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용정동(龍井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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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19일 (일) 22: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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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용정동(龍井洞242)) 萬壽山南洞保明만수산243) 남쪽에 보명동244)이 있는데, 嵬然古廟赫然名높다란 옛 사당에 빛나는 명성 있네. 李公去後雲仍在이공이 가신 후에 후손이 이어져, 世世惟殫享祀誠대대로 정성 다해 제사를 지내오네. ○ 임진년(1592) 난리에 명나라 총병(摠兵) 이여매(李如梅)가 그의 아버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과 함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로 왔었다. 그 자손들이 계속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이면(李葂)이라고 하는 자는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 작은 마을에 와서 거주하였으므로 그 마을 이름을 보명동(保明洞)이라고 하였다. 영조가 이것을 듣고 그 터에서 영원백 부자를 제사지내주었다.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후손 이기혁(李基赫)245)은 무과에 급제하여 병사를 거쳐서 관직이 한성 판윤(漢城判尹)까지 올랐다. 또 그 아들은 정평 부사(定平府使)를 지냈다.

241) 정실(1701∼1776)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공화(公華), 호는 염재(念齋). 242) 강화읍 용정리로, 용구물 용구말이라고도 한다. 243) 만수산은 당산이라고도 하며, 갑곶리에서 용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고개라고 한다. 244) 보명동은 용구물 남동쪽에 있다. 245) 이기혁(1810년 출생) 자는 원서(元緖), 본관은 합천(陜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