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임 전도사
김상임(金商壬)은 1850년 5월 20일, 서사리 교항동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 씨의 후손으로 11세 때 동몽과에 응시해 수석합격하고, 38세가 되는 1887년 강화부 승부 초시(初試)에 등과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894년 10월, 김상임은 45세의 나이에 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김상임은 미감리회의 존스(G.H.Jones, 趙元時) 목사가 주고 간 한문 성경을 읽고 <정감록>에서 말한 난세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곳, 곧 십승지지(十勝之地)를 발견하게 된다.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 3년 동안 세상은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었고, 국운이 쇠함에 따라 백성들의 인심도 흉흉해지고 피난민도 늘었다. 1894년 정월, 동학란에 이어 2월에는 김옥균이 살해당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청일 두 나라 군함이 수원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1895년에는 민비 시해사건이, 그 다음해인 1896년 병신년에는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관에 끌려가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때 글 좀 읽는다 하는 이들부터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이들까지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으려 애썼다. 김초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한문성경 첫 글귀에서 그 답을 찾았던 것이다. [1]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내리 감리교회에서 시작한 우각 신학회 1회 입학생으로 공부를 했고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김상임의 개종은 개신교를 부녀자와 천민들이나 믿는 종교로 여기고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교산교회는 기존 서민층과 가세한 양반층이 어우러진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김상임 전도사는 교산 감리교회 2대 담임자로 사역을 하고, 그의 장남 김홍제 전도사는 4대 담임자로, 그의 차남 김우제(김이제) 전도사는 강화 중앙감리교회 3대 담임자로 목회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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