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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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16일 (목) 11: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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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한국어 개관

1933년 강화도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직물으로 폐업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2018년 보수공사 끝에 카페,전시실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공장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살리고 기계들을 비롯한 1970년대 일상 소품부터 수입 장식품들을 곳곳에 배치해서 부지 전체가 거대한 설치 미술품처럼 운영되고 있다. 여러 방송매체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점차 입소문을 타고 현재는 강화도 최고의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건물 외관은 1958년 폐업된 당시의 원형 그대로 두고 내부를 카페, 전시실, 작업공간으로 리모델링하였다. 보일러실은 주문 및 음료제조 공간으로, 가장 큰 건물인 공장 내부에는 양쪽으로 의자를 배치해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테이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의 콘크리트 구조물뿐 아니라 기계를 들어낸 곳에 길을 만들고 인조 직물을 생산하던 방직기계 지지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

영문 개관

Cho Yang Bangjik is the first textile factory established in the Ganghwa Island area in 1933. It had been left unattended since its closure, but was reborn as a cafe and exhibition room space after renovation in 2018. The entire site is run like a giant installation art, keeping the structure of the factory building intact and placing imported ornaments from machines and other everyday items in the 1970s. Ganghwa Island is now a top tourist attraction, as many media outlets and media outlets are known.

The exterior of the building was remodeled into a cafe, exhibition room, and work space, leaving the interior intact from the time it was closed in 1958. Boiler rooms are used as ordering and beverage manufacturing spaces, while chairs are placed on both sides inside the factory, the largest building, to serve as tablespaces for customers visiting cafes. In addition to the concrete structure of the time, the textile supports that used to make roads and produce artificial fabrics were preserved

지도

해설

조양방직 카페

조양방직 카페신문리미술관의 설립이용철 대표는 지인의 소개로 폐공장을 방문, 리모델링을 결심하고 1년여간 폐공장 부지를 임대하여 2017년 7월 2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쓰레기 치우는 것만 몇 달 걸렸다고. 이 대표는 " 세상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이곳이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조양방직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설치 미술작품으로 인식하고, '신문리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2018년 7월 새롭게 개관하였다. "우리 박물관이 물건에 대한 시선을 달리해보는 체험학습장이 되면 좋겠어요. 트랙터나 경운기로 테이블을 만든 것도 그런 의도가 있거든요. [..] 하찮다고 낙인찍은 사물의 품격이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특히 어린이들이 느낄 수 있으면 해요." [2] "과거 조양방직이 강화읍의 부흥을 이끌었듯, 현재 조양방직이 재탄생해 다시 강화읍으로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해 이곳에서 결혼식도 하고 국제회의도 열 수 있게 하는 게 꿈" [3]

주요 연혁

   · 1933년 : 강화지주였던 홍재묵, 홍재용 형제가 조양방직 주식회사 설립
              - 자본금 50만원(불입자본금 12만 5,000원)으로 시작
              - 건축 연면적 700여평, 일본 나고야, 오사카 등지에서 기계 50대를 수입
              - 주로 인조견 생산
   · 1942년 : 홍씨 형제는 경영이 어려워지자 일본기업 미쓰이(三井:삼정물산) 출신 이세 
               현이 인수
   · 1958년 : 조양방직 폐업
   · 2017년 : 현 대표 이용철이 인수, 7월 2일 공사 시작
   · 2018년 :「신문리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7월 24일 개관

직물공업

직물공업은 실을 원료로 하여 직물을 제조하는 산업으로 우리나라의 직물공업은 1960년 중반부터 방직공업과 더불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로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그 규모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며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 견직물업의 생산공정

① 養蠶(누에 기르기) ② 乾繭(고치 말리기) ③ 選繭(고치 고르기) ④ 煮繭(고치삶기), ⑤ 繰絲(실켜기) ⑥ 揚返(되올리기) ⑦ 束裝(타래정리) ⑧ 製織(직포제조) ⑨ 染織(가공)

○농민: 잠업을 통해 누에고치를 기름.
○제사업자: 누에고치로 생사를 만듦.
○견직물업자:  생사를 직조해 견직물을 만든다.

