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한옥 대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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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민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5월 14일 (화) 16: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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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8년에 강화도의 천석꾼 황국현이 세운 근대 한옥. '황씨고택', '황부자집', '김구 고택' 등으로 불림.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7

관련 인물들

황국현

대명헌을 지은 인물은 이곳의 집주인이었던 황국현이었다. 그의 행적과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가 얼마남아있지 않지만, 대명헌이 고급 목재(백두산 잣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상당한 재력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고택은 80년 넘게 황국현의 후손이 소유하다가 2012년 말 도예가 최성숙이 매입하였다. [1]

김근호

첫째 사위는 김근호로 선박회사인 동양기선 전무와 배재학당 이사장을 지냈다. 김근호는 1934년 강화도에 처음 전기를 공급하고 전화를 설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지던 강화도 직물산업이 근대적 기틀을 갖추고 국내 최대규모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범 김구

김구선생과 각별한 인연이 있던 건물인 만큼, 범이 직접 쓴 '신독’이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에는 1900년 김구선생이 25세 때 2월 남문(강화읍 남산리 소재)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 김주경이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주경은 김구 선생이 교도소에 있을 때 옥바라지를 한 인물로 김구명운동을 하다 재산을 탕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1903[1900년?] 년 인천감리서 탈옥한 김구 선생은 김주경(김득경)을 만나러 강화도에 왔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고 3개월간 이 고택에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해방 전 김구선생은 수차례 이 고택을 찾아와 사랑방에 머물며 누마루에서 독립투사들과 회의를 하곤 했다. 해방 뒤 가장 먼저 이 고택을 찾았는데 김주경을 수소문하기 위해 강화에 방문한 것이었다. 이 때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2]

가옥구조

1928년에 건립된 건물로 서양 또는 일본의 건축양식이 전통 한옥과 어우러진 양식을 볼 수 있다.

마루 : 헤링본(herringbone) 무늬

고택의 누마루는 영국풍이 결합된 양식이다. '헤링본(herringbone)'이라고 하는 무늬이 마룻바닥으로 대청마루에도 나타난다. 또한 에칭기법(부식법)으로 다양한 문양을 낸 크리스털 유리문 등이 모두 영국식이다. 이는 1900년 강화읍에 한옥성당을 지은 영국 성공회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투사들이 머물렀던 지하공간

고택의 안방 툇마루 밑에 성인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독립투사들이 일본 순사에게 쫓기면 그 공간에 숨겨 줬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실제로 고택의 곳곳에는 숨겨진 지하 공간들이 많다. 지하 공간 속에 들어가면 겨우 사람 발이 보일만큼 틈이 벌어져있고 그 높이도 사람 키 정도이다. 지금은 땔감을 쌓아놓는 공간, 부엌의 일부, 장독대 저장소 등으로 쓰고 있다.

현재

한옥문화체험 프로그램

현재 이곳은 강화군청과 함께 '한옥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일 오전 10시, 오후 2시와 6시 세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선착순 15명을 대상으로 전통차 시음, 소창 만들기 체험 등을 운영된다. 현재는 한옥의 일부를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할 계획이라고 한다. [3]

유림상회&소금빛서점

대명헌 한쪽에 문을 연 서점과 그릇가게. 박서연(35), 김혜지(33)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세상을 하얗게 밝히고 싶어 이름을 '소금빛'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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