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상아(上衙)

DH 교육용 위키
김은숙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15일 (수) 07:29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以寬堂上覺新 (이관당상각신)     이관당에 오르니 새로 맑아짐을 느끼는데, 
伊昔保釐文武 (이석보리문무) 그 옛적 보리문무영이 있었네.
畵角時時簾外起 (화각시시렴외기) 때때로 화각 소리 주렴 밖으로 들렸으리니,
平臨六十六州 (평림육십육주) 예순 여섯 고을과 성곽 평화롭게 다스렸네.

○ 이관당(以寬堂)은 현윤관(顯允館)이라고 하는데 유수가 정사를 보는 정아(正衙)이다. 문무(文武)의 이름난 재신(宰臣)들이 와서 다스렸다. 외삼문을 진어보리영(鎭禦保釐營)이라고 했으며 내삼문은 호수문(虎睡門)이라고 하였다. [1] 심영(沁營)은 경기 35읍, 황해 17읍, 충청13읍을 관할하였다.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人說官榮我慮 (인설관영아려)     벼슬길이 영화롭다지만 나만은 심려 깊어 
夜無眠睡晝呻 (야무면수주신) 밤에도 잠 못자고 낮에도 신음하네.
春天乍霽偏憂旱 (춘천사제편우한) 봄에는 비개이면 가뭄이 걱정되고
夏日仍霾旋懼 (하일잉매선구) 여름에는 비내려서 장마될까 두렵다네.
炎見野耘嫌廣廈 (염견야운혐광하) 뜨거운 날 김매기를 보고서 넓은 집을 혐오하고
凍聞村織愧重 (동문촌직괴중) 추울 때엔 베짜기를 듣고서는 겹이불이 부끄럽네.
老身却記林居味 (노신각기림거미) 숲속에 사는 재미 늙어서 기억하니
飯煑山蔬愜素 (반자산소협소) 밥에다가 산나물은 내 마음에 흡족하네.


○ 유수 이복원(李福源)의 시는 다음과 같다.

腐儒生老太平天 (부유생로태평천)     태평한 천하에서 못난 선비 늙었으니
海國分符亦勝 (해국분부역승) 이 섬에서 벼슬한 건 훌륭한 인연일세.
一渡甲津多感慨 (일도갑진다감개) 갑곶진을 한번 건너 느끼는 게 많으니
無人不說丙丁 (무인불설병정) 오랑캐의 난리를 모두가 말한다네.


○ 동악(東岳) 이안눌이 동헌에 쓴 벽상시(壁上詩)는 다음과 같다.

畿內關防島上 (기내관방도상)     기내의 관방은 이 섬에 이 고을이고
海門江口勢環 (해문강구세환) 바다와 강에는 형세가 둘러있네.
國朝置鎭三千戶 (국조치진삼천호) 나라에서 진을 두니 3천 호를 이루었고
王氏移都四十 (왕씨이도사십) 왕씨가 천도하니 40년의 세월이네.
卽墨獨全齊走日 (즉묵독전제주일) 즉묵지방 보존하니 제나라가 날을 달리고
晉陽方屬趙歸 (진양방속조귀) 진양지방 소속되니 조나라의 계획이었네.
龍種恐負明時倚 (용종공부명시의) 용종이 질까봐 밝은 때에 의지하고
手握靑萍倚古 (수악청평의고) 청평검을 손에 잡고 옛 누에 기대네.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太守新陞尹 (태수신승윤)      태수가 새롭게 부윤으로 승진하니
前朝舊徙 (전조구사) 예전 고려 때엔 도읍을 옮겼었지.
地形留險固 (지형류험고) 지형은 험하고 견고하여
廷議備難 (정의비난) 조정 의논으로 유사시를 대비했네.
廩匱增租賦 (름궤증조부) 세금이 많이 걷혀 창고가 가득차고
軍興減版 (군흥감판) 전쟁나서 판도가 줄어드네.
心慚䟽懶性 (심참소라성) 마음은 나태한 성품을 털어내고
重寄荷恩 (중기하은) 특별한 은혜에 거듭 부치네.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十年重按古城 (십년중안고성지)     10년 동안 옛 성지를 거듭해서 살펴보니
坐度星霜屆一 (좌도성상계일기) 앉아서 헤아리니 많은 세월 지났구나.
車駕曾臨兵亂日 (거가증림병란일) 난리가 일어나니 수레 가마 임하고
里閭俱散旱荒 (리려구산한황시) 마을 사람 흩어지고 가뭄도 들고 마네.
才微只合聲名損 (재미지합성명손) 재주가 볼품없어 명예는 손상되고
政拙元無惠愛 (정졸원무혜애유) 정사는 졸렬해서 남긴 은혜 없어라.
心似履氷頭似雪 (심사리빙두사설) 마음은 얼음 밟듯 머리는 눈내린 듯
俸錢空愧荷恩 (봉전공괴하은사) 녹봉만 챙겼으니 누린 은덕 부끄럽네.