강화 직물산업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생산지였다. 한때 30여 개의 직물공장이 몰려있었고, 그 규모는 당시 섬유산업의 메카였던 [대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4702&cid=46618&categoryId=46618]와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수천 명의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며 강화 지역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대구를 중심으로 현대식 섬유공장이 들어서고 나일론 등 인조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 직물 산업은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소창 공장 10여 곳만이 대부분 가내 수공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해방전 강화도의 직물공업은 주로 가내수공업으로 주로 면직물을 생산하여 일주일에 한번씩 서는 장날에 판매하는 수준이었다. 일제 말 조양방직과 같은 근대적 직물공장이 세워지면서 이후 인견직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주요 공장으로 오늘날 조양방직으로 잘 알려진 조양견직주식회사가 있었으며, 십자당직물, 강화산업조합 등이 있었다. 이들 공장은 100명 이하의 종업원과 8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었고, 직조기는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었다. 규모면에서 많은 생산량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나 기존의 직물공장에 심도직물등이 합세하여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 부흥기: 50~60년대

주요 공장: 남화직물, 심도직물, 상호직물, 평화직물, 동광직물, 무림직물, 삼화직물, 상호직물

50년대 강화도 직물공업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다가 60년대 이루어 절정을 이루었다. 전후 필품에 대한 수요 급증으로 직물공장들이 호황을 누린 까닭이었다. 전국적으로 강화의 인조견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고 수요량이 공급량을 항상 초과하는 부흥기를 이끌었다. 직물 공업의 활성화에 힘입어 50년대 들어서 직물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가 특히 인격직을생산하는 공장수가 급격히 늘어나 30여개에 달하였다. 때분에 4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직물공장들은 수요의 대처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당시 교통조건이 열악해 강화도와 육지를 잇는 수단은 하루에 한번 오가는 나룻배뿐이었다. 동란 이후 급성장을 보이기 시작한 근대적 직기를 갖춘 군소 공장들의 수가 50년에 비해 배에 달했다. 60년대 중반에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업체간 과잉경쟁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후 수출정책에 따라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일대 등 타지방으로 직물공업의 주도권이 넘어게 되었다. 강화도에서는 면직(천연섬유), 인견직(인조 섬유)을 생산하는 반면 대구 등 타지방에서는 합성 섬유의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한 것도 타격의 원인이었다. 60년대 강화에서 생산된 면직, 인견직은 주로 옷감, 이불감등으로 사용되었다.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웽블리 넥타이가 쏟아져 나오고, 무명천이 '강화소창'이란 이름을 달고 퍼져나갔다. [4]

  • 정체기: 70년대

주요공장: 동광직물, 경도직물, 풍농직물 이 시기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생산품 수송이 용이해지게 되었으나 강화의 직물공업은 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며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임금상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60년대부터 있었던 기존의 공장들이 좁은 내수 시장에서 과다 경쟁을 벌인데다가 석유 파동 후 그 어려움이 가중되어 73년과 74년에 걸쳐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된다. 폐업을 하지 않은은 공장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60년대 인견직 생산에만 의존하던 생산체제를 폴리에스테르 등 화학 섬유 생산체제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때 생산되었던 제품들을 살펴보면 커텐지, 카바지, 양장지 등이다.

  • 쇠퇴기: 80년대 이후

50,60년대 '강화 인견'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강화도의 직물 공업이 현재는 쇠퇴 일로를 걷고 있다. 앞에서 역사적으로 살펴본 결과 석유 파동 후 임금 상승 압박과 국내 시장내 업체간 과잉 경쟁, 또한 화학 섬유처럼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점이 그 원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70년대 초 많은 공장들이 폐업을 하게 되고 또 설비가 기계화됨에 따라 종업원수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강화도 전체 인구수의 변화를 보더라도 직물 공업의 성장 쇠퇴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직물 공업이 번창하던 시기에는 인구도 증가 일로에 있었으며 70년대를 거쳐 80년대 들어서는 직물 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인구도감소 일로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서너 개 공장이 가내수공업을 하며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73년의 석유 파동 후 화학 섬유 생산 체제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과거 수십여개에 달하던 직물 공장들이 미도직물, 동진직물, 남화직물, (주)두울 등 4개의 법인 기업체와 소규모의 개인 기업이 있을 따름이다. 현재 이들 업체들은 국내 대기업의 하청을 받거나 수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5] [6]


시각자료

사진

영상

가상현실

출처

  1. 홍인희, "[세상읽기 조양방직과 도시재생", 『인천투데이』, 2019년 3월 25일]
  2. 김세라,"조양방직은 세월이 다듬은 최고의 예술작품입니다.", 『강화뉴스』, 2018년 7월 24일
  3. 윤설아, "강화읍에 숨을 불어넣다, 카페로 부활한 강화도 조양방직", 『경인일보』, 2019년 2월 15일
  4. 『RE:ID 인천의 재발견: RE:INCHEON DISCOVER 』,인천시, 바이에듀, 2019. 127쪽.
  5. 한상욱,「60년대 강화 직물노조사건과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인천학연구』 23권,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15, 127-173(47쪽)
  6. 류중현, 『강화직물 비단 내력 소고 』, 강화문화 제 호, 강화문화원 , 2009.
  7. "낡은것들의 재탄생...카페·문화공간으로!"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4. 편집 이수민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