀이건 연속 2점을 선취하여야 이긴다.
시합은 9게임제(5게임 선승제)와 7게임제(4게임 선승제)가 있다. 연식정구와 테니스의 차이점은 공의 무게 등 용구의 차이 외에 스코어를 부르는 법이 다르며, 연식정구는 복식경기를 원칙으로 하고 전·후위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 밖에 승패결정에 있어 테니스는 세트(set)제이고 연식정구는 게임(game)제이다. 기술상의 차이는 몇 가지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점은 라켓의 한 면만으로 포핸드 스트록과 백핸드 스트록을 한다는 점이다.
정구의 시초
1890년 경 테니스용품을 구하기 어렵게 된 일본에서 말랑말랑한 고무공과 가벼운 라켓으로 변형된 테니스를 하게 된 것이 정구의 시초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 정구가 들어온 것은 1908년 4월 지금의 재무부에 해당하는 탁지부(度支部)의 일반 관리들이 친목을 위한 회동구락부(會洞俱樂部)를 조직, 바둑·장기·궁사(弓射)·정구 등의 시설을 갖추고 이듬해 5월 여흥식(餘興式) 경기회를 개최한 것이 최초이다. 이들은 봄·가을 2회에 걸쳐 정구대회를 실시하였다. 1910년에는 농상공부의 직원들도 성계구락부(星溪俱樂部)를 만들었으며, 1911년 5월에는 왜성구락부(倭城俱樂部)·한국은행·영림창(營林廠)·동양척식회사 등 여러 팀이 출전하여 시합을 가졌다.
같은 해 10월 경성일보사가 우승기를 제공하여 제1회 경용정구대회(京龍庭球大會)를 개최함으로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크고 작은 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1912년에 정구선수를 총망라한 경성보이스가 조직되어 매월 1회씩 연12회의 대회를 개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경성의 17개 군소 정구단체가 전 경성 정구구락부를 조직하였으며, 1921년 10월의 제1회 전 조선정구대회에는 청년단 9개 팀, 중학 8개 팀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1933년에는 조선정구연맹이 발족되어 제1회 전 조선연식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는 중등부·전문부·일반부로 나누어서 실시하였다.
같은 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제7회 메이지신궁대회(明治神宮大會)에 출전하여 전문부에 보성전문학교의 천계근·노병익조가 일본의 주오대학(中央大學)을 결승에서 4:0으로 이겨 우승하였고, 일반부 조선팀이 일본 대판팀을 4:1로 이겨 각각 우승하였다.
1934년 8월 동경에서 개최된 전일본정구대회 중등부·일반부에서 우승하였고, 이듬해 8월 전일본 선발군이 내방하여 전경성군(全京城軍)과 대전하여 다시 우리 나라가 우승하였다.
이어 1935년 10월의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부터 제13회까지 우승하는 등 연10년을 계속 제패하여 민족항일기의 암울한 시대에 일본을 압도, 우리 민족의 역량을 드높였다. 이와 같이 초기의 우리 나라 정구는 큰 활기를 띠었으나 1942년 일제의 구기경기폐지정책으로 광복 때까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조선정구협회가 조직되고 각종 정구대회가 개최되는 등 중학교급 이상의 각종 학교는 물론 관공서·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레저 및 스포츠로 많은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 뒤 테니스의 전세계적인 보급 및 올림픽 경기종목에 대한 집중적인 육성 등으로 정구는 침체된 면이 없지 않으나, 아직도 많은 팀과 동호인들에 의하여 꾸준한 발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