○ 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歲飢無術活民 (세기무술활민)     흉년이라 백성 살릴 방법 없고 
春夏年年日夜 (춘하년년일야) 봄여름엔 해마다 밤낮으로 근심 걱정.
嚴譴幸稽三考過 (엄견행계삼고과) 견책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 받았으니
謬恩虛飜一冬 (류은허번일동) 잘못된 은혜에 또 한 해가 지났구나.
謾傳父老俱相賀 (만전부로구상하) 부로들은 경하한다 그릇되이 전하니
獨對山河益自 (독대산하익자) 산하를 마주하고 나 스스로 부끄럽네.
世事傳難身太老 (세사전난신태로) 세상에선 어렵다하고 이 몸은 너무 늙어
未酬隆委恐招 (미수륭위공초) 기대에 못미쳐서 허물될까 두렵구나.


○ 정해당(靜海堂)은 이관당(以寬堂) 남쪽에 있다.

○ 현종 을사년(1665)에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지은 상량문(上樑文)은 다음과 같다.

“요새를 지켜서 국가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막중한 임무를 맡은 유수의 소임이다. 옛 건물을 새롭게 꾸며 마침내 정사를 보는 집을 건립하였으니, 산과 들판은 광채를 더하였고, 고을 부로(父老)들은 경관이 바뀐 것이라 하였다. 돌아보건대 오직 이 강화만이 천연의 요새라 불렸다. 그 이유는 긴 강과 큰 물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어 못이 되었고, 길게 늘어선 높고 험한 봉우리는 반공에 우뚝 솟아 있어 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화는 황해도·경기도 하류의 문호에 있으면서 여섯 갈래 길이 모이는 해안의 요충지로서 고려의 왕이 오랑캐를 피해 궁궐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강화의 지난 사적을 기록해 본다면,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오래된 제단이 아직 있으며 임진난 때는 서쪽 요새로 파천하였으니 나라의 운명은 이로써 걱정이 없었다. 정묘년에 이르러서는 북방 오랑캐의 창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임금이 이곳에 잠시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 참람된 일이 생겼으니, 병자년에 나라가 다시 도탄에 빠졌지만 강화의 형승은 바뀌지 않아, 전과 다름없이 안팎으로 요새를 지켰지만, 평범하고 용렬하게 대응하여 더렵혀졌고 안전을 한낱 명주실에 맡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렇지만 조 유수의 거친 식견으로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고, 또한 주시에서 말한 지도가 무엇인지 듣기는 하였으나 재주는 거칠고 계략은 얕아서 비록 한 가지 장점이라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해도, 정성과 지혜를 다하였다. 대개 백가지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도 모두 참여해서 오직 관아 중건을 보고자 했다. 일찍이 지난 번 난리 초에 보면, 넓고 드높은 관아와 동헌이 있었지만 관부의 체제는 완성되지 않았었다. 작은 뜰과 깊게 박혀있는 작은 건물은 관민들이 일을 보러 오고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옛날 구양주가 활주서의 동헌을 새롭게 꾸미지는 않았고, 소장공의 부풍당 북쪽은 마땅히 증축되고 고쳐져야 했을 것이다. 저 남쪽 꼭대기에 있는 굽은 정자를 보라. 또 그 전면에 있는 이리저리 얽혀있는 옆면을 보라. 그 다음에는 점차 백성들의 집이 헐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심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말하듯이 지맥이 쇠절한 까닭인 것이니 하물며 전란 후에 반드시 돌아갈 땅임에랴. 마땅히 근신하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해애 해악을 물리고 안정을 얻을 것이니 어찌 회필할 수 있겠는가. 철거할 것은 철거하고 세울 것은 세워 거주하는데 마땅함을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무와 돌들을 주고받으면서 공역에 참여한 사람들의 뜻은 일 자체를 넘어 섰다. 작업 도구를 나란히 하고 장인들의 손놀림은 서로 다투었으니, 드디어 가운데 구역의 넓은 터를 열기에 이르렀다. 옛 수령 관아 중 동헌을 이곳에 옮기니 그로 인해 승지가 될 것이다. 어찌 마음을 다하여 계획을 세우고 기초를 닦지 않겠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어 눈앞에 우뚝 솟아있고 섬돌 아래는 상쾌하게 돋아져있다. 긴 회랑과 빗장 문은 멋지게 돌아있고 갖가지 꽃과 대나무는 여기저기 심어져 있다. 굽이굽이 담장은 돌계단으로 받쳐지고 언덕 모양으로 둘러져 있는데, 동네 우물은 눈앞에 있고 성안에 부는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들여 마시기도 한다. 이곳에서 산하를 바라다보니 요새처럼 되어 있는 섬전체를 관할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에 이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길이길이 상서롭도록 길한 이름을 걸자. 아득하게 멀리 가고 아득하게 무사하도록. 이 집이 앞으로 좁게 느껴지고 전체가 없어진다고 해도 사치하지 않고 누추하지 않도록 지어야 한다. 그래 야만 진실로 이 강화부의 규모가 완성된다 할 것이다. 이 집에서는 사람들의 화목을 마땅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며 보통 사람들과 같이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군비를 잘 계산해서 증강시키는데 주의하면 사나운 외적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비록 풍속이 바뀐다고 해도 임금의 교화가 있으면 그 명령이 잘 시행될 것이다. 스스로 강화부에서 어떤 정책을 꾸민다 해도 관아 밖으로 새 나가지만 않는다면 우스운 얘깃거리라 해도 조용하게 이곳 안에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이 관아 일대 지역을 잘 다스리면 그 어떤 근심이 있더라도 편하게 쉴 수가 있을 것이고 앉아서도 멀리 일어나는 풍파를 잘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이름이 가진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들보를 잘 닦아 세우면 좋은 정치를 온전히 베풀 것이다.

어영차 떡을 들보 동쪽으로 던져라. 한강 서쪽은 바다에 접하여 통해있고 정성스런 마음은 매일 밤 조수를 따라 임금 계신 서울을 왕복하니 지척간이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남쪽으로 던져라. 포구 끝은 보이질 않아도 기운은 쌓여 가고 만 가지 곡식은 큰 배 실려 오고가는데 붉은 밤과 산삼만은 곧장 서울로 가는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마니산에서 곧장 가니 북쪽은 산이 가지런하여 산 앞에 늘어선 섬들이 마치 바둑판 위 돌 같은데 고기잡이 집들은 고기 잡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북쪽으로 던져라. 고려산의 맥은 송도에 있는데 도읍 옮긴 날 전 왕조를 생각하니 백만 오랑캐 군대는 얻지 못할 것을 엿보았구나. 어영차 떡을 들보 위로 던져라. 하얀 달빛 아래 먼데서 부는 바람은 허공에 떠있고 맑은 향이 나는 그림의 창끝은 한가로이 종이 한장을 거느릴 뿐. 아침에 부는 맑은 기운은 다시 새롭게 맛을 낸다. 어영차 떡을 들보 아래로 던져라. 마음 속 사무쳐 홀로 노래 부르지만 대답하는 사람 없구나. 내 한 가지 소원은 늘 만물이 따뜻하게 있는 것이었는데, 내 추위를 가리고 어찌 드넓은 집을 얻으리오. 엎드려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는 군민이 평안하고 화목하여 바다와 육지가 모두 맑은 기운으로 나라의 근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푸른 바다를 지키며 이어온 우리 조정은 관방을 굳건히 하여 태산과 같은 네 가지 근본이 있었으므로 해마다 풍년이 드는 낙토가 되어 오랫동안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기를 바란다. 또 여유가 있으면 화당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술이라도 서로 나누기를 바란다. 뽕나무 밭이 아무리 다른 것으로 바뀌어도 이 정해당만은 어그러짐이 없기를 바란다. 을사년 중춘에 쓰다.”

기행지도

인물

  • 이안눌(1571∼163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 이복원(1719∼179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 조복양(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참고

  • 즉묵(卽墨)은 전국시대 제(齊)의 고을 이름이다. 연(燕)의 장수 악의(樂毅)에게 대패하여 거(居)와 즉묵 두 고을만 남게 되자, 즉묵 사람들이 전단(田單)[2](사기/전단열전)을 장수로 추대하여 기이한 전략으로 빼앗긴 70여 성을 되찾았다.
  • 진양(晋陽)은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고을 이름이다. 진나라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에게 진양을 다스리라고 하자, 윤탁은 진양을 보장(保障)이 되게 하기 위해 세금을 절반으로 줄였고, 그 후 조간자의 아들 지백(智伯)이 난을 피해 진양에 들어갔을 때, 윤탁의 관대한 정치 덕분에 백성들이 끝내 배반하지 않았다고 한다. <國語 晋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